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백월산홍가신사당

한국무속신앙사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山頂)에 있는 홍가신을 모신 [사당](/topic/사당).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란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는 이 사당에서는 홍주성(洪州城)내 홍성 읍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제당 명칭 역시 다양하여 산제당(山祭堂)․홍가신사당(洪可臣祠堂)․부엉공(또는 부원공)․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 등으로 불린다. 현재 사당의 현판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고 쓰여 있는데 정난사(靖難祠)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른다. 청난사는 고장을 맑게 해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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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山頂)에 있는 홍가신을 모신 [사당](/topic/사당).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란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는 이 사당에서는 홍주성(洪州城)내 홍성 읍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제당 명칭 역시 다양하여 산제당(山祭堂)․홍가신사당(洪可臣祠堂)․부엉공(또는 부원공)․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 등으로 불린다. 현재 사당의 현판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고 쓰여 있는데 정난사(靖難祠)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른다. 청난사는 고장을 맑게 해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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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정의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山頂)에 있는 홍가신을 모신 [사당](/topic/사당).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란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는 이 사당에서는 홍주성(洪州城)내 홍성 읍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제당 명칭 역시 다양하여 산제당(山祭堂)․홍가신사당(洪可臣祠堂)․부엉공(또는 부원공)․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 등으로 불린다. 현재 사당의 현판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고 쓰여 있는데 정난사(靖難祠)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른다. 청난사는 고장을 맑게 해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정의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山頂)에 있는 홍가신을 모신 [사당](/topic/사당).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란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는 이 사당에서는 홍주성(洪州城)내 홍성 읍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제당 명칭 역시 다양하여 산제당(山祭堂)․홍가신사당(洪可臣祠堂)․부엉공(또는 부원공)․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 등으로 불린다. 현재 사당의 현판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고 쓰여 있는데 정난사(靖難祠)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른다. 청난사는 고장을 맑게 해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참조[홍성백월산홍가신제](/topic/홍성백월산홍가신제)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17․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참조[홍성백월산홍가신제](/topic/홍성백월산홍가신제)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17․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내용홍가신사당은 2006년 3월 15일 11시 홍성 군수 채현병을 비롯하여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산수보존협회, 월산[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비 5,700만원을 들여 준공하였다. 2004년 12월에 발생한 원인모를 화재로 인해 전소된 기존의 [사당](/topic/사당)을 2005년에 문화재위원회 자문으로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전소된 홍가신사당은 건축면적 13㎡ 규모의 붉은 벽돌로 지은 한 칸짜리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가운데에 쌍[여닫이](/topic/여닫이) 유리문을 두어 출입 하고 있으며, 출입문 좌우 상부에 각각 창문을 만들어 놓았다. 기와집은 1975년 당시 홍성군수인 조영호의 지원으로 마을 주민 복선채 등이 현재 자리로 이전하여 중수한 것이다. 한편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사당이 옮겨 오기 이전에는 현재 위치로부터 북서쪽 약 100m 지점에 홍가신사당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돌로 쌓은 벽에 초가[지붕](/topic/지붕)이었다.

제당 안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일등 공신(一等功臣) 홍가신(洪可臣) 목사(牧使), 이등 공신(二等功臣) 최호(崔湖) 수사(水使), 이등 공신(二等功臣) 박명현(朴名賢) 우후(虞候), 삼등 공신(三等功臣) 임득의(林得義) 파총(把摠), 삼등 공신(三等功臣) 신경행(辛敬行)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위패](/topic/위패)(位牌)가 있다. 중앙에는 ‘백월산신지위(白月山神之位)’라는 산신 위패가 있다. 산신 위패 왼쪽에는 홍가신 일가(一家)로 보이는 목상(木像) 다섯 점이 있다. 목상은 남상(男像)이 두 개, 여상(女像)이 세 개이다. 중앙의 목상이 홍가신이다. 오른쪽은 아들과 막내딸이며 왼쪽은 부인과 큰딸로 보이는 목상이다.

