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해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육지 거주자들이 울릉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적응하면서 행하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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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거주자들이 울릉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적응하면서 행하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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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정의육지 거주자들이 울릉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적응하면서 행하는 동제.
정의육지 거주자들이 울릉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적응하면서 행하는 동제.
내용해양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울릉도의 동제는 특수한 제의 특성을 지닌다기보다 육지에서 행하는 동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즉 울릉도로 이주한 주민들이 고향에서 행하던 제의를 변화시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특성과 함께 이전에 행하던 제의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동제가 새로운 환경에 이식된 뒤에도 이전의 모습과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고, 그렇게 행하려는 주민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 동제 : 울릉도 태하동 성하신당의 사례를 통해 울릉도 동제를 살펴보자. 성하신당 제의를 수행하는 과정은 [제관](/topic/제관) 선정, 제수 준비, 정화의례, 정형화된 의례 진행 과정, 소지, [음복](/topic/음복), 지신밟기 등 육지에서 동제를 행할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동제를 지내는 동안 금기와 목욕과 같은 정화의례를 행하며, 희생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한 해의 안녕과 평안․풍요를 비는 기원을 하는 과정도 유사하다.

제의는 먼저 제관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관은 설을 쇠고 나서 [마을](/topic/마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사(제당 관리자)가 중심이 되어 제주와 제관 두 명을 선정한다. 이때 다른 종교를 믿지 않는 이로서 유교적 사고가 있으며 가정에 이상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유사와 제주는 금기를 시작한다. 제당 주변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리고 [금줄](/topic/금줄)을 치며, 제관과 제주 집에도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친다. 그리고 부부가 목욕을 하여야 하며, 보기 싫은 곳에 [가지](/topic/가지) 않고 초상이나 아기 낳은 집 등 부정으로 여기는 것을 보아서도 안 된다. 몸을 깨끗이 하는데 소변을 봐도 손을 씻어야 할 정도로 근신했다. 그래서 이것을 ‘병원 환자 다루기보다 더 깨끗이 한다’고 한다.

이날부터 제수를 준비한다. 도동에 가서 장을 보고, 생선과 나물 등은 마을에서 구한다. 경비는 옛날에는 ‘[동답](/topic/동답)(洞畓)’이라고 하여 서너 [마지기](/topic/마지기)의 논에서 나는 쌀을 팔아 마련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 논을 [개간](/topic/개간)하여 [소작](/topic/소작)을 주고 매년 도조를 받아서 경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특별조치법이 시행될 때 이것을 매각 처분하였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참배하면서 두고 간 헌금과 배를 지은 사람들이 희사한 돈으로 제비를 충당한다. 본래 무보수로 일하던 유사가 이 모든 관리를 했으나 현재는 태하경로당에서 담당한다. 대개 지난해의 제관이 관리인으로 지정된다. 그 관리인에게 수고비로 일 년에 100여 만 원을 주기로 하고, 나머지는 경로회관에 보관한다. 일 년 동안 적립된 돈은 설을 쇠고 난 뒤 제당의 유지비와 제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열나흗날이 되면 제주 부부가 제수를 준비한다. 제수는 제당마다 별도로 준비한다. 그날 밤 12시쯤이 되면 제주와 축관 겸 제관 두 명 등 세 명이 준비한 제수를 제당으로 가져 가서 제의를 행한다. 이때 남자들만 제의에 참여하며, 소요 시간은 세 시간 정도이다. 제의는 천제당-산제당-성황당-해신당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당 제의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제수를 들고 다음 제당으로 가서 제의를 행한다.

진설하는 제물은 다음과 같다. 배․[사과](/topic/사과)․감․곶감․밤 등 과일(제주댁의 마음에 따라 바나나 등도 사용. 과일은 손질하지 않은 채로 사용), 우럭․볼락․문어․오징어 등 어물(비늘과 내장을 제거한 뒤 찌며, 이것을 튀길 때는 콩기름을 사용), 꼬치용 쇠고기와 삶은 돼지머리 및 꼬치용 돼지고기 등 육류(닭은 사용하지 않음. 해신당에는 돼지 다리 한쪽을 사용), 파전․두부전․고기산적․문어꼬지․쇠고기꼬지․돼지고기꼬지 등 전, 술(쌀 한두 되를 누룩으로 제주 댁에서 제조. 제의를 행하고 난 뒤 음복주는 소주), 메, 산나물(고비, 고사리, 콩나물, 무나물 등을 참기름으로 볶아서 사용. 이들은 깨끗한 집에서 구입), 탕(모두 민탕을 쓰며, 꼬지를 만들고 남은 것과 문어고기 잘게 썬 것, 오징어 잘게 썬 것, 두부를 넣어 끓인 것) 등이다.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각 제당 제의 절차는 [축문](/topic/축문)만 다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동일하다. 축문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주민들은 축문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두었다. 이 책에는 한자로 된 축문과 한글로 된 축문이 함께 수록돼 있으며, 제의에서는 한글 축문을 사용한다. 천제당의 제의에서는 축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제당에서 행하는 제의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강신(제주가 향을 사르고 술을 따라 모사에 붓는다)-[참신](/topic/참신)(참가한 제관이 재배)-[초헌](/topic/초헌)례(첫 번째 잔을 올림)-[독축](/topic/독축)(축문 읽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유식(메 뚜껑을 열고 수저를 얹어서 소원을 빈다. 모두 꿇어앉아서 엎드린다)-재배-[철상](/topic/철상)(참가자들이 그 자리에서 복주를 마시고 철상한다)-소지올리기(이 절차는 번거롭다고 하여 2000년 들어 생략함)-귀가.

