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주머니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석주머니
제석을 모시는 작은 자루형태의 쌀이 든 [주머니](/topic/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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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을 모시는 작은 자루형태의 쌀이 든 [주머니](/topic/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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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근
정의제석을 모시는 작은 자루형태의 쌀이 든 [주머니](/topic/주머니).
정의제석을 모시는 작은 자루형태의 쌀이 든 [주머니](/topic/주머니).
내용[안방](/topic/안방)이나 안방 관련 공간에 위치한다. 보통 안방의 출입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벽면의 모서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안방 [장롱](/topic/장롱)의 위쪽 벽에 나무못을 박아서 자루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자루 한가운데를 못에 걸어서 양쪽으로 늘어지도록 걸어두기도 한다. 간혹 집을 개량하여 안방과 고방, 안방과 상방을 터놓은 경우 고방 또는 상방을 뜻하는 ‘안방 웃방’에 걸기도 한다. [명다리](/topic/명다리)(명이 짧은 아이의 수명장수를 위해 [명주](/topic/명주) 또는 [무명](/topic/무명)헝겊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서 [실타래](/topic/실타래)와 함께 바치는 공물)를 접어 [한지](/topic/한지)로 네모나게 싼 다음 [마루](/topic/마루)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매달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보통 ‘지석’으로 발음되는 제석은 경기도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 강원, 충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주머니](/topic/주머니)형태로 나타난다. 주머니 외에도 항아리(단지)나 바[가지](/topic/가지)에 모신 경우가 있다. 이에 따라 제석주머니, 제석단지(제석항아리), 제석바가지로 명칭이 달라진다. 신체의 형태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뚜렷하다. 주머니는 경기도에서 주로 나타나며, 다른 지역은 제석단지나 바가지 형태가 더 많은 유형이다. 제석단지나 제석바가지가 놓이는 위치도 대개 안방 장롱 위나 [다락](/topic/다락)이다. 드물게 [부엌](/topic/부엌) 큰솥 옆인 경우도 있다. 작은 오지그릇을 가리키는 오가리 형태의 ‘지석오가리’를 모시는 전남 지역에서는 ‘마레’, 즉 [대청](/topic/대청)마루에 모신다. 마레가 없는 집은 안방 [시렁](/topic/시렁) 위에 모신다.

일반적으로 제석은 불교의 제석천과 같은 이름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세기 초에 이능화는 제석을 가택신으로서 주곡신(主穀神)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 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삼신적 성격으로 보고 있다. 민간에서 받아들이는 제석의 성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명과 자손을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된다. 자손의 건강과 출생을 관장한다는 믿음이 삼신과 겹쳐짐으로써 지역에 따라 삼신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성남지역의 경우 신의 명칭 자체가 삼신제석(삼신지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안성지역처럼 칠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칠성 역시 자손을 보살피는 신격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곳에서는 삼신, 제석, 칠성이 모두 자손을 점지하고 보살펴주는 점에서 공통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 존재가 서로 복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삼신이나 지석이나 한 가지’라고 보거나 제석과 칠성을 하나로 보는 경우가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삼신주머니와 제석주머니가 같은 형태로 나란하게 걸린 경우도 있다. 평택시 안중지역에서는 이를 ‘칠월칠석주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제석자루 안에 든 묵은쌀로 대개 칠월칠석날 미역국과 함께 밥을 해먹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보인다.

무속의 제석굿 등에서 나타나는 제석은 생산신이나 수복관장신이기도 하다. 가정신앙에서도 강원도, 충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 단지나 바가지형태의 제석은 [농업](/topic/농업)생산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전남 무안지역에서는 제석을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제석할망’은 곡식의 씨앗을 뿌리며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농경신이다. 경기도 양평지역에서는 항아리 신체로서 제석단지가 일반적이며, 제석이 터를 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단지에 여름에는 [보리](/topic/보리)쌀, 가을에는 햅쌀을 담아 놓아서 항아리가 비어있는 때가 없다.

