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등록

한국무속신앙사전
1637년(인조 15)부터 1727년(영조 3)까지 [예조](/topic/예조)에서 여제 설행과 관련된 계사(啓辭), 서장(書狀), 상소(上疏) 등의 내용을 베껴 기록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이며, 연월일을 먼저 적고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책의 상단에 기사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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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인조 15)부터 1727년(영조 3)까지 [예조](/topic/예조)에서 여제 설행과 관련된 계사(啓辭), 서장(書狀), 상소(上疏) 등의 내용을 베껴 기록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이며, 연월일을 먼저 적고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책의 상단에 기사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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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
정의1637년(인조 15)부터 1727년(영조 3)까지 [예조](/topic/예조)에서 여제 설행과 관련된 계사(啓辭), 서장(書狀), 상소(上疏) 등의 내용을 베껴 기록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이며, 연월일을 먼저 적고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책의 상단에 기사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부기하였다.
정의1637년(인조 15)부터 1727년(영조 3)까지 [예조](/topic/예조)에서 여제 설행과 관련된 계사(啓辭), 서장(書狀), 상소(上疏) 등의 내용을 베껴 기록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이며, 연월일을 먼저 적고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책의 상단에 기사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부기하였다.
참조[여귀](/topic/여귀)여제
참고문헌17세기 여제의 대상에 관한 연구 (이욱, 역사민속학9, 한국역사민속학회, 2000)
조선시대 국가 [사전](/topic/사전)과 여제 (이욱, 宗敎硏究19, 韓國宗敎學會, 2000)
조선시대 여제의 기능과 의의-‘뜬귀신’을 모셨던 유생들 (B. 왈라번, 동양학 3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1)
조선시대 원혼을 위한 제사의 변화와 그 의미 (이욱, 종교문화연구 3, 한신인문학연구소, 2001)
참조[여귀](/topic/여귀)여제
참고문헌17세기 여제의 대상에 관한 연구 (이욱, 역사민속학9, 한국역사민속학회, 2000)
조선시대 국가 [사전](/topic/사전)과 여제 (이욱, 宗敎硏究19, 韓國宗敎學會, 2000)
조선시대 여제의 기능과 의의-‘뜬귀신’을 모셨던 유생들 (B. 왈라번, 동양학 3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1)
조선시대 원혼을 위한 제사의 변화와 그 의미 (이욱, 종교문화연구 3, 한신인문학연구소, 2001)
내용여제는 조선시대 국가 제사 중 하나로서 소사(小祀)에 속하였다. 정기적인 제향일은 청명일과 7월 15일, 10월 1일이며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거행하였다. 한성부와 지방 군현에서는 제향일 3일 전에 각 지역 성황신에게 발고제(發告祭)를 거행하고 제향일에 각 지역 여단에서 성황신과 여귀의 신위 15위를 모시고 제향을 지냈다.

여귀 15위는 특정한 사람이나 귀신이 아니라 칼에 맞아 죽은 자(遭兵刃死者), 수화나 도적을 만나 죽은자(遇水火盜賊者),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被人取財物逼死者),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被人强奪妻妾死者), 형화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遭刑禍負屈死者), 천재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因天災疾疫死者), 맹수와 독충에 해를 당해 죽은 자(爲猛獸毒蟲所害死者), 얼고 굶주려 죽은 자(凍餒死者), 전투에서 죽은 자(戰鬪死者), 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因危急自縊者), 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被牆屋壓死者), 난산으로 죽은 자(産難死者), 벼락 맞아 죽은 자(震死者), 추락하여 죽은 자(墜死者), 죽은 후 자식이 없는 자(歿而無後者)와 같이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제등록』은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여제를 제외하고 비정기적인 여제만을 대상으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크게 두 [가지](/topic/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전쟁이나 공무로 인해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이다. 이때의 제사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의 죽음을 위로하는 형식이었다. 이 책의첫 기사에 해당하는 정축년(1637) 8월 28일 기사는 병자호란의 주요 격[전지](/topic/전지)였던 쌍령과 마희천의 전몰자 치제에 관한 것이다. 무인년(1638) 5월 13일과 6월 20일의 기사는 각각 강화도에서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과 전망인(戰亡人)을 위한 제사 기록이다. 경진년(1640) 6월 22일과 병신년(1656) 9월 4일의 기사는 바다에서 파선으로 인해 [수장](/topic/수장)된 수군들을 위한 제사에 관한 기록이다. 이러한 위안제(慰安祭) 형식의 제향이 여제의 범주에 포함되어 기록된 것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은 사람이란 공통점 때문이다.

둘째는 전염병이나 가뭄을 물리치기 위한 제사이다. 무인년(1638) 7월 18일 기사는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번져 여제에 쓸 향ㆍ축ㆍ폐백과 약물을 내려보낼 것을 결정하는 내용이다.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중앙에서 향축을 내려보낼 것을 요청하는 지방 감사 또는 [예조](/topic/예조)의 계청과 그에 관한 논의들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렇게 기양을 위한 여제를 정기적인 제향과 구별하여 ‘별려제(別癘祭)’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제는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는 제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책의 기록으로 볼 때 가뭄 때에도 여제를 거행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것은 가뭄 역시 원혼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별려제에 관한 기사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상의 문제로, 초기 기록에서는 제사 대상이 모호하며 산천신도 제사 대상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등록에 등장하는 산천으로는 지리산, 금성산, 백양산, 연덕산, 공산 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1662년(현종 3)에 조정에서 여제의 대상에 관한 논의를 거쳐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에 실린 것과 같이 성황신과 무사귀신을 대상으로 할 것을 정하는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또 하나는 제장(祭場)의 문제로, 전몰처(戰歿處)를 포함한 무주시매처(無主尸埋處)가 여제 장소로 선택된다는 점이다. 전몰처가 여역과 가뭄 때에 여제의 장소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40년(인조 18)부터이다. 이후 전몰처가 점차 확대되어 1671년(현종 12)에 오면 민충단(愍忠壇), 험천, 쌍령, 금화, 강화, 진주, 남원, 금산, 달천, 상주, 원주,울산 등 13곳이 주요 제장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임란 또는 호란 때 우리 병사나 명나라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곳이다. 그리고 1671년과 1672년 대규모의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묻힌 교외의 무주시매처도 숙종 대부터는 기양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별려제는 정기제를 거행하던 여단보다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생겨난 전몰처나 무주시매처가 제장이 되었다.

