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죽정자리서낭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주민들이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태평 등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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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주민들이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태평 등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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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순
정의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주민들이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태평 등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
정의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주민들이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태평 등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
내용1. 명칭 및 제일 : 죽정자리는 1~3반인 죽리와 4~6반인 정자리를 합하여 이루어진 행정구역이다. 죽리는 대나무가 많아서, 정자리는 [마을](/topic/마을)에 정자가 있어서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죽정자리는 6반까지 있다. [서낭당](/topic/서낭당)은 1~3반에 죽리서낭당, 4ㆍ5반에 정자리서낭당, 6반에 서낭당으로 모두 세 곳에 있다. 서낭[고사](/topic/고사)는 모두 같은 날에 지낸다.

죽리 서낭고사는 ‘당제사’ 또는 ‘서낭당제사’라고도 하며, 예전부터 봄과 가을로 일 년에 두 번 정일(丁日)을 택해 지내고 있다. 주로 초정일(初丁日)에 지내며, 이날이맞지 않으면 중정일(中丁日)로 넘겨서 지낸다. 정자리 서낭고사는 정월 초정일과 시월 초정일로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그러나 부정한 것을 보거나일이 벌어지면 중정일로 미뤄 지내기도 한다.

2. [제관](/topic/제관) : 죽리서낭당에는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의 세 분의 신을 모신다. 토지지신을 중심으로 왼쪽에 성황지신, 오른쪽에 여역지신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서낭고사도 중앙의 토지지신부터 지내고 성황지신ㆍ여역지신 순으로 지내며, 제관 세 명이 각각 한분의 신을 맡는다.

서낭고사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도가’ 또는‘차지’라 하며, 두 집이 맡아서 한다. 이 가운데 한 집은 가을, 다른 한 집은 봄에 각각 책임을 맡으면서 두집이 서로 도와준다.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부정을 가리고, 다른 사람이 와서 돕거나 하는 일은 없다. 도가를 맡은 집은 당고사가 정해지면 [금줄](/topic/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다. 도가는마을에서 돌아가며 맡으며, 마을 어귀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두 집씩 정해진다. 도가를 맡은 집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그다음 집으로 넘어간다.

제관은 보통 세 사람을 선정한다. 그리고 [축문](/topic/축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축관을 선정한다. 축문은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 몫으로 모두 석 장이 전해온다. 예전부터전해 오던 한문으로 된 축은 너무 어려워서 지금은 한글로 옮겨 적어 사용하고 있다. 축관은 마을에 따로 정해진 사람이 있어 간혹 제관과 축관을 겸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제관 세 명이 따로 축을 읽었으며, 부정하지 않고 깨끗한 사람 가운데 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제관이 되었다.

제관은 제일이 정해지면 집 안에만 있었으며, 보통 제관으로 선정되고 닷새 정도는 나들이를 금한다. 그리고 제일(祭日)에는 동네 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당으로 나갔다. 추운 정월에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사용하였다. 제관은 해마다 누가 맡을지 거의 정해져 있다. 소를 잡아서 고사를 지낼 때에는 부정하지 않으면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도가와 제관만 참여하는 정도이다. 더욱이 마을에 노인들만 남아 있어 일반 주민들의 서낭고사 참여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서낭고사에 여자는 참여하지않았다. 지금은 도가를 맡은 집의 여자들도 제물을 이고 서낭당에 나오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음식만 장만해 줄 뿐 서낭당에는 나오지 않았다.

3. 제물 : 죽리 서낭고사의 주요 제물은 가을에 바치던 수소 한 마리와 봄에 바치는 수탉 세 마리이다. 예전의 가을 서낭고사에는 반드시 소를 잡아서 제물로 바쳤다. 우시장에 나가 깨끗한 수소를 골라서 사 오면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서 잡았다. 소는 [가죽](/topic/가죽)을 벗긴 다음 부위별로 잘라서 바쳤다. 쇠고기는 나무꼬챙이에 꿰어 산적을 만들었다. 제물 준비는 모두 서낭당에 가마솥을 걸고 하였다. 현재는 쇠고기 세 근과 탕으로 처녑, 간, 허파, 창자 등 내장이 골고루 들어간다. 즉 고기를 사서 쓰더라도 부위별로 조금씩은 다 들어간다. [음복](/topic/음복)할 때에는 내장탕을 이용한다. 봄 서낭고사에 반드시 수탉을 쓰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수탉 세 마리를 잡아서 바친다. 이때에는 쇠고기를 쓰지 않는다.