그런가하면 충북 옥천지역에서는 무당의 굿을 통해 죽은 조상을 제석으로 모시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전처 또는 남편으로 제석이 조상과 복합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경북지역에서는 시준단지([세존단지](/topic/세존단지))가 있다. 역시 세존이 조상과 뒤섞여 받아들여진다. 전남지역에서는 [제석오가리](/topic/제석오가리)가 종손 집에만 있고 차자 이하의 아들 집에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신줏단지](/topic/신줏단지)와 함께 모셔지며 구체적인 어떤 조상은 아니지만 추상적인 조상 숭배의 한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신체의 형태나 모시는 위치와 상관없이 제석의 신체 안에는 가을에 처음 [수확](/topic/수확)해서 [방아](/topic/방아) 찧은 햅쌀을 넣어두며, 이듬해 여름에 그 쌀로 밥을 해먹거나 고사떡을 찌는데 사용한다. 제석 쌀로 지은 밥은 오직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도 주지 않는다. 새우젓 같은 비린 음식도 먹지 않는다. 제석에게 올리는 제물에는 술과 고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백설기나 흰밥, 청수나 미역국만 쓰는 등 신앙 내용에서는 모두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개 지석주머니, 가끔은 지석자루로 불리기도 하듯이 제석의 신체로서 주머니는 그리 크지 않다. 만드는 천의 크기로 규모를 표현하며, 자루 안에 들어가는 쌀의 양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이 말하는 주머니의 크기는 석 자 세 치이지만 보통 흰 무명천으로 가로 30㎝, 세로 40㎝ 정도이다. 소창을 한 마 세 치 길이로 끊어서 주머니를 만든 다음 쌀 다섯 홉 한 되를 넣는다는 경우도 있었다. 쌀의 양으로 표현하면 쌀 한 되 들어갈 정도 크기의 자루이다. 과거 쌀이 귀한 시절엔 석 되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었는데, 이는 쌀을 저축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제석주머니의 형태적 특징은 무명이나 [광목](/topic/광목) 주머니만 매단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 위에 한지로 [고깔](/topic/고깔)을 접어 씌워두었다는 점이다. 고깔 위에 실을 감아 놓기도 한다. 경기도 김포지역에서는 주머니 위에 고깔을 씌우지 않는 대신 명다리 또는 칠성이라고 하여 제석 위쪽에 소창 한 필을 끊어다가 한지로 싸서 못을 길게 박아두고 그 위에 얹어놓는 경우도 있다. 이를 지석과 칠성은 자손들의 명이 길고 편안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뜻으로 모신다고 한다. 수원지역의 제석주머니는 만드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무명천으로 된 주머니가 아니라 한지를 접어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중간을 접으면 주머니 2개가 생긴다. 이 주머니 안에 쌀을 넣어 안방 벽에 걸어둔다.

제석주머니에 대한 관리는 주머니 안에 든 쌀에 대한 것, 고깔에 대한 것, 주머니 자체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쌀은 보통 칠월 칠석에 꺼내서 밥을 지어 먹고 이후 빈 자루만 걸어두거나 깨끗이 빨아서 치웠다가 시월의 [상달고사](/topic/상달고사) 때 다시 쌀을 넣어서 걸어둔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서는 3년마다 굿을 하면서 쌀을 갈아주기도 한다. 이때 주머니도 깨끗하게 빤다. 2년에 한 번 갈아주기도 한다. 이때는 특히 홀수 해에만 갈아 넣는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쌀 주머니나 고깔을 접은 한지는 낡아서 보기 싫어지거나 때가 타서 검어지면 새것으로 갈아준다. 주머니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위에 덧씌운 한지고깔만 갈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주머니를 깨끗하게 빨아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는 매년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 때마다 고깔을 갈아 씌워야 하지만 신체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아주 더러워지지 않으면 그냥 두는 경우도 많다. 벗겨낸 고깔은 안[마당](/topic/마당)에서 불에 태운다. 잘 비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때도 축원을 드린다. 성남시 수정구의 한 주부는 “삼신할머니, 새 옷 입혀드리니 명 길고 복 많게 해 주십사.”하고 빈다. 이렇게 보면 대개의 [가신](/topic/가신) 신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제석주머니나 제석단지 등은 애초에 제석에게 바치는 공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것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신이 임재(臨在)하는 공간이 되고 종국에는 신성 자체로 전화(轉化)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의 가시적 현현(顯現)인 신체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집을 수리할 때는 제석을 떼어내 한편에 [백지](/topic/백지)를 깔고 잘 모셨다가 다시 그대로 달기도 한다. 집안에 상(喪)이 나면 제석주머니를 밖으로 내놓았다가 장사를 마치고 [자리걷이](/topic/자리걷이)를 하여 집안이 깨끗하게 되고 나면 며칠 후 깨끗한 날을 받아 다시 제자리에 모신다. 제석을 방 밖으로 내놓지 않을 경우 흰 천으로 씌워서 가려놓아야 한다. 집안에 상이 나면 부정하다고 하여 제석주머니를 깨끗한 백지로 덮어두었다가 장례를 마친 뒤에 걷어내는 것이다.

