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할망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도지역에서 농경과 관련해 충해(蟲害), 한해(寒害), 풍해(風害) 등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여 풍농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 신. 대개 6월쯤 ‘제석제’,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topic/고사))’와 같은 제의를 행한다. 주로 조, [밭벼](/topic/밭벼), [메밀](/topic/메밀) 같은 밭농사를 지을 때 밭을 일구고 파종을 하기 전에 풍농을 기원한다. 제석할망은 지역에 따라 ‘제석할머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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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지역에서 농경과 관련해 충해(蟲害), 한해(寒害), 풍해(風害) 등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여 풍농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 신. 대개 6월쯤 ‘제석제’,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topic/고사))’와 같은 제의를 행한다. 주로 조, [밭벼](/topic/밭벼), [메밀](/topic/메밀) 같은 밭농사를 지을 때 밭을 일구고 파종을 하기 전에 풍농을 기원한다. 제석할망은 지역에 따라 ‘제석할머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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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
정의제주도지역에서 농경과 관련해 충해(蟲害), 한해(寒害), 풍해(風害) 등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여 풍농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 신. 대개 6월쯤 ‘제석제’,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topic/고사))’와 같은 제의를 행한다. 주로 조, [밭벼](/topic/밭벼), [메밀](/topic/메밀) 같은 밭농사를 지을 때 밭을 일구고 파종을 하기 전에 풍농을 기원한다. 제석할망은 지역에 따라 ‘제석할머니’라고도 한다.
정의제주도지역에서 농경과 관련해 충해(蟲害), 한해(寒害), 풍해(風害) 등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여 풍농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 신. 대개 6월쯤 ‘제석제’,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topic/고사))’와 같은 제의를 행한다. 주로 조, [밭벼](/topic/밭벼), [메밀](/topic/메밀) 같은 밭농사를 지을 때 밭을 일구고 파종을 하기 전에 풍농을 기원한다. 제석할망은 지역에 따라 ‘제석할머니’라고도 한다.
내용제석할망은 제주도지역에서 농작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는 신이다. 할망이란 용어로 보아 여신이다. 육지부에서 농사도 관장하면서 삼신의 기능을 담당하는 신으로 이해되는 제석신과 달리 제주도에서는 제석할망이 [농업](/topic/농업)관장신으로만 관념되고 있다.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는 [마을](/topic/마을)제 및 가정신앙으로 함께 존속해 왔다.

현용준(玄容駿)의 『제주의 민속』에서는 제석신에 대한 제의가 마을신앙편에 소개되어 있다. 제석신에 대한 제의는 ‘제석제’라고 한다. 조나 [메밀](/topic/메밀) 파종 [직전](/topic/직전)에 하는 곳, 조나 메밀 파종 직후에 하는 곳, 음력 칠월 열나흗날인 백중에 하는 곳 등이 있다. 어느 것이나 시기는 파종하는 [종자](/topic/종자)의 육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마을 전체의 풍농을 기원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제석제는 일반적으로 약간 높은 언덕에서 한다. 이곳은 ‘제석동산’이라고 불린다. 대부분 제단이 없지만 간혹 별도의 제단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제단의 형태는 포제단(酺祭壇)과 거의 같다.

제석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한다. 8․15 광복 이전에는 마을마다 공용(公用) 용인(하인)이 있었다. 이 용인이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곡식을 얻어와 이것으로 떡과 기타 제물을 마련한 뒤 솥, 쌀, 물을 제석제단으로 운반한다. 제단 앞에서 솥에 메를 지어 솥째로 제단 위에 올리고, 용인이 [제관](/topic/제관)이 되어 유식(儒式) 제의를 약식으로 진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용인은 그 제물을 이장 등 동네 어른들에게 나누어 준다. 광복 후 마을의 공용 용인이 없어져서 방별(坊別)로 순차 부담하였다. 그 방 내에서 제의 담당자를 정하여 의례를 지내왔지만 근래에 와서 없어진 곳이 많다. 제물로 메, 도래떡 등 소박한 것을 올리며, 지방을 써 붙이지 않는 대신 댓[가지](/topic/가지)에 [백지](/topic/백지) 한 장을 붙여 기(旗)를 만든 다음 이를 신위의 위치에 꽂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의는 포제를 지내는 마을에서 이중으로 지내기도 했다.