메는 생우메([새옹](/topic/새옹)메) 세 그릇을 집에서 지어 [가지](/topic/가지)고 간다. 제주는 서낭고사가 치러지기 이틀 전에 세 주전자 분량으로 준비하였다가 제일에 걸러서 사용한다. 제주는 서낭당앞에 묻고 그 위에 모닥불을 피워 땅을 달궈서 술이 잘 빚어[지게](/topic/지게) 한다. 그리고 금줄을 쳐 이곳의 접근을 금하고 도가집도 이때 금줄을 친다. 2010년에는 비가 며칠 동안 계속내린 바람에 금줄은 서낭고사를 치르기 하루 전에 쳤다. 금줄은 서낭고사가 끝나면 바로 제거한다.

모시는 신이 세 분이기에 제물은 어물과 과일을 제외하고 모두 세 그릇씩 준비한다. 제물은 떡, 탕, 채소, 어물, 포, 과일, 돼지머리, 메 등이다. 쇠고기는 비싸서 봄에 북어한 쾌, 가을에 돼지고기 세 근을 각각 바치고 있다. 가을에 지내는 서낭고사에서는 본래 돼지 한 마리를 잡았으나 제물 비용이 많이 들어 세 근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서낭고사 제물 가운데 가장 먼저 담는 것은 토지신(土地神)의 몫으로 한다. 두 번째가 성황신(城隍神), 세번째가 여역신(癘疫神)의 몫이 된다. 이에 따라 제물을 담을 때에는제물이 담기는 제기마다 1ㆍ2ㆍ3이라는 숫자를 써서 구분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제물 가운데 1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은 토지지신 앞에 진설하게 된다.

예전에는 제일이 결정되면 제물비용을 모으러 집집마다 다녔다. 지금은 가구당 10만 원을 거둬 마련한 동네기금이 있어 이 돈을 예치해 놓고 그 이자로 제물 비용을 충당한다. 가구당 10만 원을 모은 지는 15년 정도 되었으며, 2010년 현재 120만 원이 저축되어 있다. 또한 마을에서 계를 모아 논을 샀다. 모두 3,600㎡ 정도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확](/topic/수확)으로 서낭고사를 지냈고, 장리쌀을 주어서 돈을 늘리기도 하였다. 처음 논을 살 때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쌀을 한 말씩 냈다.

정자리 서낭고사는 집집마다 쌀 한 되를 걷어서 제물을 마련한다. 2000년 이전만 해도 가구마다 10만원을 내 그것을 농협 정기예금으로 저축해 두고 그 이자로 제물 비용을 충당하였다. 지금도 농협에 210만원이 예치되어 있지만 제물 비용은 따로 걷어서 충당한다.

예전의 서낭고사에는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큰 그릇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고사가 끝나면 이 그릇에다 집집이 쇠고기 한 근, 떡 한 뭉치, 곶감 한 개, [대추](/topic/대추) 한알, 밤 한 톨을 담아서 나눠 주었다.

4. 제차 : 정자리 서낭고사는 도가 집에서 제물을 경운기로 옮긴 뒤 제관 두 명과 함께 고사를 지낼 준비를 한다. 먼저 남자들은 서낭당 청소를 하고 불을 지펴 주위의 찬 기운을 가시게 한다. 도가 집의 안주인은 이틀 전에 묻어 둔 항아리에서 제주를 걸러낸다.

제단에 제물을 차리는 동안 제관 세 명은 [도포](/topic/도포)로 갈아입고 [유건](/topic/유건)을 쓰는 등 복장을 갖춘다.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의 세 제관은 나이순으로 연장자가 맡으며, 보통 큰 부정한일이 없으면 계속 맡는다.

먼저 초헌관이 [분향](/topic/분향)을 하고 사배한 뒤 술을 한 잔올린다. 그러고 나서 제관이 함께 사배를 드린다. 신위 앞에 술을 한 잔씩 올리고, 메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는다. 초헌관이 사배하고 무릎을 꿇고서는 술을 한 잔씩 올리고, 음식에 올려진 수저의 위치를 바꾼다. 똑같이 아헌관과 종헌관이 뒤를 이어 한다. 종헌관의 순서가 끝나면 전체가 절한 뒤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잠시 묵념을 하다가 초헌의 흥소리에 일어난다. 메에 꽂은 수저를 걷어낸 다음 메의 뚜껑을 닫고는 전체 사배 드림으로써 당고사의 본 제차(祭次)는 끝난다.