여기서 홍가신의 가계(家系)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홍가신(중종 36년~광해군 7년, 1541~1615)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출생이며 현재 염치읍 대동리 만전당 경전각은 홍가신의 후손들이 홍가신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그 후손에 따르면 족보상에 홍가신은 직계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하면 목상은 16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목상은 후세에 몇 차례 개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역사가 오래된 이 목상 역시 안타깝게도 2004년 12월 홍가신사당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소실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5년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2006년 3월 15일 홍가신사당 안에 기존의 목상을 모태로 새로 조각하여 원 위치에 새롭게 모셔 놓았지만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사당 내부의 신상과 위패 위치는 예전과 같다.

한편 1980년대 초 홍성군에서는 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을 산 아래로 옮기고자 하였다. 즉 산 중턱에 있는 산해암(山海庵)을 지나 홍성읍 월산리 방향으로 내려오면 산 아래에 평편한 곳이 나온다. 이곳에 새롭게 홍가신사당을 짓고 다섯 분의 위패를 모셨다. 백월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0월 홍주문화제 때 치러지는 ‘홍가신제’에 군수를 비롯하여 제의 참여자들이 산 정상에 올라야 하는데 산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사당을 산 아래로 옮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홍성의 주산(主山)으로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의미가 상실된다는 반대에 부딪혀 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은 그대로 둔 채 새로 지은 사당에 다섯 분의 위패만 새롭게 제작하여 몇 해 모시다가 지금은 새로 지은 사당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그 이후 백월산 동쪽 능선을 따라 찻길을 내어 현재는 산 정상까지 차가 오르고 있다.
내용홍가신사당은 2006년 3월 15일 11시 홍성 군수 채현병을 비롯하여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산수보존협회, 월산[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비 5,700만원을 들여 준공하였다. 2004년 12월에 발생한 원인모를 화재로 인해 전소된 기존의 [사당](/topic/사당)을 2005년에 문화재위원회 자문으로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전소된 홍가신사당은 건축면적 13㎡ 규모의 붉은 벽돌로 지은 한 칸짜리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가운데에 쌍[여닫이](/topic/여닫이) 유리문을 두어 출입 하고 있으며, 출입문 좌우 상부에 각각 창문을 만들어 놓았다. 기와집은 1975년 당시 홍성군수인 조영호의 지원으로 마을 주민 복선채 등이 현재 자리로 이전하여 중수한 것이다. 한편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사당이 옮겨 오기 이전에는 현재 위치로부터 북서쪽 약 100m 지점에 홍가신사당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돌로 쌓은 벽에 초가[지붕](/topic/지붕)이었다.

제당 안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일등 공신(一等功臣) 홍가신(洪可臣) 목사(牧使), 이등 공신(二等功臣) 최호(崔湖) 수사(水使), 이등 공신(二等功臣) 박명현(朴名賢) 우후(虞候), 삼등 공신(三等功臣) 임득의(林得義) 파총(把摠), 삼등 공신(三等功臣) 신경행(辛敬行)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위패](/topic/위패)(位牌)가 있다. 중앙에는 ‘백월산신지위(白月山神之位)’라는 산신 위패가 있다. 산신 위패 왼쪽에는 홍가신 일가(一家)로 보이는 목상(木像) 다섯 점이 있다. 목상은 남상(男像)이 두 개, 여상(女像)이 세 개이다. 중앙의 목상이 홍가신이다. 오른쪽은 아들과 막내딸이며 왼쪽은 부인과 큰딸로 보이는 목상이다.

여기서 홍가신의 가계(家系)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홍가신(중종 36년~광해군 7년, 1541~1615)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출생이며 현재 염치읍 대동리 만전당 경전각은 홍가신의 후손들이 홍가신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그 후손에 따르면 족보상에 홍가신은 직계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하면 목상은 16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목상은 후세에 몇 차례 개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역사가 오래된 이 목상 역시 안타깝게도 2004년 12월 홍가신사당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소실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5년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2006년 3월 15일 홍가신사당 안에 기존의 목상을 모태로 새로 조각하여 원 위치에 새롭게 모셔 놓았지만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사당 내부의 신상과 위패 위치는 예전과 같다.

