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두악산소금무지제·기우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북 단양군 단성면 두악산 정상에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어 [마을](/topic/마을)의 화재예방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에서 지내는 기우제.
definition
충북 단양군 단성면 두악산 정상에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어 [마을](/topic/마을)의 화재예방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에서 지내는 기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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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특징소금무지제는 본래 화재를 막을 목적으로 형성된 예방 제의였다가 여기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추가되어 마을 제의로 정착한 형태적 특징을 보인다. 제물을 차릴 때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육류는 사용하지 않는다.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본래의 목적이 있었으나 마을 제의와 결합하여 마을제의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명칭은 기우제이지만 [농한기](/topic/농한기)에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기곡제](/topic/기곡제)(祈穀祭)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희생물은 돼지이다. 그리고 제사 때 [헌관](/topic/헌관)으로 단양군수와 부군수, 단성면장 등이 참가하는 것으로 보아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 제의라기보다 고을을 범위로 하는 고을제의 형태와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금무지제의 제단은 두악산의 정상에 있으며, 주변을 낮은 [담장](/topic/담장)으로 두르고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가 묻힌 곳에 잡석을 제단 형식으로 쌓은 형태이다. 기우제의 마당바위는 강 한가운데에있는 평편한 넓은 바위를 말하며, 그 위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특징소금무지제는 본래 화재를 막을 목적으로 형성된 예방 제의였다가 여기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추가되어 마을 제의로 정착한 형태적 특징을 보인다. 제물을 차릴 때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육류는 사용하지 않는다.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본래의 목적이 있었으나 마을 제의와 결합하여 마을제의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명칭은 기우제이지만 [농한기](/topic/농한기)에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기곡제](/topic/기곡제)(祈穀祭)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희생물은 돼지이다. 그리고 제사 때 [헌관](/topic/헌관)으로 단양군수와 부군수, 단성면장 등이 참가하는 것으로 보아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 제의라기보다 고을을 범위로 하는 고을제의 형태와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금무지제의 제단은 두악산의 정상에 있으며, 주변을 낮은 [담장](/topic/담장)으로 두르고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가 묻힌 곳에 잡석을 제단 형식으로 쌓은 형태이다. 기우제의 마당바위는 강 한가운데에있는 평편한 넓은 바위를 말하며, 그 위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정의충북 단양군 단성면 두악산 정상에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어 [마을](/topic/마을)의 화재예방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에서 지내는 기우제.
정의충북 단양군 단성면 두악산 정상에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어 [마을](/topic/마을)의 화재예방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에서 지내는 기우제.
내용두악산소금무지제를 지내는 시기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아침이다. 산에 올라가는 시간 등을 고려하여 약간씩 시간을 달리한다. 2004년에는 오전 11시 20분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제삿날 아침 8시부터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미리 준비한 제물과 소금, 한강수를 회원들이 나누어서 배낭에 넣어 메고 올라간다. 한강수는 병 전체를 [한지](/topic/한지)로 밀봉하고, ‘성수(誠水)’라고 표기해서 신성시한다. 두악산은 해발 732m이기 때문에 정상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제사에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30~40명이 참가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먼저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가 묻힌 주변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청소를 깨끗이 하여 제사 장소로서의 신성성을 확보한다. 제단은 소금단지가 묻힌 곳을 다른 곳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 돌을 쌓아 구분하였다. 제물은 이 단 위에 한지를 깔고 차린다. 그 아래에는 [제관](/topic/제관)들이 의례를 행할 수 있도록 돗[자리](/topic/자리)를 깐다. 제물을 차리는 동안 [헌관](/topic/헌관)들은 준비한 [한복](/topic/한복)으로 갈아입고 갓을 쓴다. 헌관은 삼헌관이다. [초헌](/topic/초헌)관은 단양군수 또는 단성면장, [아헌](/topic/아헌)관은 단성향토문화연구회장, [종헌](/topic/종헌)관은 단성의용소방대장 등이며, 그해 상황에 따라 약간의변동이 있다.