다음은 제물을 조금씩 덜어내어 퇴수그릇에 담고서는 밖으로 나가 성황님께 축원을 고한 뒤 담은 음식을 비워낸다. 고사가 끝난 뒤 남는 것은 소지 올림과 음복이다. 소지를올리기 전에 큰 소지 종이를 접어서 [명주](/topic/명주) [실타래](/topic/실타래)로 성황신에 해당하는 입석에 달아맨다. 이를 ‘성황당 소지’라고 부른다. 자신들의 정성을 잘 받으시고, 올 한 해 동안 어느 가정이든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매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제관 세 명이 한 동씩 맡아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준다. 소지를 다 올리면 음복을 하고 마친다.

5. 제의 목적 및 특징 : 동네와 동네 사람들이 모두 잘되게 해 달라는 것이 서낭고사의 목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토지지신은 동네가 편안하도록, 성황신은 동네 주민들이 아무 탈 없이 지내도록, 여역신은 동네의 사람이든 [가축](/topic/가축)이든 나쁜 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뜻에서 서낭당에 세 분의 신을 모시고 있다.

동신으로 세 분의 신을 모시는 사례는 강원도 지방을 포함하여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다만 죽정자리 같은 산촌 지역과 달리 바닷가 어촌마을은 바다의 풍어를 관장하는 여서낭을 따로 모신다는 차이점이 있다.

죽정자리 서낭고사에서 삼헌관을 선정하는 것과 제일을 정일로 정한다는 점, 축을 포함하여 제차에서 유교식 절차를 따르고 있다는 점 등은 이 지역의 동제가 유교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교식 동제는 강원도지방을 포함하여 타 지역의 서낭제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마을의 인근 지역에 향교 등이 있어 이곳에서 학습을 한 마을 주민이 생기면 그동안의 제례가 유교식으로 바뀌는 현상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현지조사 (2003년 11월10일)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내용1. 명칭 및 제일 : 죽정자리는 1~3반인 죽리와 4~6반인 정자리를 합하여 이루어진 행정구역이다. 죽리는 대나무가 많아서, 정자리는 [마을](/topic/마을)에 정자가 있어서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죽정자리는 6반까지 있다. [서낭당](/topic/서낭당)은 1~3반에 죽리서낭당, 4ㆍ5반에 정자리서낭당, 6반에 서낭당으로 모두 세 곳에 있다. 서낭[고사](/topic/고사)는 모두 같은 날에 지낸다.

죽리 서낭고사는 ‘당제사’ 또는 ‘서낭당제사’라고도 하며, 예전부터 봄과 가을로 일 년에 두 번 정일(丁日)을 택해 지내고 있다. 주로 초정일(初丁日)에 지내며, 이날이맞지 않으면 중정일(中丁日)로 넘겨서 지낸다. 정자리 서낭고사는 정월 초정일과 시월 초정일로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그러나 부정한 것을 보거나일이 벌어지면 중정일로 미뤄 지내기도 한다.

2. [제관](/topic/제관) : 죽리서낭당에는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의 세 분의 신을 모신다. 토지지신을 중심으로 왼쪽에 성황지신, 오른쪽에 여역지신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서낭고사도 중앙의 토지지신부터 지내고 성황지신ㆍ여역지신 순으로 지내며, 제관 세 명이 각각 한분의 신을 맡는다.

서낭고사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도가’ 또는‘차지’라 하며, 두 집이 맡아서 한다. 이 가운데 한 집은 가을, 다른 한 집은 봄에 각각 책임을 맡으면서 두집이 서로 도와준다.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부정을 가리고, 다른 사람이 와서 돕거나 하는 일은 없다. 도가를 맡은 집은 당고사가 정해지면 [금줄](/topic/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다. 도가는마을에서 돌아가며 맡으며, 마을 어귀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두 집씩 정해진다. 도가를 맡은 집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그다음 집으로 넘어간다.

제관은 보통 세 사람을 선정한다. 그리고 [축문](/topic/축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축관을 선정한다. 축문은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 몫으로 모두 석 장이 전해온다. 예전부터전해 오던 한문으로 된 축은 너무 어려워서 지금은 한글로 옮겨 적어 사용하고 있다. 축관은 마을에 따로 정해진 사람이 있어 간혹 제관과 축관을 겸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제관 세 명이 따로 축을 읽었으며, 부정하지 않고 깨끗한 사람 가운데 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제관이 되었다.

