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인

한국무속신앙사전
안사인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topic/제주칠머리당굿) 전승보[유자](/topic/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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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topic/제주칠머리당굿) 전승보[유자](/topic/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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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식
정의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topic/제주칠머리당굿) 전승보[유자](/topic/유자).
내용안사인(安士仁, 남, 1928~1990)은 제주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큰심방으로 흔히 ‘연이심방’으로 통한다. 제주시 용담1동에서 거주한 안사인은 제주시와 북제주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제주도 무속의 가치를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학력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과 2년을 수료한 것이 전부이다. 학교를 마친 뒤에 제주군사비행장에서 군속으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안사인의 집안은 오랜 내력을 쌓은 심방 집안이 아니다. 증조부가 19대를 이어온 심방집 딸과 결혼하면서 무업과 관련을 맺게 되었고, 조부 때부터 증조모의 일을 물려받아 본격적인 무업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안사인은 멩두로 치면 22대에 이르는 내력을 지니는 심방인 셈이다. 그러나 안사인 대에는 안씨 혼자 무업에 종사하였다. 누이나 자식 가운데 무업에 종사하는 이는 전혀 없다.

안사인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굿판에서 보고 배우며 자랐다. 그러다가 15세 무렵부터 무업에 종사하였다. 그가 무업에 나서게 된 것은 아버지가 병들어 무업을 계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신 당에 가서 간단한 비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한 안사인은 이때 별다른 학습과정을 따로 거치지 않았음에도 무가를 어렵지 않게 술술 내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부터 시름시름 앓게 되어 자연스럽게 멩두를 물려받기로 하였다. 19세 때 멩두를 물려받은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3세 때 초신질을 바로잡는 신굿을 하여 온전한 심방의 자격을 얻은 안사인은 이때부터 용담동 한 냇가에 있는 시락당의 매인심방을 노릇을 맡았다. 훗날 이달춘 심방의 뒤를 이어 건입동 칠머리당의 매인심방을 맡았다. 36세 때 이신질 49세 때 삼신질을 바로잡는 신굿을 하여 심방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인 상신충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이전부터 제주도를 대표하는 심방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모든 굿에 능하였으며, 특히 목소리가 좋고 춤을 곱게 잘 추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영게울림’을 그럴듯하게 해내어 지금도 심방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초감제의 처음에 말미를 하지 않고 바로 베[포도](/topic/포도)업침으로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에 칠머리당굿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면서 그 기능보[유자](/topic/유자)로 인정받았다. 칠머리당굿 보존회를 결성하여 많은 후배 심방을 모아 기능을 전수하던 도중에 1990년에 63의 일기로 안타깝게도 영면에 들었다.

현용준의 《제주도무속자료[사전](/topic/사전)》에 그의 문서가 대폭 수용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문서의 조사기간은 1959년부터 1967년 사이다. 이 기간은 안사인의 30대 시절로, 그가 본격적으로 무업에 뛰어든 지 10년 뒤의 일이다. 안사인은 불과 10년 만에 제주도 굿의 모든 문서를 다 꿰뚫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안사인은 그 어떤 심방보다 많은 문서를 남긴 셈이다. 그의 노력으로 제주도굿이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서는 《제주도무속자료사전》에 많이 수록되어 있고, 더러 음성자료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한국무속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1)
제주도무속연구 (현용준, 집문당, 1986)
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아름다움을 훔치다 (김수남, 열림원, 2004)
서문당제주도 신화현용준1972
제주도 무속과 서사무가장주근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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