제석을 모시게 된 경위는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단골](/topic/단골) 만신을 두고 있는 집이나 다니는 절이 있는 집들은 이들 종교 직능자의 조언에 따른 경우가 많다. 나머지는 시어머니 때부터 물려받아 내력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개는 아이가 귀한 집에서 자손을 얻기 위해 모시게 된 경우이지만 무당이 제석굿을 하면서 자손 번창을 위해 제석주머니를 달아준 사례도 있다. 신체가 없어[지게](/topic/지게) 된 과정도 시어머니가 생전에 스스로 없앴거나 돌아가시고 난 뒤에 며느리가 없앴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기존의 신체들을 없애고 새로 만들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신체가 없어졌어도 집안 고사를 하면 그 자리를 생각하고 그 앞에 가장 먼저 시루를 가져다 둔다.

제석의 영험함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지역적으로 제석이 드물게 나타나는 곳에서 전해진다. 오산시의 한 사례에서는 절에 다니는 가정에서 자손이 귀해 제석주머니를 해놓으면 좋다고 하기에 모시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32세에 첫 아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만 아이가 죽자 제석주머니를 태워없앴다. 그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다시 제석주머니를 모셨으며, 실제로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 제석주머니는 아니지만 경기도 양평지역의 경우 터를 위한다고 하는 제석을 항아리 형태로 안방 시렁에 올려두었다가 [안채](/topic/안채)를 지으면서 없앴다. 그러나 그 후 [대주](/topic/대주)가 자꾸 몸이 아파서 다시 항아리를 사다가 제석단지를 모시고 있다. 이 집에서는 평시에도 꿈자리가 안 좋고 몸이 더 아프거나 하면 제석항아리에 [정화수](/topic/정화수) 한 사발과 밥 한 그릇을 해서 올려놓는다.

역시 주머니 형태의 제석은 아니지만 양주시 광적면에서 [분가](/topic/분가)하면서 제석바가지를 안방 다락에 모시고 있었다. [벌꿀](/topic/벌꿀)을 발견한 남편이 꺼내어 담을 적당한 그릇을 찾다가 다락에 있는 제석바가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담긴 쌀을 다른 곳에 쏟아내고 꿀을 받는데 썼다.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놀라 그 쌀로 밥을 한 다음 제석할머니 앞에 놓고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다행히 별다른 일이 없이 지내고 있다. 부인은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석바가지로 꿀을 받은 이후 서른이 넘도록 선만 보고 장가를 못든 막내아들이 혼인을 하게 된 것도 제석바가지에 꿀을 받아서 재수가 좋아진 것으로 생각했다.

제석을 위한 의례에서 공통적인 것은 가을에 주머니 안의 쌀을 햅쌀로 갈아 넣으며, 주머니 안에 있는 쌀은 이듬해 칠석 또는 백중날에 꺼내서 미역국과 함께 밥을 해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이 쌀로 한 밥은 오로지 식구끼리만 먹어야 한다. 밥을 해먹을 때는 그 밥과 물 한 그릇을 제석 앞에 차려놓는다. 그러나 꼭 칠석 즈음해서만 쌀을 꺼내 먹는 것은 아니다. 제석주머니나 항아리의 쌀은 비축분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집안에 쌀이 떨어지면 언제든 꺼내서 먹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에 장마가 지면 쌀이 못쓰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보다 먼저 꺼내서먹고 추수를 한 뒤에 햇곡으로 넣어두는 방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가을에 햇곡식이 나면 주머니 안의 쌀을 갈아주고 좋은 날을 잡아 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백설기를 제물로 한다. 집 고사 때 제석에게 올리는 제물은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백설기로 나타난다. 청수 한 그릇과 더불어 백설기를 올린다. 밥을 해먹을 때 비린 것을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사 때도 제석 앞에만은 비린 것을 올리지 않는다. 이는 삼신에 대한 제물차림과도 유사하다. 제석 쌀을 꺼내서 먹을 때도 이 쌀로 지은 밥과 정화수, 혹은 미역국 한 그릇을 함께 먼저 제석에게 올린 다음 먹는다.