제관은 제일이 정해지면 집 안에만 있었으며, 보통 제관으로 선정되고 닷새 정도는 나들이를 금한다. 그리고 제일(祭日)에는 동네 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당으로 나갔다. 추운 정월에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사용하였다. 제관은 해마다 누가 맡을지 거의 정해져 있다. 소를 잡아서 고사를 지낼 때에는 부정하지 않으면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도가와 제관만 참여하는 정도이다. 더욱이 마을에 노인들만 남아 있어 일반 주민들의 서낭고사 참여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서낭고사에 여자는 참여하지않았다. 지금은 도가를 맡은 집의 여자들도 제물을 이고 서낭당에 나오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음식만 장만해 줄 뿐 서낭당에는 나오지 않았다.

3. 제물 : 죽리 서낭고사의 주요 제물은 가을에 바치던 수소 한 마리와 봄에 바치는 수탉 세 마리이다. 예전의 가을 서낭고사에는 반드시 소를 잡아서 제물로 바쳤다. 우시장에 나가 깨끗한 수소를 골라서 사 오면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서 잡았다. 소는 [가죽](/topic/가죽)을 벗긴 다음 부위별로 잘라서 바쳤다. 쇠고기는 나무꼬챙이에 꿰어 산적을 만들었다. 제물 준비는 모두 서낭당에 가마솥을 걸고 하였다. 현재는 쇠고기 세 근과 탕으로 처녑, 간, 허파, 창자 등 내장이 골고루 들어간다. 즉 고기를 사서 쓰더라도 부위별로 조금씩은 다 들어간다. [음복](/topic/음복)할 때에는 내장탕을 이용한다. 봄 서낭고사에 반드시 수탉을 쓰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수탉 세 마리를 잡아서 바친다. 이때에는 쇠고기를 쓰지 않는다.

메는 생우메([새옹](/topic/새옹)메) 세 그릇을 집에서 지어 [가지](/topic/가지)고 간다. 제주는 서낭고사가 치러지기 이틀 전에 세 주전자 분량으로 준비하였다가 제일에 걸러서 사용한다. 제주는 서낭당앞에 묻고 그 위에 모닥불을 피워 땅을 달궈서 술이 잘 빚어[지게](/topic/지게) 한다. 그리고 금줄을 쳐 이곳의 접근을 금하고 도가집도 이때 금줄을 친다. 2010년에는 비가 며칠 동안 계속내린 바람에 금줄은 서낭고사를 치르기 하루 전에 쳤다. 금줄은 서낭고사가 끝나면 바로 제거한다.

모시는 신이 세 분이기에 제물은 어물과 과일을 제외하고 모두 세 그릇씩 준비한다. 제물은 떡, 탕, 채소, 어물, 포, 과일, 돼지머리, 메 등이다. 쇠고기는 비싸서 봄에 북어한 쾌, 가을에 돼지고기 세 근을 각각 바치고 있다. 가을에 지내는 서낭고사에서는 본래 돼지 한 마리를 잡았으나 제물 비용이 많이 들어 세 근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서낭고사 제물 가운데 가장 먼저 담는 것은 토지신(土地神)의 몫으로 한다. 두 번째가 성황신(城隍神), 세번째가 여역신(癘疫神)의 몫이 된다. 이에 따라 제물을 담을 때에는제물이 담기는 제기마다 1ㆍ2ㆍ3이라는 숫자를 써서 구분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제물 가운데 1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은 토지지신 앞에 진설하게 된다.

예전에는 제일이 결정되면 제물비용을 모으러 집집마다 다녔다. 지금은 가구당 10만 원을 거둬 마련한 동네기금이 있어 이 돈을 예치해 놓고 그 이자로 제물 비용을 충당한다. 가구당 10만 원을 모은 지는 15년 정도 되었으며, 2010년 현재 120만 원이 저축되어 있다. 또한 마을에서 계를 모아 논을 샀다. 모두 3,600㎡ 정도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확](/topic/수확)으로 서낭고사를 지냈고, 장리쌀을 주어서 돈을 늘리기도 하였다. 처음 논을 살 때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쌀을 한 말씩 냈다.

정자리 서낭고사는 집집마다 쌀 한 되를 걷어서 제물을 마련한다. 2000년 이전만 해도 가구마다 10만원을 내 그것을 농협 정기예금으로 저축해 두고 그 이자로 제물 비용을 충당하였다. 지금도 농협에 210만원이 예치되어 있지만 제물 비용은 따로 걷어서 충당한다.