제물로는 육류를 사용하지 않고 과일과 포만 차린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 정상까지 운반하는 문제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제기 역시 일회용을 사용하지만 [향로](/topic/향로)와 일부 제기들은 제단에 설치된 소형 스테인리스 캐비닛에 시건장치를 하여 보관한다. [제상](/topic/제상) 차림은 다음과 같다.

![[마을](/topic/마을)신앙 단양두악산소금무지제기우제 1](/upload/img/20170106/20170106125318_t_.jpg)

준비가 되면 헌관들이 제단으로 올라가 가져온 소금을 세 개의 항아리에 모두 붓고 나머지는 주변에 뿌린다. 그리고 준비해 간 한강수를 좌우의 항아리에 가득 붓고, 중앙의 항아리에는 물은 붓지 않고 동전을 넣는다. 이때는 함께한 사람, 심지어는 등산객들까지도 동전을 넣는다. 동전 넣기를 마치면 항아리의 뚜껑을 닫고 제사를 진행한다.

초헌관이 제단 앞으로 나아가 강신(降神)을 한다. 강신은 [분향](/topic/분향)을 하고 나서 잔을 올리는 것이다. 이어 제관과 참가자 모두 재배한다. 이를 [참신](/topic/참신)(參神)이라고 한다. 참신을 하고난 뒤 초헌관이 초헌(初獻)을 한다. 초헌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고 꿇어앉으면 [축문](/topic/축문)을 읽는 것이다. 2004년에 행한 소금무지제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내용은 화재를 막아 주고, 나라가 발전하고, 단양군민 모두가 평안하고 평화로우며 무병장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내용이다. 축문에서 보듯이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군[민전](/topic/민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을 제의 범위로 볼 수 있다. [독축](/topic/독축)을 마치면 초헌관이 재배하고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초헌을 마치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행한다. 방법은 잔을 올리고 재배하는 형식이다. 이 절차가 초헌과 다른 점은 독축이 없다는 것이다. 종헌을 마치면 헌관과 참가자 모두 재배를 한다. 사신(辭神)이다. 사신을 마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의 대상은 단양군민 일동, 단양군수, 부군수, 경찰서장, 문화원장, 의회의원, 단성면장, 단성의용소방대장,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일동을 비롯해 남한강석부작, 승일산업(주), 단성부역장, 영진세차장, 단양군청, 동아광고, 단양방앗간, 정도개발 등 중요한 기관과 산업체 등으로 마을 주민 개인보다 단양군민 전체의 소지라고 할 수 있다.

소지에 이어 참가자들이 잔을 올릴 수 있도록 한다. 등산객이나 참가자들 중 잔을 올리기 원하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잔을 올리고 소원을 빈다. 이 부분이 유교식 제사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금무지제를 주관하는 단성향토사연구회에서는 원래 홀기를 만들어 정식으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유림들이 민간신앙적인 제사에 유교식 예법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여 홀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의 헌작을 마치면 [음복](/topic/음복)하고, 제사를 모두 마치면 내려온다.

한편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는 소금무지제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복도소 위쪽 선유동에 있는 마당바위로 가서 지낸다. 기우제는 부정기적 제사로,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때 시행했다. 국왕이 직접 지내거나 지방관, 민간의 백성들도 시행하였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는 1760년 이후 단양에서 지방관이 주재한 기우제가 세 번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체적인 장소 등은 나타나지 않으나 1760년 6월 5일에 사직단에서 올렸으며, 마당바위기우제는 기록이 없다. 1845년 6월 3일 기록에는 기우제를 지낸 뒤 곧바로 비가 많이 내려 흡족하다고 되어 있다. 현지조사에서도 기우제를 지낸 해에 오히려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서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의 경우도 우연인지모르지만 기우제를 지낼 때는 날씨가 매우 화창했으나 제사가 끝난 이후인 저녁부터 단양 지방에 눈이 내리기도 했다.