성산읍 삼달리의 제석제는 조 파종 전과 메밀 파종 전에 택일하여 연 2회 행한다. 조, 메밀 같은 곡식의 파종 시기가 되면 용인은 향장(지금의 이장)에게 택일을 정해 받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석제 지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각 집에서는 집안 형편에 따라 밀을 한 되 내지 넉 되 정도 내준다. 이를 “제석제 제물 받는다.”고 한다. 용인은 이렇게 모은 쌀로 도래떡, 해어(海魚), 오과(五果), 감주 등 제물을 준비한 다음 솥과 백미를 지고 제석동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제장에서 솥에 불을 피워 메를 짓고 솥째로 제단에 올린다. 그 후에는 용인 스스로 [분향](/topic/분향) 배례하고 술잔을 부어 올린 뒤 숟가락을 메에 꽂고, 조금 있다가 ‘잡식(걸립과 같은 의미)’을 하고 나서 그것을 땅에 묻는다. 댓가지에 백지 한 장을 붙여 기를 만들어서 이를 신위의 위치에 꽂고 행제를 한다. 기는 제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둔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기를 보고 용인이 제석제를 지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가 끝나면 용인은 제물을 향장 댁에 가져와 올리고 행제하였음을 보고한다. 이 마을의 경우 메를 지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앞일을 점친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솥에 메를 지을 때 밥이 넘치면 바람이 일어 흉년, 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면 그 기울어진 방향이 흉년, 물이 맞게 밥이 잘되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식이다.

제석제는 무식(巫式)인 ‘제석굿’을 유식화(儒式化)한 것이다. 무식 제의를 이어받아 유식화한 것이어서 제관이 격하되어 용인이 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지역에 ‘제석동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제의는 전도적인 차원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제석제는 8․15 광복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많이 행해졌지만 이후에 급격하게 줄었다. 현재는 별로 행하지 않는다. 표선면 성읍리에도 제석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는다.

『한국의 가정신앙』 제주도편에는 각 가정에서 행하는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가 소개되어 있다. 제주시 용담2동 어영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마다 이 제를 올린다. 밭에 따라 다르지만 밭머리에서 밥, 해어, 술을 떠서 제석할망을 위했다가 가져온다. 삼양동 매촌마을(도련2동)에서는 조나 [밭벼](/topic/밭벼)([산듸](/topic/산듸))를 파종하는 날 메, 채소, 제숙을 밭 가운데에 차린 다음 메에 숟갈을 꽂고 술을 올려서 튼 방향을 찾아 선 뒤 제석할망에게 ‘올 한 해 농사 잘되게 주십서.’ 하고 마음속으로 빌거나 절을 한다. 그리고 고[수레](/topic/수레)를 한 다음 제물을 밭에 두었다가 나중에 말[馬]을 이용하여 밭 밟기를 하고 난 뒤 점심으로 나누어 먹는다. 그 밖에 밭일이 바빠 점심을 밭에서 먹게 될 경우 언제나 웃봉을 세 번 걷어 “제석할머니, 잘 잡수십서.”라고 위한 다음에 먹는다. 김(검질)을 매기 위해 도시락을 싸 갈 때도 우선 제석할망을 위한다. 아라1동에서는 밭에서 밥을 먹기 전에 목부(牧夫, 테우리)를 위해 먼저 음식을 케우린다(음식을 조금씩 뜯어 흩뿌린다는 뜻). 이것은 [쟁기질](/topic/쟁기질)할 때 [쟁기](/topic/쟁기)가 튀어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고, 밭 밟기를 하기 위해 몰아넣은 말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는 것이다.

제주시 동부지역의 구좌읍 송당리에서는 유월절이 들면 ‘제석할망사’를 행한다. [망태기](/topic/망태기)(멱)에 씨를 넣고 그 위에 마른 우럭 한 마리를 얹어서 밭에 나가 씨를 뿌린다. 우럭은 장만하는 기간이 길수록 정성이 있다고 하여 3~4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우럭은 씨를 뿌리고 난 뒤 집에 가져와 먹는다.

서귀포시 보목동에서는 한 해 농사의 처음 [밭갈이](/topic/밭갈이)를 하고 파종하기 전에 간단하게 ‘제석할망제’를 올렸다. 강정동에서는 백중인 음력 칠월 열나흗날에 ‘제석할망제’를 지냈다. 이날 농사를 주로 짓는 사람은 밭, 목축을 주로 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각각 지낸다. 강정동에서는 논농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논에 물을 대는 ‘물코’에 가서 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메 두 그릇, 고기 두 마리, 과일 등을 가져간다. 메 두 그릇 중 하나는 ‘사발메’로 제석할망, 다른 하나인 ‘보시메’는 테우리에게 각각 올리는 것이다. 절을 하지는 않지만, ‘제석할망, 제석하르[방제](/topic/방제)’라고 한다.

