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아롱개마을미륵댕이

한국무속신앙사전
안성아롱개마을미륵댕이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아롱개[마을](/topic/마을)에 있는 [미륵당](/topic/미륵당). 미륵댕이 안에 있는 보살입상과 석불입상은 1986년 5월 22일에 ‘안성시 향토유적 제10호·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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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아롱개[마을](/topic/마을)에 있는 [미륵당](/topic/미륵당). 미륵댕이 안에 있는 보살입상과 석불입상은 1986년 5월 22일에 ‘안성시 향토유적 제10호·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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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욱
정의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아롱개[마을](/topic/마을)에 있는 [미륵당](/topic/미륵당). 미륵댕이 안에 있는 보살입상과 석불입상은 1986년 5월 22일에 ‘안성시 향토유적 제10호·13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아롱개[마을](/topic/마을)에 있는 [미륵당](/topic/미륵당). 미륵댕이 안에 있는 보살입상과 석불입상은 1986년 5월 22일에 ‘안성시 향토유적 제10호·13호’로 지정되었다.
내용[마을](/topic/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개천에 쓰러져 있던 미륵님을 다시 찾아 세워서 [고사](/topic/고사)를 지낸 이후에는 마을에 재앙이 없고 6·25전쟁이나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도 사상자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당 안에 있는 나무에도 불이 나서 나무가 죽었다고 여겼다가 마을 사람들이 미륵님께 기원하니 메마른 고목 줄기에서 새순이 돋아나서 살아났다고 한다. 이는 미륵부처가 아롱개마을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다. 몸이 아프거나 다리를 젖히는 등 개운하지 않은 일이 생겨 아침 일찍 미륵당에 가서 기도를 하였더니 불편한 몸이 나았다는 주민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륵부처에 대한 의례를 ‘고사’라고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아롱개마을 토박이 20~30명이 고사에 참여하고 있다. 고사는 아침 10시에 시작하여 오전 중에 마치고, 참여한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으로 점심을 먹는다.

제물은 마을 부녀회장이 중심이 되어 부녀회에서 마련한다. 보통 사흘 전에 안성 장에서 구입하며, 마을회관에서 장만한다. 고사 제물 준비 외에 고사 후에 다 함께 먹을 점심으로 밥과 찌개를 넉넉히 준비한다. 부녀회에서 제물 장만을 주관하게 된 것은 1995년부터였다. 제물은 [시루떡](/topic/시루떡), 제주, [사과](/topic/사과), 밤, 곶감, [대추](/topic/대추), 배, 북어 등이다. 예전에는 마을에 술을 잘 담그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직접 제주를 담갔으나 요즘에는 막걸리를 사다가 제주로 쓰고 있다. 시루떡도 제물을 장만하는 집에서 직접 쪘으나 지금은 방앗간에다 맞춰서 고사 당일에 가져온다.

제물은 보살입상과 석불입상 앞 제단석에 각각 진설한다. 제단석 맨 앞에 술과 술잔을 두고 다음 줄에 배, 사과, 밤, 대추, 곶감을 올린다. 맨 뒤쪽 가운데에는 [실타래](/topic/실타래)로 묶은 [통북어](/topic/통북어)를 올린 떡시루를 놓고 양쪽에 촛불을 밝힌다. [미륵불](/topic/미륵불)이기 때문에 어육은 쓰지 않는다. 고사 절차는 간단하다. 통장이 술을 따라 주면 대표가 절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보통 마을에서 연세가 많은 노인이 대표가 된다. 최근에는 마을 노인 대 여섯 명이 참여하며, 이들이 해마다 번갈아 가면서 대표가 된다. 고사를 위한 별도의 [축문](/topic/축문)은 없다. 고사가 끝나면 마을 주민들이 각자 개인소지를 올린다. 미륵당을 관리하는 보살이 고사 지낼 때 와서 경을 읽어 주고 마을 대동소지를 올려 주기도 한다. 고사 지내는시간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되며, 고사를 마친 뒤에는 그 자리에서 [두레](/topic/두레)를 잠깐 친다. 예전에는 마을에 [두레패](/topic/두레패)가 있어서 고사를 지낸 뒤에 마을을 돌면서 걸립하였으나 2006년경부터는 두레를 칠 사람이 없어 고사 장소에서 두레를 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미륵고사를 한 번 지내는 데 20만 원 정도의 제물 비용이 든다. 이 비용은 두레패의 걸립이 없어진 뒤부터 아양동 1통 통장이 관리하는 자금으로 지불하고 있다.
참고문헌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한국의 마을신앙 상·하 (국립민속박물관, 2007)
내용[마을](/topic/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개천에 쓰러져 있던 미륵님을 다시 찾아 세워서 [고사](/topic/고사)를 지낸 이후에는 마을에 재앙이 없고 6·25전쟁이나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도 사상자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당 안에 있는 나무에도 불이 나서 나무가 죽었다고 여겼다가 마을 사람들이 미륵님께 기원하니 메마른 고목 줄기에서 새순이 돋아나서 살아났다고 한다. 이는 미륵부처가 아롱개마을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다. 몸이 아프거나 다리를 젖히는 등 개운하지 않은 일이 생겨 아침 일찍 미륵당에 가서 기도를 하였더니 불편한 몸이 나았다는 주민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륵부처에 대한 의례를 ‘고사’라고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아롱개마을 토박이 20~30명이 고사에 참여하고 있다. 고사는 아침 10시에 시작하여 오전 중에 마치고, 참여한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으로 점심을 먹는다.