날이 밝으면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인사하러 온다. 마을 사람들은 [꽹과리](/topic/꽹과리)를 치면서 하루를 논다. 제주 집과 제관 집을 시작으로 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풍물을 치며 술을 마시고 논다. 이것을 ‘풍물치고 논다’고 한다.

2. 해신제 : 울릉도의 해신제로는 개인이 동제당에 들러서 행하는 유형과 주민들이 공동으로 행하는 동제 유형이 있다.

성하신당에서 행하는 해신제는 ‘배고사’라고 하여 선주나 어로작업을 하는 사람,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 등이 성하신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는 등 개인이 행하는 유형이다. 특히 배를 만든 사람은 어떠한 종교를 믿더라도 여기에 와서 무사고와 선원의 안녕을 빈다. 또한 군민의 안녕 및 풍어, 풍년, 해상작업의 안전을 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해신제를 태하동에서 주로 지냈다. 1997년부터 동제와 해신제를 통합하여 제사를 지낸다. 태하동에서는 해신제를 뱃고사라 하기도 한다. 처음 배를 짓게 되면 선주는 태하신당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이때 돼지는 주로 바닥에 칠성점이가 박혀 있는 앞다리만 사용한다. 이런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로서 의미가 높기 때문이며, 머리와 함께 사용한다. 이 밖의 제물은 메, 떡, 과일, 해물 등이다. 이 제물의 양을 많이 준비해 제의를 마친 뒤 술과 함께 태하경로당에 가져가서 노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선주와 선장, 기관장, 구경꾼, 무당 등을 배에 태우고 간다. 무당은 도동에서 주로 데리고 간다. 제단에 제물을 차리는 방법은 해물을 위쪽, 과일을 아래쪽에 차리는 등 [기제사](/topic/기제사)와 동일하다. 선주가 먼저 술잔을 올리고 나서 선장과 기관장이 차례로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선주가 제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봉투에 돈을 넣어 [서낭당](/topic/서낭당)에 바치기도 하고, [한복](/topic/한복)과 [신발](/topic/신발)과 [양말](/topic/양말)까지 두 벌씩 준비해 바치기도 한다. 제단에 [위패](/topic/위패)만 모셔져 있던 때에는 작은 [의복](/topic/의복)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신체(神體)를 석고상으로 다시 모시고는 ‘처녀 총각이 어른한다’고 하면서 두 신을 혼인시켰다. 이때 군수와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도 모두 한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도동 사람들도 참여하는 등 큰 잔치를 열었다. 그 후 서낭당의 참배객들은 어른 옷인 큰 옷을 제당에 바치게 되었다. 서낭당에는 참배객들이 바친 옷이 많이 걸려 있다. 이곳에 옷이 여러 벌 쌓이면 마을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입도록 한다.

참배객들이 바치는 돈은 유사가 받아서 기록하고, 그 돈을 모아서 제당 관리비와 제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제의를 행하는 것은 신의 기분이 좋아져서 사업이 잘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운항 중인 포항∼울릉도 정기여객선인 선플라워호의 선주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이곳의 해신제는 울릉도민들에게 유명하다.

학포의 해신제는 동제 유형이다. 이곳의 해신제는 마을 남쪽에 위치한 산왕각에서 행한다. [현판](/topic/현판)에는 칡덩굴에 종이와 솔잎을 끼워서 달아 두었으며, 제당은 양철[지붕](/topic/지붕)에 돌로 벽을 쌓았다. 입구에는 ‘뿔뚜나무’([보리](/topic/보리)수)가 서 있다. 제당 내부에는 해왕신위(海王神位)와 울릉도산신대왕신위(鬱陵島山神大王神位)가 모셔져 있고, 각 위패에는 [백지](/topic/백지)를 접어서 덮어 두었다. 즉 현판은 ‘산왕각’이지만 주민들이 ‘해신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先)주민들이 산신을 주로 모시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어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해신을 동시에 [합설](/topic/합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당 내부에는 삼짇날 풍어제를 행할 때와 지신밟기를 할 때 사용하는 북과 징이 보관되어 있다.