또한 『각사등록』에는 가뭄보다 수해 기사가 더 많다. 1738년 이후 수해 관련 기사는 총 22건이다. 그러나 중부지역의 평균 강우량은 1,100~1,400㎜(1971~2000년 조사 평균값)였으나 단양지역의 경우1,106㎜(1995~2001년 조사 평균값)로 평균치에 밑도는 강수량이지만 수해 발생은 여름 집중 강우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마당바위는 강 한가운데에 있는, 1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평편한 바위이며, 기우제의 제장이다. 기우제 지낼 시간이 다가오면 마당바위 근처에서 단성농악대 회원들이 풍물을 친다. 참가자들은 먼저 금줄을 마당바위 주변에 설치한다. 그리고 헌관 이하 일동은 갓과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제복](/topic/제복)으로 갖추어 입는다. 이후 진설을 행한다. [진설도](/topic/진설도)는 아래와 같다.

![마을신앙 단양두악산소금무지제기우제](/upload/img/20170106/20170106125338_t_.jpg)

제물은 소금무지제와 달리 포와 과일뿐만 아니라 희생으로 통돼지를 올리고, 팥시루떡과 백설기를 차린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지만 소금무지제는 화재 예방의 의미가 강하고 산의 정상에서 지내기 때문에 제물이 간략한 것으로 보인다.

헌관은 역시 삼헌관으로 구성되고, 단양부군수·단양군의원 등이 맡는다. 이 역시 마을제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초헌관이 헌작을 하면 다음과 같은 축문을 읽는다.



내용은 용왕에게 춘하추동 음양이 조절되어 비가 오고 바람이 잘 조절되고, [오곡](/topic/오곡)이 풍년이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독축을 마친 초헌관이 재배하고 물러나면 아헌과 종헌이 이어진다. 종헌을 마치면 참가자 일동이 사신재배를 하여 제사를 마친다. 이어 헌관들이 음복한 뒤에 [농악](/topic/농악)대원들이 개인 축원으로 잔을 올리고 나서 농악을 한판 울린 다음 마친다. 이로써 소금무지제와 기우제는 끝난다. 소금무지제와는 달리 기우제에서는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 이는 두 제사를 하나로 통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참여자들은 면 소재지로 돌아와서 면 소재지 주민들을 위한 잔치를 벌인다. 제물로 올린 돼지고기를 굽고 윷판과 함께 한판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제사 전 과정을 모두 마친다.

제사와 관련한 금기, 또는 [영험담](/topic/영험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제사가 거행되기 전날에는 부인과 합방을 금하고, 더러운 것을 보지 않는 등 금기 사항을 지켜야 한다. 소금무지제를 지내고 내려올 때는 절대로 뒤를 보지 말고 내려와야 부정을 타지 않는다. 소금무지제를 잘못 지낸 경우에는 일명 “산이 운다”라고 하여 군수가 전보(轉補)되거나 유배되며,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가끔 항아리가 깨져 물이 없어지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는 타종교인들의 종교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으로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은 인식하고 있다. 이에 대비하여 제단 가까운 곳에 예비 항아리를 묻어 놓았다고 한다.
내용두악산소금무지제를 지내는 시기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아침이다. 산에 올라가는 시간 등을 고려하여 약간씩 시간을 달리한다. 2004년에는 오전 11시 20분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제삿날 아침 8시부터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미리 준비한 제물과 소금, 한강수를 회원들이 나누어서 배낭에 넣어 메고 올라간다. 한강수는 병 전체를 [한지](/topic/한지)로 밀봉하고, ‘성수(誠水)’라고 표기해서 신성시한다. 두악산은 해발 732m이기 때문에 정상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제사에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30~40명이 참가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먼저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가 묻힌 주변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청소를 깨끗이 하여 제사 장소로서의 신성성을 확보한다. 제단은 소금단지가 묻힌 곳을 다른 곳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 돌을 쌓아 구분하였다. 제물은 이 단 위에 한지를 깔고 차린다. 그 아래에는 [제관](/topic/제관)들이 의례를 행할 수 있도록 돗[자리](/topic/자리)를 깐다. 제물을 차리는 동안 [헌관](/topic/헌관)들은 준비한 [한복](/topic/한복)으로 갈아입고 갓을 쓴다. 헌관은 삼헌관이다. [초헌](/topic/초헌)관은 단양군수 또는 단성면장, [아헌](/topic/아헌)관은 단성향토문화연구회장, [종헌](/topic/종헌)관은 단성의용소방대장 등이며, 그해 상황에 따라 약간의변동이 있다.