서귀포시 동부지역인 성산읍 신풍리에서는 밭을 밟기 전에 쌀밥, 해어, 계란 등 제물을 케우리며 간단히 ‘제석할망사’를 지낸 뒤에 밭을 밟았다. 테우리를 잘 대접하여 밭을 잘 밟아야 그해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제석할망제는 대부분 유월에 많이 지냈으며, 간혹 백중에 지내는 곳도 있다. 이 제의는 각 가정을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전승되었지만 현재는 거의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석할망제는 제주도의 서부쪽보다 제주시를 비롯해 동부쪽에서 많이 행했으며, 해안가보다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산간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제석할망은 농경과 관련된 신이고, 제석할망제는 제석할망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제주도지역의 무속에서는 라는 신화가 구송되고 있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여신 자청비는 남신 문도령을 따라 하늘에 오른 뒤 하늘에 있는 신으로부터 [오곡](/topic/오곡)종자와 메밀씨를 얻어 음력 칠월 열나흗날인 백중날 지상에 내려온다. 남편인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자청비네 집의 남종 정수남은 [목축신](/topic/목축신)인 하세경으로 각각 좌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신화는 오곡종자와 메밀씨를 우리 인간에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우리 민족의 농경기원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의 마지막 부분에 ‘제석할망’이란 명칭이 언급되는 자료가 간혹 있다. 이본(異本)에 따라 제석할망은 두 가지 존재로 나타난다. 첫째는 세경신인 자청비가 제석할망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청비에게 점심을 나누어준 노부부 중 할머니가 바로 제석할망이 된다는 것이다.(진성기 채록, 이달춘 [구연](/topic/구연)본 참조)

자청비는 남편인 문도령과 함께 지상에 내려온 뒤 굶어 죽어가던 남종 정수남을 살려서 목축신 및 세경테우리로 들어서라 하고, 이후에는 정수남과 함께 들에 가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자청비는 일을 하다가 배가 고파지자 정수남을 시켜 밭을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누어줄 것을 부탁하라고 한다. 처음에 부탁한 부잣집에서는 욕을 하면서 자기네 아홉 [머슴](/topic/머슴)이 먹을 음식도 모자란다면서 점심을 안 준다. 그래서 이 집의 밭작물에는 온갖 병을 몰아주고 흉농을 준다. 다음으로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사는 가난한 늙은 부부에게 점심을 요청하는데 이 부부는 자기네는 조금 먹고 나누어준다. 자청비는 점심을 먹은 보상으로 이 집의 밭에 풍농을 준다. 그리고 할아방에게는 제석천왕으로 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일 년 열두 달 [고사](/topic/고사)를 지낼 때 큰 상을 받아먹으며 살라고 한다. 할망에게는 제석지왕으로 들어서라 하면서 사람들이 세경 땅에서 밭농사를 지을 때 점심밥을 동서로 케우리면 운감을 하고, 제석사발로 그해 시절의 좋고 궂음을 마련해 주라고 한다.

