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큰굿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도 무속의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 제주 큰굿은 경륜이 있는 큰 심방을 수심방[首巫]으로 하여 굿법을 지키며 연행되는 ‘차례차례 재차례 굿’이다. 이 굿은 2001년 8월 16일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2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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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무속의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 제주 큰굿은 경륜이 있는 큰 심방을 수심방[首巫]으로 하여 굿법을 지키며 연행되는 ‘차례차례 재차례 굿’이다. 이 굿은 2001년 8월 16일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2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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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병
정의제주도 무속의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 제주 큰굿은 경륜이 있는 큰 심방을 수심방[首巫]으로 하여 굿법을 지키며 연행되는 ‘차례차례 재차례 굿’이다. 이 굿은 2001년 8월 16일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2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용큰굿은 전 무구를 사용하고, 그 굿의 목적에 필요한 모든 의례를 연속적으로 다하는 일종의 종합제이다. 이것은 4~5명의 심방이 동원되어 짧게는 4일에서 길게는 두 이레인 열나흘, 즉 보름 동안 함으로써 규모가 크기 때문에 큰굿이라고도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큰 심방, 문서를 아는 심방이 맑고 공정하다고 하는 저승법인 굿법에 따라 제대로 하는 중요한 굿이기 때문에 큰굿이라고 한다. 큰굿은 심방 집에서 하는 신굿과 사가(私家)에서 하는 큰굿이 있다. 신굿은 사가에서 [당클](/topic/당클)을 사방에 매어서 하는 큰굿인 4당클굿에다 심방 집에서 신 길을 바로잡기 위하여 당주의 길을 닦는 당주맞이의 여러 제차가 삽입되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굿을 말한다. 따라서 신굿은 제주도의 큰굿 중의 큰굿으로써 차례차례 재차례 굿으로 제주도 굿의 모든 형식과 내용이 다 들어 있으며, 완벽한 굿의 체계와 질서를 지닌 굿의 종합이다.

굿법은 굿을 원리대로, 즉 젯리 또는 굿의 제차(祭次)를 어기지 않고 지켜가며 차례차례 재차례로 굿을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초공본풀이](/topic/초공본풀이)에 나오는 최초의 심방 선생인 유정승의 따님아기(유씨부인)가 삼시왕[巫祖神]에게서 받아 배운 무당서 삼천 권에 근거한다고 한다. 무당서(巫堂書)는 굿법을 적은 신화적인 책이다. 제주도의 굿은 우주의 모형으로 당클을 만들고, 모든 신을 일제히 모셔들이는 초감제부터 시작한다. 초감제는 ‘하늘-땅’이라는 신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는 하강의식이다. 신의 하강은 지상의 성역화를 이루는 동시에 연극적으로는 공간·시간·장소의 현장성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초감제가 끝나면 당클에 모셔진 신들을 그 지위에 따라 상위신에서 하위신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개별의례를 치러 나가며, 그 방식은 본풀이·맞이·놀이의 세 [가지](/topic/가지)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하나의 신격에 대해서는 초공본을 풀어 초공맞이, 영감본을 풀어 [영감놀이](/topic/영감놀이)와 같이 ‘본풀이+맞이’ 또는 ‘본풀이+놀이’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본풀이는 맞이나 놀이의 대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큰굿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큰굿의 제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 큰굿의 제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신의례[초감제-초신맞이-초상계], 공연의례[추물공연-석살림-보세감상], 기원·영신의례[불도맞이-일월맞이-초공본풀이-이공본풀이-초·이공맞이-삼공본풀이-젯상계], 천도·해원의례[시왕맞이-요왕맞이-세경본풀이-제오상계], 오신의례[전상놀이(삼공맞이)-세경놀이-양궁숙임], [가신](/topic/가신)·조상의례[문전본풀이-본향리-영개돌려세움], 송신의례[군웅만판-칠성본풀이-각도비념-말놀이-도진-가수리-뒤맞이].