제의는 3월 3일 새벽 4시쯤에 제관 두 명, 제주와 축관 각 한 명이 참여하여 이루어진다. 축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한글로 기록된 것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축문 자체가 없어졌다. 제일(祭日) 열흘 전에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은 사흘 전에 제당과 집에 해송가지와 백지 조각을 달아 둔 금줄을 친다. 1994, 1995년부터는 칡덩굴로 금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리고 하루 전에 제당을 청소한다. 황토는 제당 입구에만 뿌리고, 제관의 목욕은 자기 집에서 행한다. 제수는 [주과포](/topic/주과포), 메, 나물(콩나물과 산나물), 돼지머리 한 개(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머리만 사용함), 문어, 전복, 소라 등이다. 제의를 행한 아침에는 음복을 하면서 술을 마신다. 이때 꽹과리를 치고 다니며, 모든 배에 올라서 풍어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학포 주민들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산신제도 지낸다. 산신당에는 토지산령지위(土地山靈之位), 성황신지위(城隍神之位), 여질지신위(癘疾之神位) 등 세 개의 위패가 하나의 제단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는 별도로 토지지신산령지위(土地之神山靈之位)의 위패가 있다. 이는 1950년 즈음 인근 삼막마을의 신위를 합설하였기 때문이다. 제의를 행할 때에는 산신당에서 제의를 먼저 행한 다음 그 음식을 가지고 산왕각으로 내려가서 해신당의 제의를 올린다. 이것으로 보아 주민들은 산신이 해신보다 더 높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독도](/topic/독도) 울릉도의 자연환경과 도민의 문화 (박성용․이기태, 독도 울릉도의 종합적 고찰,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편, 1998울릉도 동제의 의례성과 제의 수행집단의 변화)
공동체 신앙의 변화를 통한 집단 정체성 회복 (이기태, 지역문화사의 민속학적 인식, 2004)
내용해양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울릉도의 동제는 특수한 제의 특성을 지닌다기보다 육지에서 행하는 동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즉 울릉도로 이주한 주민들이 고향에서 행하던 제의를 변화시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특성과 함께 이전에 행하던 제의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동제가 새로운 환경에 이식된 뒤에도 이전의 모습과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고, 그렇게 행하려는 주민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 동제 : 울릉도 태하동 성하신당의 사례를 통해 울릉도 동제를 살펴보자. 성하신당 제의를 수행하는 과정은 [제관](/topic/제관) 선정, 제수 준비, 정화의례, 정형화된 의례 진행 과정, 소지, [음복](/topic/음복), 지신밟기 등 육지에서 동제를 행할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동제를 지내는 동안 금기와 목욕과 같은 정화의례를 행하며, 희생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한 해의 안녕과 평안․풍요를 비는 기원을 하는 과정도 유사하다.

제의는 먼저 제관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관은 설을 쇠고 나서 [마을](/topic/마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사(제당 관리자)가 중심이 되어 제주와 제관 두 명을 선정한다. 이때 다른 종교를 믿지 않는 이로서 유교적 사고가 있으며 가정에 이상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유사와 제주는 금기를 시작한다. 제당 주변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리고 [금줄](/topic/금줄)을 치며, 제관과 제주 집에도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친다. 그리고 부부가 목욕을 하여야 하며, 보기 싫은 곳에 [가지](/topic/가지) 않고 초상이나 아기 낳은 집 등 부정으로 여기는 것을 보아서도 안 된다. 몸을 깨끗이 하는데 소변을 봐도 손을 씻어야 할 정도로 근신했다. 그래서 이것을 ‘병원 환자 다루기보다 더 깨끗이 한다’고 한다.