에서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남종 정수남은 목축신인 하세경이 각각 되었다는 점에서 중세경인 자청비가 제석할망이 되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에 따라 두 번째 내용이 더 맞다고 보아야 한다. 농사를 지을 때, 착한 마음으로 남에게 선을 베풀 줄 알았기에 이러한 행위를 한 여신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제석할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본질적 기능은 신의 일에 비롯하여 인간사회 의례의 기원을 마련하는 데에 있다. 같은 신화에 제석할망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사회에는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 즉 ‘제석할망제’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에 나오는 것처럼 제주도 사람들은 점심을 먹을 때 밥을 동서로 케우리면서 풍농을 기원한다. 그리고 신에게 올리는 사발(솥째로 올린 메로 대치됨)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에서는 자청비라는 여신이 오곡을 가지고 오는 날이 음력 칠월 열나흘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이날을 ‘백중대제일’이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도 원래는 칠월 백중에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제석할망제 또는 제석할망사가 음력 7월 14일인 백중에 행해지는 지역이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편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백중 때보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때 더욱 간절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제석할망제’는 시기가 앞당겨져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유월 또는 그 이전에라도 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석할망’에 대한 신앙과 ‘제석제’, ‘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 같은 제의는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것은 농경에 [기초](/topic/기초)하여 삶의 양상이 좌우될 수밖에 없었을 때, 농사의 풍흉이 신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을 때 존재할 수 있었던 신앙이다. 이제 제주도지역의 [생업](/topic/생업)이 다양해졌으며, 농업 형태나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농사의 결과도 비료, [농약](/topic/농약) 등의 활용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석신앙은 그 존재 의의가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topic/사전) (진성기, 민속원, 1991)
백중의 기원과 성격 (이수자, 한국민속학 25, 한국민속학회, 1993)
[마을](/topic/마을)신앙 (현용준, 제주의 민속 Ⅴ-민간신앙․사회구조, 제주도, 1998)
제주도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 열두본풀이 자료집 (문무병, 칠머리당굿보존회, 1998)
제주도 무속을 통해서 본 큰굿 열두거리의 구조적 원형과 신화 (이수자, 집문당, 2004)
한국의 가정신앙-제주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내용제석할망은 제주도지역에서 농작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는 신이다. 할망이란 용어로 보아 여신이다. 육지부에서 농사도 관장하면서 삼신의 기능을 담당하는 신으로 이해되는 제석신과 달리 제주도에서는 제석할망이 [농업](/topic/농업)관장신으로만 관념되고 있다.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는 [마을](/topic/마을)제 및 가정신앙으로 함께 존속해 왔다.

현용준(玄容駿)의 『제주의 민속』에서는 제석신에 대한 제의가 마을신앙편에 소개되어 있다. 제석신에 대한 제의는 ‘제석제’라고 한다. 조나 [메밀](/topic/메밀) 파종 [직전](/topic/직전)에 하는 곳, 조나 메밀 파종 직후에 하는 곳, 음력 칠월 열나흗날인 백중에 하는 곳 등이 있다. 어느 것이나 시기는 파종하는 [종자](/topic/종자)의 육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마을 전체의 풍농을 기원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제석제는 일반적으로 약간 높은 언덕에서 한다. 이곳은 ‘제석동산’이라고 불린다. 대부분 제단이 없지만 간혹 별도의 제단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제단의 형태는 포제단(酺祭壇)과 거의 같다.

제석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한다. 8․15 광복 이전에는 마을마다 공용(公用) 용인(하인)이 있었다. 이 용인이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곡식을 얻어와 이것으로 떡과 기타 제물을 마련한 뒤 솥, 쌀, 물을 제석제단으로 운반한다. 제단 앞에서 솥에 메를 지어 솥째로 제단 위에 올리고, 용인이 [제관](/topic/제관)이 되어 유식(儒式) 제의를 약식으로 진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용인은 그 제물을 이장 등 동네 어른들에게 나누어 준다. 광복 후 마을의 공용 용인이 없어져서 방별(坊別)로 순차 부담하였다. 그 방 내에서 제의 담당자를 정하여 의례를 지내왔지만 근래에 와서 없어진 곳이 많다. 제물로 메, 도래떡 등 소박한 것을 올리며, 지방을 써 붙이지 않는 대신 댓[가지](/topic/가지)에 [백지](/topic/백지) 한 장을 붙여 기(旗)를 만든 다음 이를 신위의 위치에 꽂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의는 포제를 지내는 마을에서 이중으로 지내기도 했다.

성산읍 삼달리의 제석제는 조 파종 전과 메밀 파종 전에 택일하여 연 2회 행한다. 조, 메밀 같은 곡식의 파종 시기가 되면 용인은 향장(지금의 이장)에게 택일을 정해 받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석제 지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각 집에서는 집안 형편에 따라 밀을 한 되 내지 넉 되 정도 내준다. 이를 “제석제 제물 받는다.”고 한다. 용인은 이렇게 모은 쌀로 도래떡, 해어(海魚), 오과(五果), 감주 등 제물을 준비한 다음 솥과 백미를 지고 제석동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제장에서 솥에 불을 피워 메를 짓고 솥째로 제단에 올린다. 그 후에는 용인 스스로 [분향](/topic/분향) 배례하고 술잔을 부어 올린 뒤 숟가락을 메에 꽂고, 조금 있다가 ‘잡식(걸립과 같은 의미)’을 하고 나서 그것을 땅에 묻는다. 댓가지에 백지 한 장을 붙여 기를 만들어서 이를 신위의 위치에 꽂고 행제를 한다. 기는 제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둔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기를 보고 용인이 제석제를 지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가 끝나면 용인은 제물을 향장 댁에 가져와 올리고 행제하였음을 보고한다. 이 마을의 경우 메를 지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앞일을 점친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솥에 메를 지을 때 밥이 넘치면 바람이 일어 흉년, 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면 그 기울어진 방향이 흉년, 물이 맞게 밥이 잘되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식이다.