경기도지역에서는 대개 주머니에서 쌀을 꺼내는 시기가 음력 칠월로 칠석날이나 백중날로 집중된다. 그러나 강원도 속초지역에서는 동짓달 텃고사를 지낼 때 제석단지의 쌀을 헐어서 쓴다. 남은 쌀은 이듬해 여름이 되어 쌀이 없을 때 꺼내서 먹는다. 양양지역의 경우는 부엌에 있는 큰 가마솥 옆에 제석단지를 둔다. 이 단지는 쌀 두어 말들이로 크다. 삼월삼짇날, 구월중구기도, 시월텃고사 때 이 단지의 쌀을 헐어서 쓴다. 강원 영서지역에는 ‘제석단지 모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잘 모신다는 뜻으로, 제석에 대한 신앙심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집에서 특별한 떡이나 고기 등을 먹을 때도 가장 먼저 제석단지 위에 올려놓았다가 먹는다. 이렇지 않고 그냥 먹으면 아이들에게 속탈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석단지는 주머니 형태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을 보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일부에서 과거 쌀이 귀한 시절에 제석주머니에 석 되 이상의 쌀을 보관할 수 있도록 주머니가 컸다는 내용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다만 집안의 고사 때 제석주머니의 쌀을 다른 가신에게 제물로 올리는 것은 경기도지역에서 찾기 어렵다. 이는 고사와 같은 제의 시기의 차이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경기 일부 지역에서도 집안 고사에 필요한 떡을 할 때 제석주머니의 쌀을 꺼내 이것을 보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쌀이 제석에게 올린 공물로 정결하기 때문에 가신들에 대한 제물로서 이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 (이능화, 1927)
[조선무속의 연구](/topic/조선무속의연구) (아키바 다카시, 1938)
제석님과 제석굿-전통제석신앙의 성격규명과 자료 (방창환ㆍ조흥윤, 문덕사, 1997)
용인지역의 [가신](/topic/가신)신앙-용인시 기흥읍을 중심으로 (민병근, 인문사회논총 제5호,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0)
가신신앙과 외래종교의 만남 (김명자, 민속문화의 전통과 외래문화, 실천민속학회, 2001)
한국 신령의 체계와 성격 (조흥윤, 한국종교문화론, 동문선, 2002)
한국의 가정신앙-경기도․충북․경북․제주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007)
내용[안방](/topic/안방)이나 안방 관련 공간에 위치한다. 보통 안방의 출입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벽면의 모서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안방 [장롱](/topic/장롱)의 위쪽 벽에 나무못을 박아서 자루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자루 한가운데를 못에 걸어서 양쪽으로 늘어지도록 걸어두기도 한다. 간혹 집을 개량하여 안방과 고방, 안방과 상방을 터놓은 경우 고방 또는 상방을 뜻하는 ‘안방 웃방’에 걸기도 한다. [명다리](/topic/명다리)(명이 짧은 아이의 수명장수를 위해 [명주](/topic/명주) 또는 [무명](/topic/무명)헝겊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서 [실타래](/topic/실타래)와 함께 바치는 공물)를 접어 [한지](/topic/한지)로 네모나게 싼 다음 [마루](/topic/마루)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매달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보통 ‘지석’으로 발음되는 제석은 경기도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 강원, 충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주머니](/topic/주머니)형태로 나타난다. 주머니 외에도 항아리(단지)나 바[가지](/topic/가지)에 모신 경우가 있다. 이에 따라 제석주머니, 제석단지(제석항아리), 제석바가지로 명칭이 달라진다. 신체의 형태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뚜렷하다. 주머니는 경기도에서 주로 나타나며, 다른 지역은 제석단지나 바가지 형태가 더 많은 유형이다. 제석단지나 제석바가지가 놓이는 위치도 대개 안방 장롱 위나 [다락](/topic/다락)이다. 드물게 [부엌](/topic/부엌) 큰솥 옆인 경우도 있다. 작은 오지그릇을 가리키는 오가리 형태의 ‘지석오가리’를 모시는 전남 지역에서는 ‘마레’, 즉 [대청](/topic/대청)마루에 모신다. 마레가 없는 집은 안방 [시렁](/topic/시렁) 위에 모신다.