이날부터 제수를 준비한다. 도동에 가서 장을 보고, 생선과 나물 등은 마을에서 구한다. 경비는 옛날에는 ‘[동답](/topic/동답)(洞畓)’이라고 하여 서너 [마지기](/topic/마지기)의 논에서 나는 쌀을 팔아 마련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 논을 [개간](/topic/개간)하여 [소작](/topic/소작)을 주고 매년 도조를 받아서 경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특별조치법이 시행될 때 이것을 매각 처분하였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참배하면서 두고 간 헌금과 배를 지은 사람들이 희사한 돈으로 제비를 충당한다. 본래 무보수로 일하던 유사가 이 모든 관리를 했으나 현재는 태하경로당에서 담당한다. 대개 지난해의 제관이 관리인으로 지정된다. 그 관리인에게 수고비로 일 년에 100여 만 원을 주기로 하고, 나머지는 경로회관에 보관한다. 일 년 동안 적립된 돈은 설을 쇠고 난 뒤 제당의 유지비와 제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열나흗날이 되면 제주 부부가 제수를 준비한다. 제수는 제당마다 별도로 준비한다. 그날 밤 12시쯤이 되면 제주와 축관 겸 제관 두 명 등 세 명이 준비한 제수를 제당으로 가져 가서 제의를 행한다. 이때 남자들만 제의에 참여하며, 소요 시간은 세 시간 정도이다. 제의는 천제당-산제당-성황당-해신당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당 제의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제수를 들고 다음 제당으로 가서 제의를 행한다.

진설하는 제물은 다음과 같다. 배․[사과](/topic/사과)․감․곶감․밤 등 과일(제주댁의 마음에 따라 바나나 등도 사용. 과일은 손질하지 않은 채로 사용), 우럭․볼락․문어․오징어 등 어물(비늘과 내장을 제거한 뒤 찌며, 이것을 튀길 때는 콩기름을 사용), 꼬치용 쇠고기와 삶은 돼지머리 및 꼬치용 돼지고기 등 육류(닭은 사용하지 않음. 해신당에는 돼지 다리 한쪽을 사용), 파전․두부전․고기산적․문어꼬지․쇠고기꼬지․돼지고기꼬지 등 전, 술(쌀 한두 되를 누룩으로 제주 댁에서 제조. 제의를 행하고 난 뒤 음복주는 소주), 메, 산나물(고비, 고사리, 콩나물, 무나물 등을 참기름으로 볶아서 사용. 이들은 깨끗한 집에서 구입), 탕(모두 민탕을 쓰며, 꼬지를 만들고 남은 것과 문어고기 잘게 썬 것, 오징어 잘게 썬 것, 두부를 넣어 끓인 것) 등이다.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각 제당 제의 절차는 [축문](/topic/축문)만 다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동일하다. 축문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주민들은 축문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두었다. 이 책에는 한자로 된 축문과 한글로 된 축문이 함께 수록돼 있으며, 제의에서는 한글 축문을 사용한다. 천제당의 제의에서는 축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제당에서 행하는 제의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강신(제주가 향을 사르고 술을 따라 모사에 붓는다)-[참신](/topic/참신)(참가한 제관이 재배)-[초헌](/topic/초헌)례(첫 번째 잔을 올림)-[독축](/topic/독축)(축문 읽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유식(메 뚜껑을 열고 수저를 얹어서 소원을 빈다. 모두 꿇어앉아서 엎드린다)-재배-[철상](/topic/철상)(참가자들이 그 자리에서 복주를 마시고 철상한다)-소지올리기(이 절차는 번거롭다고 하여 2000년 들어 생략함)-귀가.

날이 밝으면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인사하러 온다. 마을 사람들은 [꽹과리](/topic/꽹과리)를 치면서 하루를 논다. 제주 집과 제관 집을 시작으로 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풍물을 치며 술을 마시고 논다. 이것을 ‘풍물치고 논다’고 한다.

2. 해신제 : 울릉도의 해신제로는 개인이 동제당에 들러서 행하는 유형과 주민들이 공동으로 행하는 동제 유형이 있다.

성하신당에서 행하는 해신제는 ‘배고사’라고 하여 선주나 어로작업을 하는 사람,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 등이 성하신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는 등 개인이 행하는 유형이다. 특히 배를 만든 사람은 어떠한 종교를 믿더라도 여기에 와서 무사고와 선원의 안녕을 빈다. 또한 군민의 안녕 및 풍어, 풍년, 해상작업의 안전을 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해신제를 태하동에서 주로 지냈다. 1997년부터 동제와 해신제를 통합하여 제사를 지낸다. 태하동에서는 해신제를 뱃고사라 하기도 한다. 처음 배를 짓게 되면 선주는 태하신당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이때 돼지는 주로 바닥에 칠성점이가 박혀 있는 앞다리만 사용한다. 이런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로서 의미가 높기 때문이며, 머리와 함께 사용한다. 이 밖의 제물은 메, 떡, 과일, 해물 등이다. 이 제물의 양을 많이 준비해 제의를 마친 뒤 술과 함께 태하경로당에 가져가서 노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선주와 선장, 기관장, 구경꾼, 무당 등을 배에 태우고 간다. 무당은 도동에서 주로 데리고 간다. 제단에 제물을 차리는 방법은 해물을 위쪽, 과일을 아래쪽에 차리는 등 [기제사](/topic/기제사)와 동일하다. 선주가 먼저 술잔을 올리고 나서 선장과 기관장이 차례로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선주가 제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봉투에 돈을 넣어 [서낭당](/topic/서낭당)에 바치기도 하고, [한복](/topic/한복)과 [신발](/topic/신발)과 [양말](/topic/양말)까지 두 벌씩 준비해 바치기도 한다. 제단에 [위패](/topic/위패)만 모셔져 있던 때에는 작은 [의복](/topic/의복)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신체(神體)를 석고상으로 다시 모시고는 ‘처녀 총각이 어른한다’고 하면서 두 신을 혼인시켰다. 이때 군수와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도 모두 한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도동 사람들도 참여하는 등 큰 잔치를 열었다. 그 후 서낭당의 참배객들은 어른 옷인 큰 옷을 제당에 바치게 되었다. 서낭당에는 참배객들이 바친 옷이 많이 걸려 있다. 이곳에 옷이 여러 벌 쌓이면 마을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입도록 한다.

