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달사 장군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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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9 00:00
향토문화유적명 relicsNm | 양달사 장군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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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정번호 appnNo |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 |
향토문화유적구분 relicsKnd | 유형문화유적 |
향토문화유적종류 relicsSe | 건조물 |
소재지도로명주소 rdnmadr | |
소재지지번주소 lnmadr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137-7 |
위도 latitude | 34.79912134 |
경도 longitude | 126.6970881 |
지정일자 appnDate | 2019-08-22 |
소유주체구분 posesnSe | 국유 |
소유자명 ownerNm | 영암군 |
규모 scale | 일원 |
조성시대 makePd | 조선시대 |
이미지정보 picInfo | |
향토문화유적소개 relicsIntrcn | ○ 양달사 장군 유적은 양달사 관련 설화에 나오는 장독샘(將纛泉)과 시묘* 유적이다. 양달사[1518~1555]의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남암(南岩), 본관은 제주이다.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난 양달사는 1537년(중종 32)에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좌우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 현감을 지냈다. 그 뒤 1553년(명종 8)에 남해 현감에 재임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 중이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란이 일어났다. 이에 양달사는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여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상중이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공을 낮추고 모든 공훈을 전라순찰사 이준경, 남치근 등에게 돌려 아무런 포상을 받지 않았다. 1555년 12월 명종실록에 보면 조정의 포상에서 양달사가 제외된 것을 두고 장흥부 관아 벽에 양달사에게 포상이 없음을 개탄하는 시가 나붙었다는 사초*와 송촌 양응정의 편지, 호남절의록, 호남읍지 등을 근거로 영암을 대표하는 의병장이다. 장독샘은 을묘왜변 당시 왜구와의 싸움으로 병사들이 지쳐있을 때 양달사 장군이 장독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올라 병사들이 다시 힘을 내서 싸울 수 있었다는 전설이 깃든 샘이다. 역사적인 기록은 없으나 1953년부터 1958년 사이에 독립운동가 조극환 등이 작성한 영암군 향토사 원고에 그 기록이 남아 있고, 1971년 3월 영암군수 김기회가 향리의 많은 군민들과 전설들을 확인하여 직접 지은 창의장 양달사 공적비가 그 자리에 서 있으며, 이후 영암 향토지와 영암군지 등에 장독샘에 대한 전설이 다수 실려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양달사는 시묘살이를 계속했고 3년간의 시묘를 마쳤으나 전쟁 때 부상당한 여독을 뿌리 뽑지 못해 41세 되던 1559년에 결국 창독*으로 사망하였다. 양달사가 사망한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그가 사망한 뒤 100년 만인 현종 때 좌승지로 추증되고 충신으로 정려되었다. 장독샘 옆에 건립된 양달사 공적비는 이런 양달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자, 양달사의 의로운 행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
관리기관전화번호 phoneNumber | 061-470-2199 |
관리기관명 institutionNm | 전라남도 영암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referenceDate | 2021-10-29 |
ctprvnNm | 전라남도 |
sigunguNm | 영암군 |
sido | 36 |
sigungu | 36410 |
upmyund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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