일반적으로 제석은 불교의 제석천과 같은 이름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세기 초에 이능화는 제석을 가택신으로서 주곡신(主穀神)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 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삼신적 성격으로 보고 있다. 민간에서 받아들이는 제석의 성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명과 자손을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된다. 자손의 건강과 출생을 관장한다는 믿음이 삼신과 겹쳐짐으로써 지역에 따라 삼신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성남지역의 경우 신의 명칭 자체가 삼신제석(삼신지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안성지역처럼 칠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칠성 역시 자손을 보살피는 신격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곳에서는 삼신, 제석, 칠성이 모두 자손을 점지하고 보살펴주는 점에서 공통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 존재가 서로 복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삼신이나 지석이나 한 가지’라고 보거나 제석과 칠성을 하나로 보는 경우가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삼신주머니와 제석주머니가 같은 형태로 나란하게 걸린 경우도 있다. 평택시 안중지역에서는 이를 ‘칠월칠석주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제석자루 안에 든 묵은쌀로 대개 칠월칠석날 미역국과 함께 밥을 해먹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보인다.

무속의 제석굿 등에서 나타나는 제석은 생산신이나 수복관장신이기도 하다. 가정신앙에서도 강원도, 충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 단지나 바가지형태의 제석은 [농업](/topic/농업)생산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전남 무안지역에서는 제석을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제석할망’은 곡식의 씨앗을 뿌리며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농경신이다. 경기도 양평지역에서는 항아리 신체로서 제석단지가 일반적이며, 제석이 터를 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단지에 여름에는 [보리](/topic/보리)쌀, 가을에는 햅쌀을 담아 놓아서 항아리가 비어있는 때가 없다.

그런가하면 충북 옥천지역에서는 무당의 굿을 통해 죽은 조상을 제석으로 모시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전처 또는 남편으로 제석이 조상과 복합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경북지역에서는 시준단지([세존단지](/topic/세존단지))가 있다. 역시 세존이 조상과 뒤섞여 받아들여진다. 전남지역에서는 [제석오가리](/topic/제석오가리)가 종손 집에만 있고 차자 이하의 아들 집에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신줏단지](/topic/신줏단지)와 함께 모셔지며 구체적인 어떤 조상은 아니지만 추상적인 조상 숭배의 한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신체의 형태나 모시는 위치와 상관없이 제석의 신체 안에는 가을에 처음 [수확](/topic/수확)해서 [방아](/topic/방아) 찧은 햅쌀을 넣어두며, 이듬해 여름에 그 쌀로 밥을 해먹거나 고사떡을 찌는데 사용한다. 제석 쌀로 지은 밥은 오직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도 주지 않는다. 새우젓 같은 비린 음식도 먹지 않는다. 제석에게 올리는 제물에는 술과 고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백설기나 흰밥, 청수나 미역국만 쓰는 등 신앙 내용에서는 모두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개 지석주머니, 가끔은 지석자루로 불리기도 하듯이 제석의 신체로서 주머니는 그리 크지 않다. 만드는 천의 크기로 규모를 표현하며, 자루 안에 들어가는 쌀의 양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이 말하는 주머니의 크기는 석 자 세 치이지만 보통 흰 무명천으로 가로 30㎝, 세로 40㎝ 정도이다. 소창을 한 마 세 치 길이로 끊어서 주머니를 만든 다음 쌀 다섯 홉 한 되를 넣는다는 경우도 있었다. 쌀의 양으로 표현하면 쌀 한 되 들어갈 정도 크기의 자루이다. 과거 쌀이 귀한 시절엔 석 되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었는데, 이는 쌀을 저축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제석주머니의 형태적 특징은 무명이나 [광목](/topic/광목) 주머니만 매단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 위에 한지로 [고깔](/topic/고깔)을 접어 씌워두었다는 점이다. 고깔 위에 실을 감아 놓기도 한다. 경기도 김포지역에서는 주머니 위에 고깔을 씌우지 않는 대신 명다리 또는 칠성이라고 하여 제석 위쪽에 소창 한 필을 끊어다가 한지로 싸서 못을 길게 박아두고 그 위에 얹어놓는 경우도 있다. 이를 지석과 칠성은 자손들의 명이 길고 편안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뜻으로 모신다고 한다. 수원지역의 제석주머니는 만드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무명천으로 된 주머니가 아니라 한지를 접어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중간을 접으면 주머니 2개가 생긴다. 이 주머니 안에 쌀을 넣어 안방 벽에 걸어둔다.