제물은 마을 부녀회장이 중심이 되어 부녀회에서 마련한다. 보통 사흘 전에 안성 장에서 구입하며, 마을회관에서 장만한다. 고사 제물 준비 외에 고사 후에 다 함께 먹을 점심으로 밥과 찌개를 넉넉히 준비한다. 부녀회에서 제물 장만을 주관하게 된 것은 1995년부터였다. 제물은 [시루떡](/topic/시루떡), 제주, [사과](/topic/사과), 밤, 곶감, [대추](/topic/대추), 배, 북어 등이다. 예전에는 마을에 술을 잘 담그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직접 제주를 담갔으나 요즘에는 막걸리를 사다가 제주로 쓰고 있다. 시루떡도 제물을 장만하는 집에서 직접 쪘으나 지금은 방앗간에다 맞춰서 고사 당일에 가져온다.

제물은 보살입상과 석불입상 앞 제단석에 각각 진설한다. 제단석 맨 앞에 술과 술잔을 두고 다음 줄에 배, 사과, 밤, 대추, 곶감을 올린다. 맨 뒤쪽 가운데에는 [실타래](/topic/실타래)로 묶은 [통북어](/topic/통북어)를 올린 떡시루를 놓고 양쪽에 촛불을 밝힌다. [미륵불](/topic/미륵불)이기 때문에 어육은 쓰지 않는다. 고사 절차는 간단하다. 통장이 술을 따라 주면 대표가 절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보통 마을에서 연세가 많은 노인이 대표가 된다. 최근에는 마을 노인 대 여섯 명이 참여하며, 이들이 해마다 번갈아 가면서 대표가 된다. 고사를 위한 별도의 [축문](/topic/축문)은 없다. 고사가 끝나면 마을 주민들이 각자 개인소지를 올린다. 미륵당을 관리하는 보살이 고사 지낼 때 와서 경을 읽어 주고 마을 대동소지를 올려 주기도 한다. 고사 지내는시간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되며, 고사를 마친 뒤에는 그 자리에서 [두레](/topic/두레)를 잠깐 친다. 예전에는 마을에 [두레패](/topic/두레패)가 있어서 고사를 지낸 뒤에 마을을 돌면서 걸립하였으나 2006년경부터는 두레를 칠 사람이 없어 고사 장소에서 두레를 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미륵고사를 한 번 지내는 데 20만 원 정도의 제물 비용이 든다. 이 비용은 두레패의 걸립이 없어진 뒤부터 아양동 1통 통장이 관리하는 자금으로 지불하고 있다.
참고문헌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한국의 마을신앙 상·하 (국립민속박물관, 2007)
역사아양동 1통 아롱개[마을](/topic/마을)은 2010년 현재 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지금도 토박이가 많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안성천이 아산만과 연결되는 곳이다.예전에는 서해안의 바닷물이 이 부근까지 들어와 안성천의 찬물과 만나면서 안개가 많이 생겼다 한다. 동네가 항상 안개에 싸여 있어 동네 모습이 아른거리게 보인다 하여 마을 이름을 ‘아롱개’,‘아룽개’라고 하였다. 아롱개마을의 미륵부처는 아양동 2통 아양주공[아파트](/topic/아파트) 107동 바로 뒤에 있다.