큰굿은 굿판에서 항상 굿을 제대로 하는가를 참관하여 심사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이 풍부한 두 이레 열나흘 굿을 전승할 수 있었다. 특히 심방집에서는 신굿이라는 큰굿을 하여 신에게 역가(役價)를 바쳐야 한다. 심방은 신을 모시고 생활하는 무업의 종사자로서 “신의 덕에 입고, 먹고, 자고, 행동발신”해 왔기 때문에 그 대가를 신에게 다시 바치는 것이 심방 집에서 하는 큰굿이다. 심방이 벌어먹은 역가, 즉 심방질을 하여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는 역례(役禮)이다. 심방은 역례를 바친 횟수만큼 심방 사회에서 무덕이 높은 심방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초역례를 바치면 하신충, 이역례를 바치면 중신충, 삼역례를 바치면 상신충에 오른다. 그러므로 큰 심방이 되려면 굿도 물론 잘해야겠지만 신에게 역가를 바치는 신굿을 적어도 세 차례는 해야 한다. 심방은 역례를 행함으로써 자신이 벌어먹은 것의 일부를 심방 사회에 환원하고, 벌어먹은 역가를 신에게 바치는 역례의 횟수만큼 심방 사회에서 큰 심방으로의 층위 상승을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신굿을 신 길을 바로잡는 당주맞이라고 한다. 심방은 자기 집에서 스승이 되는 원로 심방을 청하여 큰굿을 하여 스승으로부터 옛 법대로의 굿을 배우며, 수심방이 인도하는 대로 굿법에 따라 굿을 하고, 심방의 정도를 가는 것이 신굿이기도 하다.
참고문헌南宦博物
제주도무속자료[사전](/topic/사전) (현용준, 신구문화사, 1980)
제주도 큰굿자료 (문무병 외, 제주전통문화연구소, 2001)
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 (문무병, 민속원, 2008)
역사무속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인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의 일환으로 위정자에 의하여 사회적 폐습이 되었으며, 심방[巫堂]은 한갓 이러한 폐습을 조장하는 불한당으로 인식되어 배척의 대상으로서 종교적 탄압을 받았다.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섬의 곳곳에 돌과 나무로 당을 만들고,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에 이르기까지 심방들은 독기(纛旗)를 앞에 모시고 나희를 꾸며 [꽹과리](/topic/꽹과리)와 북을 치며, 깃발과 창검을 앞세워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 관원 이하 온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물품과 곡식을 바쳐 제사를 드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질병과 생사화복을 음신(陰神)에게 구하여 극복하려 하므로 자연 무당들의 횡포가 심하고, 그 [무리](/topic/무리) 또한 많아 백성들의 피폐가 크다. 이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재물을 강요하고 신당에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며 심지어는 마소를 탈취하는 등의 행패가 극심하였다. 이에 지역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신당 129개소와 신당에 관계되는 기물 [의복](/topic/의복)까지 부수고 불살랐다. 이에 무당들이 스스로 그 일에 손을 떼고 농사일에 종사하게 되었다”하여 제주 무격배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또 “당하니[堂漢]는 마을의 신당을 맡아 모시는 심방이다. 이들이 서로 계를 만들어 굿을 하며 백성들에게서 뺏어 먹고 소를 잡아 신당에 올리는 등 그 폐단이 큰데, 그 계의 수가 천이 넘는다”고 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무속에 대한 부정적 인식 속에서 조선시대의 무속신앙의 형태를 짐작케 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김정(金淨, 1486~1520)은 『제주풍토록』에서 “남자 무당이 매우 많다”(男巫甚多)고 지적하고 있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사록』에서 “이 지방 풍속엔 예부터 여무(女巫)가 없고, 무릇 귀신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은 다 남자 무당이 한다”고 전하면서 이것이 신라 화랑의 유풍이라고 흥미 있는 견해까지 덧붙이고 있다.(餘留州日 聞客舍外民家作巫事 卽掌致巫人 一偃蹇男子也 問其故 土俗自古無女巫 凡祀鬼禱神之事 皆男巫爲之云 比必新羅花郞之遺風) 이는 제주도에서는 남자무당이 큰굿을 집전하는 사제자로서 대표성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심방의 사회적 직능에 대해서 『제주풍토록』, 『남사록』, 『탐라지』 등에 “사람이 병이 나면 귀신의 노여움 때문이라 하고 약 쓰기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는 질병 치료에 굿이 필요했음을 말하는 것이며, “병액 득상화복에 대하여 신에게 물어본다(病厄 得喪禍福 一聽於神)”라는 표현은 길흉화복 모든 일을 신탁에 의해, 점을 쳐서 신에게 들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조선시대 조정의 강력한 탄압에도 전통적인 제주사회는 병을 고치거나 마을의 부정을 막거나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르고[除災招福]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심방을 불러 굿을 해야만 했던 무속신앙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어떤 형태로든 존속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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