영산 문호장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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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00:00
향토문화유적명 relicsNm | 영산 문호장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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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정번호 appnNo | 창녕군 향토유적 제4호 |
향토문화유적구분 relicsKnd | 무형문화유적 |
향토문화유적종류 relicsSe | 민간신앙 |
소재지도로명주소 rdnmadr | |
소재지지번주소 lnmadr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10 |
위도 latitude | 35.46401193 |
경도 longitude | 128.538925 |
지정일자 appnDate |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posesnSe | 사유 |
소유자명 ownerNm |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scale | |
조성시대 makePd | 조선 |
이미지정보 picInfo | |
향토문화유적소개 relicsIntrcn | 영산 문호장굿은 보통 호장굿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인 굿과 달리 단오 명절에 벌이는 영산 고을의 축제이다. 이 굿은 근대 이후 몇 번의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 행정제도의 해체로 문호장굿을 주도한 아전이 행정 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굿의 조직적, 경제적 기반 약화는 불가피했다. 이렇듯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제의 강점은 굿의 전승에 또 다른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공동체적 전승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호장신文戶長神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일부 주민들에 의해 개별적인 전승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은 문호장굿의 전승에 활력을 불어넣어 잠시 과거의 문호장굿을 재현할 수 있었지만,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공동체적 전승이 중단되고 일제강점기 말처럼 개별적 전승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문호장굿의 공동체적 전승이 재개된 것은 1963년 제2회 3·1민속문화제에 이르러서였다. 문호장굿의 유래에 대해 이명구(李明九)에 의해 헌종 14년(1848) 간행된 『연조귀감속편(曺龜鑑續編)』, 관감록(觀感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문예희(文禮凞)는 영산의 향리로서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워 특별히 향역을 면제받았다. 아들인 호장 문득화文得化는 재주와 도량이 남달랐다. 천문과 둔갑도 모두 분명하게 터득했다. 집이 읍의 남쪽 유민산留民山 아래 있었는데, 밤에는 꼭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 실수로 어사에게 발각되어 거듭 추궁을 당하였다. 문득화는 탄식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데 벌을 받느니 차라리 피하여 벌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수노를 데리고 영축산으로 들어가 환신(幻身)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수리의 꿈에 나타나 산 위에 사당을 세우고 5월 5일(단오)에 경건하게 재계하여 제사를 치르며 제수는 관에서 되데, 제사를 치르는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순조 14년(1814)에 현감인 정경우(鄭耕愚)가 요사스럽고 허황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한 달 내에 관아의 11인이 죽으므로 두려운 나머지 처음같이 제사를 지냈다. |
관리기관전화번호 phoneNumber | 031-770-3370 |
관리기관명 institutionNm |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referenceDate | 2022-01-09 |
ctprvnNm | 경상남도 |
sigunguNm | 창녕군 |
sido | 38 |
sigungu | 38330 |
upmyund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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