제석주머니에 대한 관리는 주머니 안에 든 쌀에 대한 것, 고깔에 대한 것, 주머니 자체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쌀은 보통 칠월 칠석에 꺼내서 밥을 지어 먹고 이후 빈 자루만 걸어두거나 깨끗이 빨아서 치웠다가 시월의 [상달고사](/topic/상달고사) 때 다시 쌀을 넣어서 걸어둔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서는 3년마다 굿을 하면서 쌀을 갈아주기도 한다. 이때 주머니도 깨끗하게 빤다. 2년에 한 번 갈아주기도 한다. 이때는 특히 홀수 해에만 갈아 넣는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쌀 주머니나 고깔을 접은 한지는 낡아서 보기 싫어지거나 때가 타서 검어지면 새것으로 갈아준다. 주머니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위에 덧씌운 한지고깔만 갈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주머니를 깨끗하게 빨아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는 매년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 때마다 고깔을 갈아 씌워야 하지만 신체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아주 더러워지지 않으면 그냥 두는 경우도 많다. 벗겨낸 고깔은 안[마당](/topic/마당)에서 불에 태운다. 잘 비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때도 축원을 드린다. 성남시 수정구의 한 주부는 “삼신할머니, 새 옷 입혀드리니 명 길고 복 많게 해 주십사.”하고 빈다. 이렇게 보면 대개의 [가신](/topic/가신) 신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제석주머니나 제석단지 등은 애초에 제석에게 바치는 공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것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신이 임재(臨在)하는 공간이 되고 종국에는 신성 자체로 전화(轉化)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의 가시적 현현(顯現)인 신체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집을 수리할 때는 제석을 떼어내 한편에 [백지](/topic/백지)를 깔고 잘 모셨다가 다시 그대로 달기도 한다. 집안에 상(喪)이 나면 제석주머니를 밖으로 내놓았다가 장사를 마치고 [자리걷이](/topic/자리걷이)를 하여 집안이 깨끗하게 되고 나면 며칠 후 깨끗한 날을 받아 다시 제자리에 모신다. 제석을 방 밖으로 내놓지 않을 경우 흰 천으로 씌워서 가려놓아야 한다. 집안에 상이 나면 부정하다고 하여 제석주머니를 깨끗한 백지로 덮어두었다가 장례를 마친 뒤에 걷어내는 것이다.

제석을 모시게 된 경위는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단골](/topic/단골) 만신을 두고 있는 집이나 다니는 절이 있는 집들은 이들 종교 직능자의 조언에 따른 경우가 많다. 나머지는 시어머니 때부터 물려받아 내력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개는 아이가 귀한 집에서 자손을 얻기 위해 모시게 된 경우이지만 무당이 제석굿을 하면서 자손 번창을 위해 제석주머니를 달아준 사례도 있다. 신체가 없어[지게](/topic/지게) 된 과정도 시어머니가 생전에 스스로 없앴거나 돌아가시고 난 뒤에 며느리가 없앴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기존의 신체들을 없애고 새로 만들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신체가 없어졌어도 집안 고사를 하면 그 자리를 생각하고 그 앞에 가장 먼저 시루를 가져다 둔다.

제석의 영험함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지역적으로 제석이 드물게 나타나는 곳에서 전해진다. 오산시의 한 사례에서는 절에 다니는 가정에서 자손이 귀해 제석주머니를 해놓으면 좋다고 하기에 모시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32세에 첫 아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만 아이가 죽자 제석주머니를 태워없앴다. 그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다시 제석주머니를 모셨으며, 실제로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 제석주머니는 아니지만 경기도 양평지역의 경우 터를 위한다고 하는 제석을 항아리 형태로 안방 시렁에 올려두었다가 [안채](/topic/안채)를 지으면서 없앴다. 그러나 그 후 [대주](/topic/대주)가 자꾸 몸이 아파서 다시 항아리를 사다가 제석단지를 모시고 있다. 이 집에서는 평시에도 꿈자리가 안 좋고 몸이 더 아프거나 하면 제석항아리에 [정화수](/topic/정화수) 한 사발과 밥 한 그릇을 해서 올려놓는다.