제물로는 육류를 사용하지 않고 과일과 포만 차린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 정상까지 운반하는 문제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제기 역시 일회용을 사용하지만 [향로](/topic/향로)와 일부 제기들은 제단에 설치된 소형 스테인리스 캐비닛에 시건장치를 하여 보관한다. [제상](/topic/제상) 차림은 다음과 같다.

![[마을](/topic/마을)신앙 단양두악산소금무지제기우제 1](/upload/img/20170106/20170106125318_t_.jpg)

준비가 되면 헌관들이 제단으로 올라가 가져온 소금을 세 개의 항아리에 모두 붓고 나머지는 주변에 뿌린다. 그리고 준비해 간 한강수를 좌우의 항아리에 가득 붓고, 중앙의 항아리에는 물은 붓지 않고 동전을 넣는다. 이때는 함께한 사람, 심지어는 등산객들까지도 동전을 넣는다. 동전 넣기를 마치면 항아리의 뚜껑을 닫고 제사를 진행한다.

초헌관이 제단 앞으로 나아가 강신(降神)을 한다. 강신은 [분향](/topic/분향)을 하고 나서 잔을 올리는 것이다. 이어 제관과 참가자 모두 재배한다. 이를 [참신](/topic/참신)(參神)이라고 한다. 참신을 하고난 뒤 초헌관이 초헌(初獻)을 한다. 초헌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고 꿇어앉으면 [축문](/topic/축문)을 읽는 것이다. 2004년에 행한 소금무지제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내용은 화재를 막아 주고, 나라가 발전하고, 단양군민 모두가 평안하고 평화로우며 무병장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내용이다. 축문에서 보듯이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군[민전](/topic/민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을 제의 범위로 볼 수 있다. [독축](/topic/독축)을 마치면 초헌관이 재배하고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초헌을 마치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행한다. 방법은 잔을 올리고 재배하는 형식이다. 이 절차가 초헌과 다른 점은 독축이 없다는 것이다. 종헌을 마치면 헌관과 참가자 모두 재배를 한다. 사신(辭神)이다. 사신을 마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의 대상은 단양군민 일동, 단양군수, 부군수, 경찰서장, 문화원장, 의회의원, 단성면장, 단성의용소방대장,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일동을 비롯해 남한강석부작, 승일산업(주), 단성부역장, 영진세차장, 단양군청, 동아광고, 단양방앗간, 정도개발 등 중요한 기관과 산업체 등으로 마을 주민 개인보다 단양군민 전체의 소지라고 할 수 있다.

소지에 이어 참가자들이 잔을 올릴 수 있도록 한다. 등산객이나 참가자들 중 잔을 올리기 원하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잔을 올리고 소원을 빈다. 이 부분이 유교식 제사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금무지제를 주관하는 단성향토사연구회에서는 원래 홀기를 만들어 정식으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유림들이 민간신앙적인 제사에 유교식 예법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여 홀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의 헌작을 마치면 [음복](/topic/음복)하고, 제사를 모두 마치면 내려온다.

한편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는 소금무지제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복도소 위쪽 선유동에 있는 마당바위로 가서 지낸다. 기우제는 부정기적 제사로,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때 시행했다. 국왕이 직접 지내거나 지방관, 민간의 백성들도 시행하였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는 1760년 이후 단양에서 지방관이 주재한 기우제가 세 번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체적인 장소 등은 나타나지 않으나 1760년 6월 5일에 사직단에서 올렸으며, 마당바위기우제는 기록이 없다. 1845년 6월 3일 기록에는 기우제를 지낸 뒤 곧바로 비가 많이 내려 흡족하다고 되어 있다. 현지조사에서도 기우제를 지낸 해에 오히려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서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의 경우도 우연인지모르지만 기우제를 지낼 때는 날씨가 매우 화창했으나 제사가 끝난 이후인 저녁부터 단양 지방에 눈이 내리기도 했다.