참배객들이 바치는 돈은 유사가 받아서 기록하고, 그 돈을 모아서 제당 관리비와 제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제의를 행하는 것은 신의 기분이 좋아져서 사업이 잘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운항 중인 포항∼울릉도 정기여객선인 선플라워호의 선주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이곳의 해신제는 울릉도민들에게 유명하다.

학포의 해신제는 동제 유형이다. 이곳의 해신제는 마을 남쪽에 위치한 산왕각에서 행한다. [현판](/topic/현판)에는 칡덩굴에 종이와 솔잎을 끼워서 달아 두었으며, 제당은 양철[지붕](/topic/지붕)에 돌로 벽을 쌓았다. 입구에는 ‘뿔뚜나무’([보리](/topic/보리)수)가 서 있다. 제당 내부에는 해왕신위(海王神位)와 울릉도산신대왕신위(鬱陵島山神大王神位)가 모셔져 있고, 각 위패에는 [백지](/topic/백지)를 접어서 덮어 두었다. 즉 현판은 ‘산왕각’이지만 주민들이 ‘해신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先)주민들이 산신을 주로 모시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어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해신을 동시에 [합설](/topic/합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당 내부에는 삼짇날 풍어제를 행할 때와 지신밟기를 할 때 사용하는 북과 징이 보관되어 있다.

제의는 3월 3일 새벽 4시쯤에 제관 두 명, 제주와 축관 각 한 명이 참여하여 이루어진다. 축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한글로 기록된 것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축문 자체가 없어졌다. 제일(祭日) 열흘 전에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은 사흘 전에 제당과 집에 해송가지와 백지 조각을 달아 둔 금줄을 친다. 1994, 1995년부터는 칡덩굴로 금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리고 하루 전에 제당을 청소한다. 황토는 제당 입구에만 뿌리고, 제관의 목욕은 자기 집에서 행한다. 제수는 [주과포](/topic/주과포), 메, 나물(콩나물과 산나물), 돼지머리 한 개(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머리만 사용함), 문어, 전복, 소라 등이다. 제의를 행한 아침에는 음복을 하면서 술을 마신다. 이때 꽹과리를 치고 다니며, 모든 배에 올라서 풍어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학포 주민들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산신제도 지낸다. 산신당에는 토지산령지위(土地山靈之位), 성황신지위(城隍神之位), 여질지신위(癘疾之神位) 등 세 개의 위패가 하나의 제단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는 별도로 토지지신산령지위(土地之神山靈之位)의 위패가 있다. 이는 1950년 즈음 인근 삼막마을의 신위를 합설하였기 때문이다. 제의를 행할 때에는 산신당에서 제의를 먼저 행한 다음 그 음식을 가지고 산왕각으로 내려가서 해신당의 제의를 올린다. 이것으로 보아 주민들은 산신이 해신보다 더 높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독도](/topic/독도) 울릉도의 자연환경과 도민의 문화 (박성용․이기태, 독도 울릉도의 종합적 고찰,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편, 1998울릉도 동제의 의례성과 제의 수행집단의 변화)
공동체 신앙의 변화를 통한 집단 정체성 회복 (이기태, 지역문화사의 민속학적 인식, 2004)
역사울릉도의 동제는 산신제(山神祭)와 해신제(海神祭)가 공존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울릉도의 지역사, 인구변동, [마을](/topic/마을)의 형성 과정, 제의 수행집단의 변화들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topic/가지) 민속제의가 형성된 과정은 거시적 차원에서 국가사의 변화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서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문화 및 [생업](/topic/생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울릉도 동제의 구성 형태 변화는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00년대 초기 이전이다. 선주민과 초기 집단 이주민들은 척박한 섬의 환경에서도 어업보다 주로 [농업](/topic/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였다. 물론 그들 가운데 해안에 장막을 치고 조선(造船)이나 미역 채취를 하면서 살던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높은 계곡이나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채약(採藥)과 [화전](/topic/화전)(火田) 등 농사를 생업으로 하면서 석문동, 지통골, 깍새 등지에서 살았다.