미륵부처는 원래 현 위치에서 3m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해로 불상이 넘어져 목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마을 사람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 주민들이 [두레](/topic/두레)를 만들고 쌀을 거두어 복구했다고 한다. 그때 쓰러진 불상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사](/topic/고사)를 지내게 되었다. 석불입상의 제단석에 ‘을사년정월십사일 아양동일동(乙巳年 正月十四日 峨洋洞一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1965년 1월에 보수가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말에 안성시내에서 들어온 보살이 이 [미륵당](/topic/미륵당) 앞집에 법당을 차리고 살면서 당을 관리하고 미륵부처에게 불공을 드리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는 주민들이주관하여 마을고사를 지내고, 사월초파일에는 보살이 주관하여 신도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특히 초파일에는 연등을 달고 신도가 많이 찾아와 주변이 성황을 이룬다.
역사아양동 1통 아롱개[마을](/topic/마을)은 2010년 현재 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지금도 토박이가 많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안성천이 아산만과 연결되는 곳이다.예전에는 서해안의 바닷물이 이 부근까지 들어와 안성천의 찬물과 만나면서 안개가 많이 생겼다 한다. 동네가 항상 안개에 싸여 있어 동네 모습이 아른거리게 보인다 하여 마을 이름을 ‘아롱개’,‘아룽개’라고 하였다. 아롱개마을의 미륵부처는 아양동 2통 아양주공[아파트](/topic/아파트) 107동 바로 뒤에 있다.

미륵부처는 원래 현 위치에서 3m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해로 불상이 넘어져 목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마을 사람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 주민들이 [두레](/topic/두레)를 만들고 쌀을 거두어 복구했다고 한다. 그때 쓰러진 불상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사](/topic/고사)를 지내게 되었다. 석불입상의 제단석에 ‘을사년정월십사일 아양동일동(乙巳年 正月十四日 峨洋洞一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1965년 1월에 보수가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말에 안성시내에서 들어온 보살이 이 [미륵당](/topic/미륵당) 앞집에 법당을 차리고 살면서 당을 관리하고 미륵부처에게 불공을 드리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는 주민들이주관하여 마을고사를 지내고, 사월초파일에는 보살이 주관하여 신도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특히 초파일에는 연등을 달고 신도가 많이 찾아와 주변이 성황을 이룬다.
형태[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제당을 ‘미륵댕이’, ‘미륵데기’라고 부른다. 이는 미륵당, 미륵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륵댕이는 가로 12m, 세로 7m 면적에 삼면으로 높이130㎝ 정도의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topic/담장)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철책을 치고 문을 만들어 당(堂)으로서의 공간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아양동 보살입상과 아양동 석불입상 등 2기의 미륵상이 나란히 서 있다. 각 미륵상 앞에는 제단을 두었고, 뒤쪽으로 초를 켜는 함을 각각 설치하였다. 당 내부 바닥은 돌과 시멘트로 [기단](/topic/기단)을 만들어 높이고, 앞쪽으로도 시멘트 바닥으로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왼쪽의 키가 큰 미륵이 ‘아양동 보살입상(향토유적 제10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상을 여미륵님, 할머니미륵님으로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아양동 보살입상은 높이 337㎝, 어깨 폭 118㎝이다. 배꼽 정도까지 노출되어 있는 몸통 길이가 150㎝, 목 위부터 [화관](/topic/화관)(花冠)을 쓴 얼굴 길이가 120㎝ 정도로 두상이 몸체에 비해 길다. 상체는 키가 훌쩍 크고 꽃무늬가 선명한 보관을 썼으며, 눈·코·입이 [가지](/topic/가지)런하고 양귀가 가늘고 길어 한눈에 보아도 여성스럽다. 어깨도 곧고 당당하며, 긴 목에 윤곽이 뚜렷하다. 팔과 몸통의 선명한 꽃무늬는 마치 단장을 막 끝낸 도시 미인처럼 화려하다. 머리 뒷면에는 둥근 원이 여럿 음각되어 있어 광배를 새긴 듯하며, 하얀 돌로 눈동자를심은 것도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른손은 엄지를 세운 채 가슴에 얹었고, 밑으로 내린 왼손과 허리 아랫 부분은 매몰되어 있다. 아랫부분을 포함하여 전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주민의 말에 의하면 본래의 높이는 약 11자 반(380㎝)이라고 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미륵은 ‘아양동 석불입상(향토유적 제13호)’이다. 마을 사람들은 남미륵님, 할아버지미륵님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260㎝, 어깨 폭은 79㎝이다. 무릎 위 허벅지 정도부터 노출되어 있는 몸체는 약 155㎝, 관모를 쓴 얼굴 길이는 100㎝ 정도로 화강석 하나로 조각하였다. 기다란 관모는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목이 짧아 두상과 어깨는 붙었다. 옷에도 별 무늬가 없으며, 좌우로 늘어진 소맷자락에만 주름이뚜렷하다. 인상은 위엄이 깃들어 있으나 얼굴의 윤곽은 생전 다듬은 적이 없는 무뚝뚝한 시골 할아버지 형상이다. 석불 앞에 시멘트로 조성한 제단석이 있다.

