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본

한국무속신앙사전
전통적인 서울굿의 지역적 세분 명칭 가운데 하나.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구분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누었을 때, 동쪽의 중심 지역이 왕십리이기 때문에 왕십리본이라고 한다. ‘본(本)’이라는 명칭은 보통 활자화된 문서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왕십리본이라고 표현하면 왕십리 일대를 중심으로 굿을 하던 이들의 무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가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가의 학습은 구비로 이루어지고, 지역의 세부적인 차이는 무가 측면보다 굿의 연행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본’은 정형화된 무가 [사설](/topic/사설)이라는 의미보다는 무가를 포함한 굿법(-法) 또는 굿제(-制)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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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서울굿의 지역적 세분 명칭 가운데 하나.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구분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누었을 때, 동쪽의 중심 지역이 왕십리이기 때문에 왕십리본이라고 한다. ‘본(本)’이라는 명칭은 보통 활자화된 문서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왕십리본이라고 표현하면 왕십리 일대를 중심으로 굿을 하던 이들의 무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가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가의 학습은 구비로 이루어지고, 지역의 세부적인 차이는 무가 측면보다 굿의 연행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본’은 정형화된 무가 [사설](/topic/사설)이라는 의미보다는 무가를 포함한 굿법(-法) 또는 굿제(-制)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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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정의전통적인 서울굿의 지역적 세분 명칭 가운데 하나.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구분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누었을 때, 동쪽의 중심 지역이 왕십리이기 때문에 왕십리본이라고 한다. ‘본(本)’이라는 명칭은 보통 활자화된 문서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왕십리본이라고 표현하면 왕십리 일대를 중심으로 굿을 하던 이들의 무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가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가의 학습은 구비로 이루어지고, 지역의 세부적인 차이는 무가 측면보다 굿의 연행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본’은 정형화된 무가 [사설](/topic/사설)이라는 의미보다는 무가를 포함한 굿법(-法) 또는 굿제(-制)를 의미한다.
내용오늘날 서울굿의 본을 나누는 분류 명칭은 동쪽제, 서쪽제 정도로만 구분된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전통적인 학습을 한 소수의 만신들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세분화된 분류가 있었다. 그 예로 2분류법과 3분류법을 들 수 있다. 2분류법은 사[대문](/topic/대문)을 중심으로 안의 굿과 바깥 굿으로 나누는 것이고, 3분류법은 각심절-우수현-구파발 또는 각심절-노들-구파발 또는 왕십리-노들-구파발 또는 각심절-서댄밖-노들로 나누는 것이다. 왕십리본은 3분류법에 해당된다. 여기에 말죽거리, 마포, 되됨이, 선희궁이라는 명칭들도 거론되지만 가장 일반적인 분류법은 3분류법이다. 즉, 서울의 서쪽은 구파발 또는 서대문 밖, 동쪽은 각심절(지금의 노원구 월계동으로 추측) 또는 왕십리, 남쪽은 우수현(예전에 용산구 도동과 후암동의 경계를 이룬 고개) 또는 노들(노량진)로 나뉜다는 것이다. 결국 왕십리본은 서울굿의 동쪽굿 내지 동쪽제의 중심 지역으로 거론된다.

과거 왕십리를 중심으로 한 서울의 동쪽굿은 [진적굿](/topic/진적굿)과 천신굿이 유명했다고 만신들은 증언한다. 이에 비해 서쪽은 진오귀굿, 남쪽은 당굿이나 뱃굿이 유명했다고 한다. 또 ‘우대 만신 아래대 전악’이라는 말이 있다. 우대는 서울의 서쪽을, 아래대는 동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쪽은 큰 만신, 동쪽은 [무악](/topic/무악)을 연주하는 전악과 일류 잽이가 많이 났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굿법으로서 ‘왕십리본’의 정체성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만신의 굿이다. 그리고 그 굿은 신어머니로부터 학습을 통해 전수된다. 2009년 작고한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topic/서울새남굿)의 기능보[유자](/topic/유자)였던 [김유감](/topic/김유감)은 “동쪽의 유갬이(김유감), 노들 순자(최순자), 서댄밖 순이, 갈월이”라는 말을 했는데, 바로 각 지역의 전통적인 굿을 학습한 만신들을 일컫는 것이다. 김유감 만신은 1924년 왕십리 두모개 태생이고 작고하기까지 줄곧 왕십리에서 거주하였다. 그의 어머니 반승업도 서울의 큰 만신이었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행당동 아기씨당굿의 당주 [김옥렴](/topic/김옥렴)도 행당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다. 그의 어머니 김묘분, 친할머니 고송자도 이곳의 무당이었다. 이외에도 유명했던 왕십리의 무당으로는 ‘왕십리 오토바이’로 불린 박어진(1923~1995)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박어진에게 굿을 배운 만신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서울새남굿의 기능보유자 [이상순](/topic/이상순)(은하엄마)과 굿 잘하기로 소문난 전농동 돼지엄마 박금순 등이 있다.

김옥렴, 김유감 등이 증언하는 왕십리를 중심으로 한 서울 동쪽굿의 특징은 먼저 굿의 순서 가운데 불사거리와 산거리의 선후이다. 동쪽에서 불사거리를 먼저하고 산거리를 나중에 한다면, 서쪽에서는 이것이 거꾸로이다. 동쪽에서의 [진진오기굿](/topic/진진오기굿)은 시왕창부를 놀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쪽이 청을 길게 뽑고 [춤사위](/topic/춤사위)도 약간 느린 반면에 서쪽은 청과 음악을 빨리 둥글려서 한다. 이외에도 제물(전물)을 괴는 방법, 의대 등도 차이가 있다.

한편 이 서울굿의 본이 조선시대의 무당 [마을](/topic/마을), 이른바 무교촌(『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무격리(巫覡里)라고 표현됨)과도 연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28년(1533) 2월 16일조에 “근세에는 서울 남대문 밖의 우수현과 용산강의 노량진에 무격이 모여서 사는데, 이는 모두 서울에서 쫓겨나 부락을 이룬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파발, 각심절, 되됨(넘)이 등 다른 지역의 사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편 (문화재관리국, 1979)
한국의 무 (조흥윤, 정음사, 1983)
한국의 무속-서울, 황해도편 (국립민속박물관, 1999)
서울굿의 동쪽제와 서쪽제 비교 (고영희, 비교민속학 29, 비교민속학회, 2005)
서울굿의 양상과 의미 (홍태한, 민속원, 2006)
서울굿의 이해 (한국무속학회, 민속원, 2007)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 무속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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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출판사안성무가서대석·박경신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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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민속학회한국문화에 나타난 불의 다층적 의미와 의의이수자2000
집문당제주도 무속을 통해서 본 큰굿 열두거리의 구조적 원형과 신화이수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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