산신당은 농업과 사회ㆍ문화적 배경에 [기초](/topic/기초)한 제의 수행처였다. 조선 왕실에서는 처음으로 1882년에 이규원 감찰사 일행을 울릉도 개척을 위해 파견하였다. 이때 이 일행은 소황토구미(학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산신당에 기도를 드리고, 울릉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다섯 곳에서 산신당에 기도를 드렸다. 현재 학포의 산왕각(山王閣) [현판](/topic/현판)에 ‘光緖十年 甲申 十月’(1884년, 고종 21)이라고 쓰인 글씨는 이곳이 초기 입도민의 제의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학포의 산왕각은 태하동의 산제당보다 6년 일찍 생겼다고 전한다. 더욱이 성하신당(聖霞神堂)의 경우 태종 대에 울릉도민들을 모두 철수시킬 때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지금까지 제당과 함께 의례가 잘 유지되고 있다. 즉 중산간지대(중봉)나 해안에서 떨어진 산록(학포, 저동)마다 거주지로서의 [산막](/topic/산막)(山幕)이 산재한 구역을 중심으로 산신당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주자들은 이러한 곳에서 제의를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육지에서 행하던 신앙관습이 울릉도에 그대로 이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울릉도에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도 바다를 주관하는 신에 대한 제의를 수행한 적이 있었음이 태하동 성황당에서 확인된다. “태하동 성황당은 원해신당(元海神堂)”이라는 주민의 표현이나 ‘남양동 해신당은 태하동에서 따로 나온 신당’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울릉도민이 신앙하던 바다의 신은 해신당이 아닌 성황당에서 모셔졌다. 즉 ‘해신제’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사용된 것으로, 용왕신을 일본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해신제는 해신당보다도 성황당과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성격이 다른 신위를 별도의 공간에서 모시기보다 동일한 공간에서 [합사](/topic/합사)(合祀)하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1884년쯤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학포의 산신당에는 좌우에 각각 해왕신위(海王神位)와 울릉도산신대왕신위(鬱陵島山神大王神位), 사동3리의 신리 해신당에는 좌우에 산신신위(山神神位)와 해신신위(海神神位), 옥천ㆍ우복 해령사(海靈社)에는 좌우에 산신위(山神位)와 해신위(海神位), 사동1리(새각단) 해신당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동사신위(同社神位)․해신지위(海神之位)가 각각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 신위에서 왼쪽과 가운데에 모셔진 것이 주로 산신(山神)과 동신(洞神)인 것으로 보아 주민들은 산신과 동신이 해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 해신당이 건립되고 이를 중심으로 해신제가 수행되었지만 산신이 높은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입도(入道)한 이들이 모시던 신격이 지금까지 전승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입도한 이들의 문화와 연속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가 울릉도의 모든 산업과 주민의 생활방식을 지배하고 통제하던 일제강점기이다. 주민들 가운데 어업 종사자가 늘어나고, 특히 일본의 어업기술이 주민들에게 이전되었다. 이 시기는 해신제가 어업 종사자들의 중심 제의로 자리매김되던 때였다.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해신각과 신사(神社)를 건립하였다”는 울릉도민의 말이나 태하동 성하당연기(聖霞堂緣起)의 ‘점점실개산신각 왜인우설해신각(占占悉皆山神閣 倭人又設海神閣)’이라는 표현과 같이 신사는 도동․사동․남양동․태하동 등지에 있었으며, 이들 신사에서 해신제를 행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울릉도의 마을 확산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점을 감안하면 천부3리(죽암), 천부4리(석포), 남서2리(구암) 등과 같이 그 시기에 산신당이 증가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topic/오징어잡이)가 1930년대에 이르러 울릉도민에게 또 하나의 생업으로 자리 잡은 것을 감안하면 어업과 관련된 제의에서 일본식의 ‘해신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 이 시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 시기는 울릉도의 토착 동제와 일본의 해신제가 상이한 모습으로 공존하던 때였다.