보살입상 옆에있는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가시나무는 보살입상보다 낮게 베어져 있다. 이는 가시나무 가지가 우거져 보살입상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보살입상의 안전을위해 벤 것이다. 이 가시나무는 이곳에서 ‘[망우리](/topic/망우리)([쥐불놀이](/topic/쥐불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실수로 불에 타기도 하였으나 안쪽에서 새순이 살아난 것으로 보인다. 담장 왼쪽에는 보살이개인적으로 마련한 널찍한 제단이 있다.
형태[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제당을 ‘미륵댕이’, ‘미륵데기’라고 부른다. 이는 미륵당, 미륵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륵댕이는 가로 12m, 세로 7m 면적에 삼면으로 높이130㎝ 정도의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topic/담장)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철책을 치고 문을 만들어 당(堂)으로서의 공간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아양동 보살입상과 아양동 석불입상 등 2기의 미륵상이 나란히 서 있다. 각 미륵상 앞에는 제단을 두었고, 뒤쪽으로 초를 켜는 함을 각각 설치하였다. 당 내부 바닥은 돌과 시멘트로 [기단](/topic/기단)을 만들어 높이고, 앞쪽으로도 시멘트 바닥으로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왼쪽의 키가 큰 미륵이 ‘아양동 보살입상(향토유적 제10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상을 여미륵님, 할머니미륵님으로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아양동 보살입상은 높이 337㎝, 어깨 폭 118㎝이다. 배꼽 정도까지 노출되어 있는 몸통 길이가 150㎝, 목 위부터 [화관](/topic/화관)(花冠)을 쓴 얼굴 길이가 120㎝ 정도로 두상이 몸체에 비해 길다. 상체는 키가 훌쩍 크고 꽃무늬가 선명한 보관을 썼으며, 눈·코·입이 [가지](/topic/가지)런하고 양귀가 가늘고 길어 한눈에 보아도 여성스럽다. 어깨도 곧고 당당하며, 긴 목에 윤곽이 뚜렷하다. 팔과 몸통의 선명한 꽃무늬는 마치 단장을 막 끝낸 도시 미인처럼 화려하다. 머리 뒷면에는 둥근 원이 여럿 음각되어 있어 광배를 새긴 듯하며, 하얀 돌로 눈동자를심은 것도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른손은 엄지를 세운 채 가슴에 얹었고, 밑으로 내린 왼손과 허리 아랫 부분은 매몰되어 있다. 아랫부분을 포함하여 전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주민의 말에 의하면 본래의 높이는 약 11자 반(380㎝)이라고 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미륵은 ‘아양동 석불입상(향토유적 제13호)’이다. 마을 사람들은 남미륵님, 할아버지미륵님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260㎝, 어깨 폭은 79㎝이다. 무릎 위 허벅지 정도부터 노출되어 있는 몸체는 약 155㎝, 관모를 쓴 얼굴 길이는 100㎝ 정도로 화강석 하나로 조각하였다. 기다란 관모는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목이 짧아 두상과 어깨는 붙었다. 옷에도 별 무늬가 없으며, 좌우로 늘어진 소맷자락에만 주름이뚜렷하다. 인상은 위엄이 깃들어 있으나 얼굴의 윤곽은 생전 다듬은 적이 없는 무뚝뚝한 시골 할아버지 형상이다. 석불 앞에 시멘트로 조성한 제단석이 있다.

보살입상 옆에있는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가시나무는 보살입상보다 낮게 베어져 있다. 이는 가시나무 가지가 우거져 보살입상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보살입상의 안전을위해 벤 것이다. 이 가시나무는 이곳에서 ‘[망우리](/topic/망우리)([쥐불놀이](/topic/쥐불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실수로 불에 타기도 하였으나 안쪽에서 새순이 살아난 것으로 보인다. 담장 왼쪽에는 보살이개인적으로 마련한 널찍한 제단이 있다.
집문당한국무가집 3김태곤1978
지식산업사함경도 서사무가에 나타난 <아기장수전설>의 수용양상권태효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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