예전의 서낭고사에는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큰 그릇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고사가 끝나면 이 그릇에다 집집이 쇠고기 한 근, 떡 한 뭉치, 곶감 한 개, [대추](/topic/대추) 한알, 밤 한 톨을 담아서 나눠 주었다.

4. 제차 : 정자리 서낭고사는 도가 집에서 제물을 경운기로 옮긴 뒤 제관 두 명과 함께 고사를 지낼 준비를 한다. 먼저 남자들은 서낭당 청소를 하고 불을 지펴 주위의 찬 기운을 가시게 한다. 도가 집의 안주인은 이틀 전에 묻어 둔 항아리에서 제주를 걸러낸다.

제단에 제물을 차리는 동안 제관 세 명은 [도포](/topic/도포)로 갈아입고 [유건](/topic/유건)을 쓰는 등 복장을 갖춘다.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의 세 제관은 나이순으로 연장자가 맡으며, 보통 큰 부정한일이 없으면 계속 맡는다.

먼저 초헌관이 [분향](/topic/분향)을 하고 사배한 뒤 술을 한 잔올린다. 그러고 나서 제관이 함께 사배를 드린다. 신위 앞에 술을 한 잔씩 올리고, 메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는다. 초헌관이 사배하고 무릎을 꿇고서는 술을 한 잔씩 올리고, 음식에 올려진 수저의 위치를 바꾼다. 똑같이 아헌관과 종헌관이 뒤를 이어 한다. 종헌관의 순서가 끝나면 전체가 절한 뒤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잠시 묵념을 하다가 초헌의 흥소리에 일어난다. 메에 꽂은 수저를 걷어낸 다음 메의 뚜껑을 닫고는 전체 사배 드림으로써 당고사의 본 제차(祭次)는 끝난다.

다음은 제물을 조금씩 덜어내어 퇴수그릇에 담고서는 밖으로 나가 성황님께 축원을 고한 뒤 담은 음식을 비워낸다. 고사가 끝난 뒤 남는 것은 소지 올림과 음복이다. 소지를올리기 전에 큰 소지 종이를 접어서 [명주](/topic/명주) [실타래](/topic/실타래)로 성황신에 해당하는 입석에 달아맨다. 이를 ‘성황당 소지’라고 부른다. 자신들의 정성을 잘 받으시고, 올 한 해 동안 어느 가정이든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매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제관 세 명이 한 동씩 맡아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준다. 소지를 다 올리면 음복을 하고 마친다.

5. 제의 목적 및 특징 : 동네와 동네 사람들이 모두 잘되게 해 달라는 것이 서낭고사의 목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토지지신은 동네가 편안하도록, 성황신은 동네 주민들이 아무 탈 없이 지내도록, 여역신은 동네의 사람이든 [가축](/topic/가축)이든 나쁜 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뜻에서 서낭당에 세 분의 신을 모시고 있다.

동신으로 세 분의 신을 모시는 사례는 강원도 지방을 포함하여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다만 죽정자리 같은 산촌 지역과 달리 바닷가 어촌마을은 바다의 풍어를 관장하는 여서낭을 따로 모신다는 차이점이 있다.

죽정자리 서낭고사에서 삼헌관을 선정하는 것과 제일을 정일로 정한다는 점, 축을 포함하여 제차에서 유교식 절차를 따르고 있다는 점 등은 이 지역의 동제가 유교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교식 동제는 강원도지방을 포함하여 타 지역의 서낭제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마을의 인근 지역에 향교 등이 있어 이곳에서 학습을 한 마을 주민이 생기면 그동안의 제례가 유교식으로 바뀌는 현상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현지조사 (2003년 11월10일)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역사옛날 큰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서낭당](/topic/서낭당)이 있어 서낭목이라 불렀다. 봄[고사](/topic/고사)는 여기서 지냈으며,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는 [마을](/topic/마을)의 당에서 지냈다. 초계 정씨(草溪 鄭氏) 7대조 어른이 현몽하기를 ‘내가 사실 여기 나무에 살고 있으니 식은 밥이라도 한술 보내 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역사옛날 큰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서낭당](/topic/서낭당)이 있어 서낭목이라 불렀다. 봄[고사](/topic/고사)는 여기서 지냈으며,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는 [마을](/topic/마을)의 당에서 지냈다. 초계 정씨(草溪 鄭氏) 7대조 어른이 현몽하기를 ‘내가 사실 여기 나무에 살고 있으니 식은 밥이라도 한술 보내 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윤동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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