『여제등록』은 명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제정하였던 형식적 여제가 조선 후기 전쟁과 재난을 겪으면서 토착적인 주요 제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여귀에 대한유교 이념과 국가의 구휼정책, 그리고 원혼에 대한 민간신앙적 모습이 결합하여 공동체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내용여제는 조선시대 국가 제사 중 하나로서 소사(小祀)에 속하였다. 정기적인 제향일은 청명일과 7월 15일, 10월 1일이며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거행하였다. 한성부와 지방 군현에서는 제향일 3일 전에 각 지역 성황신에게 발고제(發告祭)를 거행하고 제향일에 각 지역 여단에서 성황신과 여귀의 신위 15위를 모시고 제향을 지냈다.

여귀 15위는 특정한 사람이나 귀신이 아니라 칼에 맞아 죽은 자(遭兵刃死者), 수화나 도적을 만나 죽은자(遇水火盜賊者),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被人取財物逼死者),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被人强奪妻妾死者), 형화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遭刑禍負屈死者), 천재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因天災疾疫死者), 맹수와 독충에 해를 당해 죽은 자(爲猛獸毒蟲所害死者), 얼고 굶주려 죽은 자(凍餒死者), 전투에서 죽은 자(戰鬪死者), 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因危急自縊者), 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被牆屋壓死者), 난산으로 죽은 자(産難死者), 벼락 맞아 죽은 자(震死者), 추락하여 죽은 자(墜死者), 죽은 후 자식이 없는 자(歿而無後者)와 같이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제등록』은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여제를 제외하고 비정기적인 여제만을 대상으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크게 두 [가지](/topic/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전쟁이나 공무로 인해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이다. 이때의 제사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의 죽음을 위로하는 형식이었다. 이 책의첫 기사에 해당하는 정축년(1637) 8월 28일 기사는 병자호란의 주요 격[전지](/topic/전지)였던 쌍령과 마희천의 전몰자 치제에 관한 것이다. 무인년(1638) 5월 13일과 6월 20일의 기사는 각각 강화도에서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과 전망인(戰亡人)을 위한 제사 기록이다. 경진년(1640) 6월 22일과 병신년(1656) 9월 4일의 기사는 바다에서 파선으로 인해 [수장](/topic/수장)된 수군들을 위한 제사에 관한 기록이다. 이러한 위안제(慰安祭) 형식의 제향이 여제의 범주에 포함되어 기록된 것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은 사람이란 공통점 때문이다.

둘째는 전염병이나 가뭄을 물리치기 위한 제사이다. 무인년(1638) 7월 18일 기사는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번져 여제에 쓸 향ㆍ축ㆍ폐백과 약물을 내려보낼 것을 결정하는 내용이다.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중앙에서 향축을 내려보낼 것을 요청하는 지방 감사 또는 [예조](/topic/예조)의 계청과 그에 관한 논의들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렇게 기양을 위한 여제를 정기적인 제향과 구별하여 ‘별려제(別癘祭)’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제는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는 제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책의 기록으로 볼 때 가뭄 때에도 여제를 거행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것은 가뭄 역시 원혼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별려제에 관한 기사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상의 문제로, 초기 기록에서는 제사 대상이 모호하며 산천신도 제사 대상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등록에 등장하는 산천으로는 지리산, 금성산, 백양산, 연덕산, 공산 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1662년(현종 3)에 조정에서 여제의 대상에 관한 논의를 거쳐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에 실린 것과 같이 성황신과 무사귀신을 대상으로 할 것을 정하는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또 하나는 제장(祭場)의 문제로, 전몰처(戰歿處)를 포함한 무주시매처(無主尸埋處)가 여제 장소로 선택된다는 점이다. 전몰처가 여역과 가뭄 때에 여제의 장소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40년(인조 18)부터이다. 이후 전몰처가 점차 확대되어 1671년(현종 12)에 오면 민충단(愍忠壇), 험천, 쌍령, 금화, 강화, 진주, 남원, 금산, 달천, 상주, 원주,울산 등 13곳이 주요 제장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임란 또는 호란 때 우리 병사나 명나라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곳이다. 그리고 1671년과 1672년 대규모의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묻힌 교외의 무주시매처도 숙종 대부터는 기양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별려제는 정기제를 거행하던 여단보다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생겨난 전몰처나 무주시매처가 제장이 되었다.

『여제등록』은 명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제정하였던 형식적 여제가 조선 후기 전쟁과 재난을 겪으면서 토착적인 주요 제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여귀에 대한유교 이념과 국가의 구휼정책, 그리고 원혼에 대한 민간신앙적 모습이 결합하여 공동체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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