또한 『각사등록』에는 가뭄보다 수해 기사가 더 많다. 1738년 이후 수해 관련 기사는 총 22건이다. 그러나 중부지역의 평균 강우량은 1,100~1,400㎜(1971~2000년 조사 평균값)였으나 단양지역의 경우1,106㎜(1995~2001년 조사 평균값)로 평균치에 밑도는 강수량이지만 수해 발생은 여름 집중 강우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마당바위는 강 한가운데에 있는, 1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평편한 바위이며, 기우제의 제장이다. 기우제 지낼 시간이 다가오면 마당바위 근처에서 단성농악대 회원들이 풍물을 친다. 참가자들은 먼저 금줄을 마당바위 주변에 설치한다. 그리고 헌관 이하 일동은 갓과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제복](/topic/제복)으로 갖추어 입는다. 이후 진설을 행한다. [진설도](/topic/진설도)는 아래와 같다.

![마을신앙 단양두악산소금무지제기우제](/upload/img/20170106/20170106125338_t_.jpg)

제물은 소금무지제와 달리 포와 과일뿐만 아니라 희생으로 통돼지를 올리고, 팥시루떡과 백설기를 차린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지만 소금무지제는 화재 예방의 의미가 강하고 산의 정상에서 지내기 때문에 제물이 간략한 것으로 보인다.

헌관은 역시 삼헌관으로 구성되고, 단양부군수·단양군의원 등이 맡는다. 이 역시 마을제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초헌관이 헌작을 하면 다음과 같은 축문을 읽는다.



내용은 용왕에게 춘하추동 음양이 조절되어 비가 오고 바람이 잘 조절되고, [오곡](/topic/오곡)이 풍년이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독축을 마친 초헌관이 재배하고 물러나면 아헌과 종헌이 이어진다. 종헌을 마치면 참가자 일동이 사신재배를 하여 제사를 마친다. 이어 헌관들이 음복한 뒤에 [농악](/topic/농악)대원들이 개인 축원으로 잔을 올리고 나서 농악을 한판 울린 다음 마친다. 이로써 소금무지제와 기우제는 끝난다. 소금무지제와는 달리 기우제에서는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 이는 두 제사를 하나로 통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참여자들은 면 소재지로 돌아와서 면 소재지 주민들을 위한 잔치를 벌인다. 제물로 올린 돼지고기를 굽고 윷판과 함께 한판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제사 전 과정을 모두 마친다.