역시 주머니 형태의 제석은 아니지만 양주시 광적면에서 [분가](/topic/분가)하면서 제석바가지를 안방 다락에 모시고 있었다. [벌꿀](/topic/벌꿀)을 발견한 남편이 꺼내어 담을 적당한 그릇을 찾다가 다락에 있는 제석바가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담긴 쌀을 다른 곳에 쏟아내고 꿀을 받는데 썼다.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놀라 그 쌀로 밥을 한 다음 제석할머니 앞에 놓고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다행히 별다른 일이 없이 지내고 있다. 부인은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석바가지로 꿀을 받은 이후 서른이 넘도록 선만 보고 장가를 못든 막내아들이 혼인을 하게 된 것도 제석바가지에 꿀을 받아서 재수가 좋아진 것으로 생각했다.

제석을 위한 의례에서 공통적인 것은 가을에 주머니 안의 쌀을 햅쌀로 갈아 넣으며, 주머니 안에 있는 쌀은 이듬해 칠석 또는 백중날에 꺼내서 미역국과 함께 밥을 해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이 쌀로 한 밥은 오로지 식구끼리만 먹어야 한다. 밥을 해먹을 때는 그 밥과 물 한 그릇을 제석 앞에 차려놓는다. 그러나 꼭 칠석 즈음해서만 쌀을 꺼내 먹는 것은 아니다. 제석주머니나 항아리의 쌀은 비축분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집안에 쌀이 떨어지면 언제든 꺼내서 먹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에 장마가 지면 쌀이 못쓰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보다 먼저 꺼내서먹고 추수를 한 뒤에 햇곡으로 넣어두는 방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가을에 햇곡식이 나면 주머니 안의 쌀을 갈아주고 좋은 날을 잡아 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백설기를 제물로 한다. 집 고사 때 제석에게 올리는 제물은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백설기로 나타난다. 청수 한 그릇과 더불어 백설기를 올린다. 밥을 해먹을 때 비린 것을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사 때도 제석 앞에만은 비린 것을 올리지 않는다. 이는 삼신에 대한 제물차림과도 유사하다. 제석 쌀을 꺼내서 먹을 때도 이 쌀로 지은 밥과 정화수, 혹은 미역국 한 그릇을 함께 먼저 제석에게 올린 다음 먹는다.

경기도지역에서는 대개 주머니에서 쌀을 꺼내는 시기가 음력 칠월로 칠석날이나 백중날로 집중된다. 그러나 강원도 속초지역에서는 동짓달 텃고사를 지낼 때 제석단지의 쌀을 헐어서 쓴다. 남은 쌀은 이듬해 여름이 되어 쌀이 없을 때 꺼내서 먹는다. 양양지역의 경우는 부엌에 있는 큰 가마솥 옆에 제석단지를 둔다. 이 단지는 쌀 두어 말들이로 크다. 삼월삼짇날, 구월중구기도, 시월텃고사 때 이 단지의 쌀을 헐어서 쓴다. 강원 영서지역에는 ‘제석단지 모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잘 모신다는 뜻으로, 제석에 대한 신앙심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집에서 특별한 떡이나 고기 등을 먹을 때도 가장 먼저 제석단지 위에 올려놓았다가 먹는다. 이렇지 않고 그냥 먹으면 아이들에게 속탈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석단지는 주머니 형태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을 보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일부에서 과거 쌀이 귀한 시절에 제석주머니에 석 되 이상의 쌀을 보관할 수 있도록 주머니가 컸다는 내용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다만 집안의 고사 때 제석주머니의 쌀을 다른 가신에게 제물로 올리는 것은 경기도지역에서 찾기 어렵다. 이는 고사와 같은 제의 시기의 차이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경기 일부 지역에서도 집안 고사에 필요한 떡을 할 때 제석주머니의 쌀을 꺼내 이것을 보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쌀이 제석에게 올린 공물로 정결하기 때문에 가신들에 대한 제물로서 이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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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국악당경기판소리의 정착과 형성집단김헌선2005
해남군 북평면 남창마을 표순덕댁 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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