세 번째는 광복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이다. 울릉도민에게 일제의 종식은 일본인 중심의 해신제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중심의 해신제는 광복과 더불어 종식되고, 울릉도민은 일본인의 신사를 해신당으로 사용(도동)하거나 일제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거나(현포동, 천부동, 죽암, 현포) 제당을 파괴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해신당을 신축(큰모시개, 사동, 남양동, 도동3리, 저동2리)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제당 가운데 학포동과 함께 정착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은 태하동 제당이다. 이곳에는 다섯 개의 제당(천제당, 산제당, 성황당, 법화당, 해신당)이 있다. 산제당과 해신당은 울릉도민들이 가장 먼저 산신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신당은 본래 해변에 있었으나 개척령 이후 인구가 늘면서 현재의 위치인 선착장 뒤편으로 옮겼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신사(神社)가 있어서 일본인들이 해신제를 행하던 곳이었고, 본래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삼월삼짇날에 행하던 제를 1990년대 초부터 삼짇날에만 지내고 있다. 천제당은 강원도 첨사(僉使)가 연 1회 순찰차 입도할 때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법화당은 1874년(고종 11)에 순종 탄생을 축하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강원도 영장(營長)을 수토사(搜討使)로 삼아 명승지인 이곳에 축원당을 세우고 삼 년마다 영장을 보내 축원케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증가하면서 제의는 중단되었다.

주민의 수가 갈수록 줄고 서구적 사고와 생활양식의 팽배, 기독교인의 증가로 인해 현재 산신제를 행하는 곳은 24개리 가운데 14개리(도동1ㆍ2ㆍ3리, 저동1ㆍ2ㆍ3리, 천부1ㆍ3ㆍ4리, 현포1리, 태하1ㆍ2리, 사동1ㆍ2리)이며, 동신위에 제사를 행하는 곳은 남양2리(석문)와 남양3리(통구미)이다. 또한 24개 리(里)에서 행하다가 어촌계가 없어지거나 축소되면서 2006년에는 도동1ㆍ2리, 저동, 죽암, 천부(2007), 현포, 평리동(현포2리 포함), 태하, 학포, 남양, 통구미, 사동3리(1990)와 사동3리 간령(1996), 저동3리(1980) 등의 어촌계에서만 해신제를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울릉도의 동제는 전통적 의례성이 점차 상실되어 해체되거나 해신제와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역사울릉도의 동제는 산신제(山神祭)와 해신제(海神祭)가 공존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울릉도의 지역사, 인구변동, [마을](/topic/마을)의 형성 과정, 제의 수행집단의 변화들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topic/가지) 민속제의가 형성된 과정은 거시적 차원에서 국가사의 변화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서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문화 및 [생업](/topic/생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울릉도 동제의 구성 형태 변화는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00년대 초기 이전이다. 선주민과 초기 집단 이주민들은 척박한 섬의 환경에서도 어업보다 주로 [농업](/topic/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였다. 물론 그들 가운데 해안에 장막을 치고 조선(造船)이나 미역 채취를 하면서 살던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높은 계곡이나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채약(採藥)과 [화전](/topic/화전)(火田) 등 농사를 생업으로 하면서 석문동, 지통골, 깍새 등지에서 살았다.