제사와 관련한 금기, 또는 [영험담](/topic/영험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제사가 거행되기 전날에는 부인과 합방을 금하고, 더러운 것을 보지 않는 등 금기 사항을 지켜야 한다. 소금무지제를 지내고 내려올 때는 절대로 뒤를 보지 말고 내려와야 부정을 타지 않는다. 소금무지제를 잘못 지낸 경우에는 일명 “산이 운다”라고 하여 군수가 전보(轉補)되거나 유배되며,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가끔 항아리가 깨져 물이 없어지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는 타종교인들의 종교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으로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은 인식하고 있다. 이에 대비하여 제단 가까운 곳에 예비 항아리를 묻어 놓았다고 한다.
역사두악산 소금무지제와 기우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1955년에 소금무지제에 대한 구전이 기록화되었고, 같은 해에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에 대한 구전도 기록화되어 전하고 있다. 1970년대에 산 정상까지 [가지](/topic/가지) 않고 중간 단에서 [마을](/topic/마을) 제사처럼 제의를 지내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서 황급히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때 제의는 1970년대까지 자연스럽게 전승되다가 어느 순간 단절되었다. 단성면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단성향토문화연구회’를 결성해 단성면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던 중 구전으로 전해 오는 두악산소금무지제와 마당바위기우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우제는 원래 부정기적으로 지내던 것이지만 편의상 전통으로 계승하기위해 소금무지제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역사두악산 소금무지제와 기우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1955년에 소금무지제에 대한 구전이 기록화되었고, 같은 해에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에 대한 구전도 기록화되어 전하고 있다. 1970년대에 산 정상까지 [가지](/topic/가지) 않고 중간 단에서 [마을](/topic/마을) 제사처럼 제의를 지내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서 황급히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때 제의는 1970년대까지 자연스럽게 전승되다가 어느 순간 단절되었다. 단성면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단성향토문화연구회’를 결성해 단성면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던 중 구전으로 전해 오는 두악산소금무지제와 마당바위기우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우제는 원래 부정기적으로 지내던 것이지만 편의상 전통으로 계승하기위해 소금무지제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지역사례소금물과 강물이 화재를 예방하는 목적의 제의에 이용되는 사례는 전국적으로 발견된다. 이와 함께 ‘소금무지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곳도 있지만 ‘간물단지’ 등으로 이르는 곳도 있다. 전국적으로 치밀하게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합천 [해인사](/topic/해인사) 매화산의 간물단지, 청도군 [운문사](/topic/운문사)의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 정선군 여량면 염장봉의 소금단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구왕산의 소금단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석우리의 소금단지, 경북 영덕군의 간물단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추목리의 간물단지 등이 있다. 또한 전남 순천시 주암면 구산리에서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공동제사인 용수제 역시 이와 동일한 것으로 ‘물보기굿’, ‘물보기 용수제’, ‘화신제(火神祭)’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화재를 막고 주민들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로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북 지역과 충남 예산군 지역의 소금을 뿌려 화재를 예방하는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역시 소금으로 화재를 예방하는 사례들이다.
지역사례소금물과 강물이 화재를 예방하는 목적의 제의에 이용되는 사례는 전국적으로 발견된다. 이와 함께 ‘소금무지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곳도 있지만 ‘간물단지’ 등으로 이르는 곳도 있다. 전국적으로 치밀하게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합천 [해인사](/topic/해인사) 매화산의 간물단지, 청도군 [운문사](/topic/운문사)의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 정선군 여량면 염장봉의 소금단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구왕산의 소금단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석우리의 소금단지, 경북 영덕군의 간물단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추목리의 간물단지 등이 있다. 또한 전남 순천시 주암면 구산리에서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공동제사인 용수제 역시 이와 동일한 것으로 ‘물보기굿’, ‘물보기 용수제’, ‘화신제(火神祭)’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화재를 막고 주민들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로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북 지역과 충남 예산군 지역의 소금을 뿌려 화재를 예방하는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역시 소금으로 화재를 예방하는 사례들이다.
의의충주댐 건설로 신단양이 생기면서 원래 단양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전통은 사라지고 단양이라는 지명마저 단성으로 바뀌게 된다. 옛 단양의 핵심인 단성면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단양의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발굴하고 있다. 두악산소금무지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1970년대 이후에 사라진 단양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중 하나였다. 성격이 다른 두 제사를 현재 상황에 맞게 하나로 통합하여 행하는 것은 문화재생운동 또는 문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단양팔경 (김상현,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 1956)
各司謄錄, 간물단지신앙의 용신신앙적 성격 (김명자, 월산임동권박사 송수기념논문집 민속학편, 집문당, 1986)
소금신앙 (최덕원, 월산임동권박사 송수기념논문집 민속학편, 집문당, 1986)
단양군지 (단양군, 1990)
조선시대 단양의 이모저모 (윤수경 편, 단양향토문화연구회, 1997)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 (전라남도, 1998)
조선시대 단양의 역사와 문화 (윤수경 편, 단양문화원, 1998)
순천시의 문화유적 2 (순천대학교박물관·순천시, 2000)
전라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
민속박물관사람들의 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의의충주댐 건설로 신단양이 생기면서 원래 단양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전통은 사라지고 단양이라는 지명마저 단성으로 바뀌게 된다. 옛 단양의 핵심인 단성면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단양의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발굴하고 있다. 두악산소금무지제와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1970년대 이후에 사라진 단양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중 하나였다. 성격이 다른 두 제사를 현재 상황에 맞게 하나로 통합하여 행하는 것은 문화재생운동 또는 문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단양팔경 (김상현,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 1956)
各司謄錄, 간물단지신앙의 용신신앙적 성격 (김명자, 월산임동권박사 송수기념논문집 민속학편, 집문당, 1986)
소금신앙 (최덕원, 월산임동권박사 송수기념논문집 민속학편, 집문당, 1986)
단양군지 (단양군, 1990)
조선시대 단양의 이모저모 (윤수경 편, 단양향토문화연구회, 1997)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 (전라남도, 1998)
조선시대 단양의 역사와 문화 (윤수경 편, 단양문화원, 1998)
순천시의 문화유적 2 (순천대학교박물관·순천시, 2000)
전라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
민속박물관사람들의 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유래기록상 단양의 소금무지제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지진과 폭우 피해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소금무지제의 유래는 단양의 ‘단(丹, 뜨거울 단)’과 ‘양(陽, 볕 양)’에서 찾을 수 있다. 구전에 따르면 단양(현 단성면 소재지) 남쪽의 산이 두악산이며, 이를 ‘소금무지산’ 또는 ‘남산’이라고 한다.