제석제는 무식(巫式)인 ‘제석굿’을 유식화(儒式化)한 것이다. 무식 제의를 이어받아 유식화한 것이어서 제관이 격하되어 용인이 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지역에 ‘제석동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제의는 전도적인 차원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제석제는 8․15 광복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많이 행해졌지만 이후에 급격하게 줄었다. 현재는 별로 행하지 않는다. 표선면 성읍리에도 제석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는다.

『한국의 가정신앙』 제주도편에는 각 가정에서 행하는 ‘[제석할망제](/topic/제석할망제)’가 소개되어 있다. 제주시 용담2동 어영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마다 이 제를 올린다. 밭에 따라 다르지만 밭머리에서 밥, 해어, 술을 떠서 제석할망을 위했다가 가져온다. 삼양동 매촌마을(도련2동)에서는 조나 [밭벼](/topic/밭벼)([산듸](/topic/산듸))를 파종하는 날 메, 채소, 제숙을 밭 가운데에 차린 다음 메에 숟갈을 꽂고 술을 올려서 튼 방향을 찾아 선 뒤 제석할망에게 ‘올 한 해 농사 잘되게 주십서.’ 하고 마음속으로 빌거나 절을 한다. 그리고 고[수레](/topic/수레)를 한 다음 제물을 밭에 두었다가 나중에 말[馬]을 이용하여 밭 밟기를 하고 난 뒤 점심으로 나누어 먹는다. 그 밖에 밭일이 바빠 점심을 밭에서 먹게 될 경우 언제나 웃봉을 세 번 걷어 “제석할머니, 잘 잡수십서.”라고 위한 다음에 먹는다. 김(검질)을 매기 위해 도시락을 싸 갈 때도 우선 제석할망을 위한다. 아라1동에서는 밭에서 밥을 먹기 전에 목부(牧夫, 테우리)를 위해 먼저 음식을 케우린다(음식을 조금씩 뜯어 흩뿌린다는 뜻). 이것은 [쟁기질](/topic/쟁기질)할 때 [쟁기](/topic/쟁기)가 튀어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고, 밭 밟기를 하기 위해 몰아넣은 말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는 것이다.

제주시 동부지역의 구좌읍 송당리에서는 유월절이 들면 ‘제석할망사’를 행한다. [망태기](/topic/망태기)(멱)에 씨를 넣고 그 위에 마른 우럭 한 마리를 얹어서 밭에 나가 씨를 뿌린다. 우럭은 장만하는 기간이 길수록 정성이 있다고 하여 3~4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우럭은 씨를 뿌리고 난 뒤 집에 가져와 먹는다.

서귀포시 보목동에서는 한 해 농사의 처음 [밭갈이](/topic/밭갈이)를 하고 파종하기 전에 간단하게 ‘제석할망제’를 올렸다. 강정동에서는 백중인 음력 칠월 열나흗날에 ‘제석할망제’를 지냈다. 이날 농사를 주로 짓는 사람은 밭, 목축을 주로 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각각 지낸다. 강정동에서는 논농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논에 물을 대는 ‘물코’에 가서 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메 두 그릇, 고기 두 마리, 과일 등을 가져간다. 메 두 그릇 중 하나는 ‘사발메’로 제석할망, 다른 하나인 ‘보시메’는 테우리에게 각각 올리는 것이다. 절을 하지는 않지만, ‘제석할망, 제석하르[방제](/topic/방제)’라고 한다.