산신당은 농업과 사회ㆍ문화적 배경에 [기초](/topic/기초)한 제의 수행처였다. 조선 왕실에서는 처음으로 1882년에 이규원 감찰사 일행을 울릉도 개척을 위해 파견하였다. 이때 이 일행은 소황토구미(학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산신당에 기도를 드리고, 울릉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다섯 곳에서 산신당에 기도를 드렸다. 현재 학포의 산왕각(山王閣) [현판](/topic/현판)에 ‘光緖十年 甲申 十月’(1884년, 고종 21)이라고 쓰인 글씨는 이곳이 초기 입도민의 제의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학포의 산왕각은 태하동의 산제당보다 6년 일찍 생겼다고 전한다. 더욱이 성하신당(聖霞神堂)의 경우 태종 대에 울릉도민들을 모두 철수시킬 때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지금까지 제당과 함께 의례가 잘 유지되고 있다. 즉 중산간지대(중봉)나 해안에서 떨어진 산록(학포, 저동)마다 거주지로서의 [산막](/topic/산막)(山幕)이 산재한 구역을 중심으로 산신당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주자들은 이러한 곳에서 제의를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육지에서 행하던 신앙관습이 울릉도에 그대로 이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울릉도에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도 바다를 주관하는 신에 대한 제의를 수행한 적이 있었음이 태하동 성황당에서 확인된다. “태하동 성황당은 원해신당(元海神堂)”이라는 주민의 표현이나 ‘남양동 해신당은 태하동에서 따로 나온 신당’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울릉도민이 신앙하던 바다의 신은 해신당이 아닌 성황당에서 모셔졌다. 즉 ‘해신제’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사용된 것으로, 용왕신을 일본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해신제는 해신당보다도 성황당과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성격이 다른 신위를 별도의 공간에서 모시기보다 동일한 공간에서 [합사](/topic/합사)(合祀)하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1884년쯤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학포의 산신당에는 좌우에 각각 해왕신위(海王神位)와 울릉도산신대왕신위(鬱陵島山神大王神位), 사동3리의 신리 해신당에는 좌우에 산신신위(山神神位)와 해신신위(海神神位), 옥천ㆍ우복 해령사(海靈社)에는 좌우에 산신위(山神位)와 해신위(海神位), 사동1리(새각단) 해신당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동사신위(同社神位)․해신지위(海神之位)가 각각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 신위에서 왼쪽과 가운데에 모셔진 것이 주로 산신(山神)과 동신(洞神)인 것으로 보아 주민들은 산신과 동신이 해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 해신당이 건립되고 이를 중심으로 해신제가 수행되었지만 산신이 높은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입도(入道)한 이들이 모시던 신격이 지금까지 전승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입도한 이들의 문화와 연속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가 울릉도의 모든 산업과 주민의 생활방식을 지배하고 통제하던 일제강점기이다. 주민들 가운데 어업 종사자가 늘어나고, 특히 일본의 어업기술이 주민들에게 이전되었다. 이 시기는 해신제가 어업 종사자들의 중심 제의로 자리매김되던 때였다.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해신각과 신사(神社)를 건립하였다”는 울릉도민의 말이나 태하동 성하당연기(聖霞堂緣起)의 ‘점점실개산신각 왜인우설해신각(占占悉皆山神閣 倭人又設海神閣)’이라는 표현과 같이 신사는 도동․사동․남양동․태하동 등지에 있었으며, 이들 신사에서 해신제를 행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울릉도의 마을 확산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점을 감안하면 천부3리(죽암), 천부4리(석포), 남서2리(구암) 등과 같이 그 시기에 산신당이 증가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topic/오징어잡이)가 1930년대에 이르러 울릉도민에게 또 하나의 생업으로 자리 잡은 것을 감안하면 어업과 관련된 제의에서 일본식의 ‘해신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 이 시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 시기는 울릉도의 토착 동제와 일본의 해신제가 상이한 모습으로 공존하던 때였다.

세 번째는 광복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이다. 울릉도민에게 일제의 종식은 일본인 중심의 해신제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중심의 해신제는 광복과 더불어 종식되고, 울릉도민은 일본인의 신사를 해신당으로 사용(도동)하거나 일제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거나(현포동, 천부동, 죽암, 현포) 제당을 파괴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해신당을 신축(큰모시개, 사동, 남양동, 도동3리, 저동2리)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제당 가운데 학포동과 함께 정착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은 태하동 제당이다. 이곳에는 다섯 개의 제당(천제당, 산제당, 성황당, 법화당, 해신당)이 있다. 산제당과 해신당은 울릉도민들이 가장 먼저 산신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신당은 본래 해변에 있었으나 개척령 이후 인구가 늘면서 현재의 위치인 선착장 뒤편으로 옮겼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신사(神社)가 있어서 일본인들이 해신제를 행하던 곳이었고, 본래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삼월삼짇날에 행하던 제를 1990년대 초부터 삼짇날에만 지내고 있다. 천제당은 강원도 첨사(僉使)가 연 1회 순찰차 입도할 때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법화당은 1874년(고종 11)에 순종 탄생을 축하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강원도 영장(營長)을 수토사(搜討使)로 삼아 명승지인 이곳에 축원당을 세우고 삼 년마다 영장을 보내 축원케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증가하면서 제의는 중단되었다.

주민의 수가 갈수록 줄고 서구적 사고와 생활양식의 팽배, 기독교인의 증가로 인해 현재 산신제를 행하는 곳은 24개리 가운데 14개리(도동1ㆍ2ㆍ3리, 저동1ㆍ2ㆍ3리, 천부1ㆍ3ㆍ4리, 현포1리, 태하1ㆍ2리, 사동1ㆍ2리)이며, 동신위에 제사를 행하는 곳은 남양2리(석문)와 남양3리(통구미)이다. 또한 24개 리(里)에서 행하다가 어촌계가 없어지거나 축소되면서 2006년에는 도동1ㆍ2리, 저동, 죽암, 천부(2007), 현포, 평리동(현포2리 포함), 태하, 학포, 남양, 통구미, 사동3리(1990)와 사동3리 간령(1996), 저동3리(1980) 등의 어촌계에서만 해신제를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울릉도의 동제는 전통적 의례성이 점차 상실되어 해체되거나 해신제와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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