현 단양중학교 자리는 주택가였다. 어느 날 이곳은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을‘잿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형 화재에 대하여 도술가는 단양이라는 글자가 모두 불[火]을 나타내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하다. 읍내 중앙에 연못을 파고 두악산 정상에 소금을 넣은 항아리를 묻으면 화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마을](/topic/마을) 중앙에 연못을 파고 산 정상에 세 개의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으면서 가운데 항아리에는 소금, 좌우 항아리에는 한강물을 넣었더니 화재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소금과 한강물을 넣고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매년 정월이면 기자치성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의 연못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고 소금무지제만 마을의 제사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760년 이후 단양에서 기우제가 세 차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이한 것은 단양 지역에서는 폭우 피해가많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구전에 따르면 단양천의 상류인 복도소(復道沼) 위쪽 선유동(仙遊洞)에는 넓은 바위가 있다. 이곳은 두악산의 약수가 흘러 놀이하기가 좋다고 한다.그리고 가뭄 피해가 있는 경우 반드시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는 두악산의 영험함과 마당바위가 있는 선유동의 좋은 뜻이 결합된 결과로 보고 있다.
유래기록상 단양의 소금무지제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지진과 폭우 피해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소금무지제의 유래는 단양의 ‘단(丹, 뜨거울 단)’과 ‘양(陽, 볕 양)’에서 찾을 수 있다. 구전에 따르면 단양(현 단성면 소재지) 남쪽의 산이 두악산이며, 이를 ‘소금무지산’ 또는 ‘남산’이라고 한다.

현 단양중학교 자리는 주택가였다. 어느 날 이곳은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을‘잿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형 화재에 대하여 도술가는 단양이라는 글자가 모두 불[火]을 나타내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하다. 읍내 중앙에 연못을 파고 두악산 정상에 소금을 넣은 항아리를 묻으면 화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마을](/topic/마을) 중앙에 연못을 파고 산 정상에 세 개의 [소금단지](/topic/소금단지)를 묻으면서 가운데 항아리에는 소금, 좌우 항아리에는 한강물을 넣었더니 화재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소금과 한강물을 넣고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매년 정월이면 기자치성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의 연못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고 소금무지제만 마을의 제사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마당](/topic/마당)바위기우제 역시 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760년 이후 단양에서 기우제가 세 차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이한 것은 단양 지역에서는 폭우 피해가많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구전에 따르면 단양천의 상류인 복도소(復道沼) 위쪽 선유동(仙遊洞)에는 넓은 바위가 있다. 이곳은 두악산의 약수가 흘러 놀이하기가 좋다고 한다.그리고 가뭄 피해가 있는 경우 반드시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는 두악산의 영험함과 마당바위가 있는 선유동의 좋은 뜻이 결합된 결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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