서귀포시 동부지역인 성산읍 신풍리에서는 밭을 밟기 전에 쌀밥, 해어, 계란 등 제물을 케우리며 간단히 ‘제석할망사’를 지낸 뒤에 밭을 밟았다. 테우리를 잘 대접하여 밭을 잘 밟아야 그해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제석할망제는 대부분 유월에 많이 지냈으며, 간혹 백중에 지내는 곳도 있다. 이 제의는 각 가정을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전승되었지만 현재는 거의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석할망제는 제주도의 서부쪽보다 제주시를 비롯해 동부쪽에서 많이 행했으며, 해안가보다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산간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제석할망은 농경과 관련된 신이고, 제석할망제는 제석할망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제주도지역의 무속에서는 라는 신화가 구송되고 있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여신 자청비는 남신 문도령을 따라 하늘에 오른 뒤 하늘에 있는 신으로부터 [오곡](/topic/오곡)종자와 메밀씨를 얻어 음력 칠월 열나흗날인 백중날 지상에 내려온다. 남편인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자청비네 집의 남종 정수남은 [목축신](/topic/목축신)인 하세경으로 각각 좌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신화는 오곡종자와 메밀씨를 우리 인간에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우리 민족의 농경기원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의 마지막 부분에 ‘제석할망’이란 명칭이 언급되는 자료가 간혹 있다. 이본(異本)에 따라 제석할망은 두 가지 존재로 나타난다. 첫째는 세경신인 자청비가 제석할망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청비에게 점심을 나누어준 노부부 중 할머니가 바로 제석할망이 된다는 것이다.(진성기 채록, 이달춘 [구연](/topic/구연)본 참조)

자청비는 남편인 문도령과 함께 지상에 내려온 뒤 굶어 죽어가던 남종 정수남을 살려서 목축신 및 세경테우리로 들어서라 하고, 이후에는 정수남과 함께 들에 가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자청비는 일을 하다가 배가 고파지자 정수남을 시켜 밭을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누어줄 것을 부탁하라고 한다. 처음에 부탁한 부잣집에서는 욕을 하면서 자기네 아홉 [머슴](/topic/머슴)이 먹을 음식도 모자란다면서 점심을 안 준다. 그래서 이 집의 밭작물에는 온갖 병을 몰아주고 흉농을 준다. 다음으로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사는 가난한 늙은 부부에게 점심을 요청하는데 이 부부는 자기네는 조금 먹고 나누어준다. 자청비는 점심을 먹은 보상으로 이 집의 밭에 풍농을 준다. 그리고 할아방에게는 제석천왕으로 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일 년 열두 달 [고사](/topic/고사)를 지낼 때 큰 상을 받아먹으며 살라고 한다. 할망에게는 제석지왕으로 들어서라 하면서 사람들이 세경 땅에서 밭농사를 지을 때 점심밥을 동서로 케우리면 운감을 하고, 제석사발로 그해 시절의 좋고 궂음을 마련해 주라고 한다.

에서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남종 정수남은 목축신인 하세경이 각각 되었다는 점에서 중세경인 자청비가 제석할망이 되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에 따라 두 번째 내용이 더 맞다고 보아야 한다. 농사를 지을 때, 착한 마음으로 남에게 선을 베풀 줄 알았기에 이러한 행위를 한 여신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제석할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본질적 기능은 신의 일에 비롯하여 인간사회 의례의 기원을 마련하는 데에 있다. 같은 신화에 제석할망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사회에는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 즉 ‘제석할망제’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에 나오는 것처럼 제주도 사람들은 점심을 먹을 때 밥을 동서로 케우리면서 풍농을 기원한다. 그리고 신에게 올리는 사발(솥째로 올린 메로 대치됨)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에서는 자청비라는 여신이 오곡을 가지고 오는 날이 음력 칠월 열나흘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이날을 ‘백중대제일’이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석할망에 대한 제의도 원래는 칠월 백중에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제석할망제 또는 제석할망사가 음력 7월 14일인 백중에 행해지는 지역이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편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백중 때보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때 더욱 간절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제석할망제’는 시기가 앞당겨져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유월 또는 그 이전에라도 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석할망’에 대한 신앙과 ‘제석제’, ‘제석할망제’, ‘제석할망사(고사)’ 같은 제의는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것은 농경에 [기초](/topic/기초)하여 삶의 양상이 좌우될 수밖에 없었을 때, 농사의 풍흉이 신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을 때 존재할 수 있었던 신앙이다. 이제 제주도지역의 [생업](/topic/생업)이 다양해졌으며, 농업 형태나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농사의 결과도 비료, [농약](/topic/농약) 등의 활용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석신앙은 그 존재 의의가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topic/사전) (진성기, 민속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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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무속을 통해서 본 큰굿 열두거리의 구조적 원형과 신화 (이수자, 집문당,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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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당경기도 도당굿 무가의 현지연구김헌선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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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사서울지역 안안팎굿 무가자료집김헌선2006
한국무속학회, 민속원서울굿의 음악적 특성김혜정2007),
민속원동해안의 굿음악, 그 전승과 단절장휘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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