한편 1980년대 초 홍성군에서는 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을 산 아래로 옮기고자 하였다. 즉 산 중턱에 있는 산해암(山海庵)을 지나 홍성읍 월산리 방향으로 내려오면 산 아래에 평편한 곳이 나온다. 이곳에 새롭게 홍가신사당을 짓고 다섯 분의 위패를 모셨다. 백월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0월 홍주문화제 때 치러지는 ‘홍가신제’에 군수를 비롯하여 제의 참여자들이 산 정상에 올라야 하는데 산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사당을 산 아래로 옮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홍성의 주산(主山)으로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의미가 상실된다는 반대에 부딪혀 산 정상에 있는 홍가신사당은 그대로 둔 채 새로 지은 사당에 다섯 분의 위패만 새롭게 제작하여 몇 해 모시다가 지금은 새로 지은 사당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그 이후 백월산 동쪽 능선을 따라 찻길을 내어 현재는 산 정상까지 차가 오르고 있다.
유래1596년(선조 29)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주목사 홍가신과 그 외의 청난공신 등 모두 다섯 분의 높은 위업을 기리는 데서 유래한다. 즉 홍가신 목사가 선정을 베풀고 홍주를 떠난 이후 홍주읍성에는 각종 질병이 해마다 끊이지 않는 등 괴변이 잇달아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고 그를 사모하는 뜻에서 홍주의 주산(主山)인 백월산에 홍가신의 목상을 세우고 성 안의 사람들이 해마다 제를 지냄으로써 각종 질병이 사라지고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이에 따라 홍주목사 홍가신을 비롯하여 무장(武將)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수사 최호(崔湖) 등 청난공신과 함께 ‘백월산신(白月山神)’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홍가신사당에 대한 기록은 청난비(淸難碑)와 건물의 중수(重修)를 기록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청난비는 1641년(인조 19)에 김광현(金光鉉, 1584~1647)이 걸립하였으며 홍성에서 예산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청난비에 기록된 [사당](/topic/사당)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公)이 돌아가신 지 벌써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의 충정은 더욱 빛난다. 홍주 사람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니, 백월산의 양지쪽에다 소나무 [기둥](/topic/기둥)에 잣나무 판자 신령 앞에 제기를 늘어놓으니 [가지](/topic/가지)는 붉고, 파초열매는 누렇더라.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홍주정난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만력(萬歷) 46년 무오(戊午) 1618년(광해군 10)에 창건하고 광서(光緖) 12년 병술(丙戌) 1886년 2월 15일(고종 23)에 중수하였다. 그 이후 기사(己巳)(1929년)과 갑인(甲寅, 1974년) 3월 27일에 각각 중수하고 2004년 12월 원인모를 화재로 인해 2006년 3월 15일 사당을 새롭게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래1596년(선조 29)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주목사 홍가신과 그 외의 청난공신 등 모두 다섯 분의 높은 위업을 기리는 데서 유래한다. 즉 홍가신 목사가 선정을 베풀고 홍주를 떠난 이후 홍주읍성에는 각종 질병이 해마다 끊이지 않는 등 괴변이 잇달아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고 그를 사모하는 뜻에서 홍주의 주산(主山)인 백월산에 홍가신의 목상을 세우고 성 안의 사람들이 해마다 제를 지냄으로써 각종 질병이 사라지고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이에 따라 홍주목사 홍가신을 비롯하여 무장(武將)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수사 최호(崔湖) 등 청난공신과 함께 ‘백월산신(白月山神)’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홍가신사당에 대한 기록은 청난비(淸難碑)와 건물의 중수(重修)를 기록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청난비는 1641년(인조 19)에 김광현(金光鉉, 1584~1647)이 걸립하였으며 홍성에서 예산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청난비에 기록된 [사당](/topic/사당)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公)이 돌아가신 지 벌써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의 충정은 더욱 빛난다. 홍주 사람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니, 백월산의 양지쪽에다 소나무 [기둥](/topic/기둥)에 잣나무 판자 신령 앞에 제기를 늘어놓으니 [가지](/topic/가지)는 붉고, 파초열매는 누렇더라.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홍주정난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만력(萬歷) 46년 무오(戊午) 1618년(광해군 10)에 창건하고 광서(光緖) 12년 병술(丙戌) 1886년 2월 15일(고종 23)에 중수하였다. 그 이후 기사(己巳)(1929년)과 갑인(甲寅, 1974년) 3월 27일에 각각 중수하고 2004년 12월 원인모를 화재로 인해 2006년 3월 15일 사당을 새롭게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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