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성호신당 상량문

한국무속신앙사전
홍성군 결성면 성호리 성호신당의 상량문 및 중수기로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현종 12) 한량 신계복(申啓福)이 썼고, 「성호신당중수기」는 1851년(철종 2)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김낙흥(金洛興)이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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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결성면 성호리 성호신당의 상량문 및 중수기로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현종 12) 한량 신계복(申啓福)이 썼고, 「성호신당중수기」는 1851년(철종 2)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김낙흥(金洛興)이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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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정의홍성군 결성면 성호리 성호신당의 상량문 및 중수기로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현종 12) 한량 신계복(申啓福)이 썼고, 「성호신당중수기」는 1851년(철종 2)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김낙흥(金洛興)이 기록한 것이다.
정의홍성군 결성면 성호리 성호신당의 상량문 및 중수기로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현종 12) 한량 신계복(申啓福)이 썼고, 「성호신당중수기」는 1851년(철종 2)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김낙흥(金洛興)이 기록한 것이다.
내용성호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풍어와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제를 성호신당에서 지내왔다. 이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 신당에 비가 새고 무너져 내려 중수하면서 [마을](/topic/마을)의 번성을 기원한 일종의 [축문](/topic/축문)원이다. 한량 신계복이 쓴 이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성호리 당제의 역사와 신격의 특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상량문에 따르면 성호리에서는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사당](/topic/사당)을 짓고 화상을 그려 [봉안](/topic/봉안)해 왔었으며, 신격은 큰 배와 작은 배를 통솔하는 해신(海神)으로서 혜풍감우(惠豊甘雨)와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주관하는 영험한 신이었다. 이 상량문이 지어지던 때인 17세기 후반에도 이미 여러 세대가 지났다고 하였으므로 성호리 당제는 조선 전기부터 전승되어 온 동제임을 시사한다.

한편 1671년 수리된 성호신당은 이후 180년 뒤에 다시 중수되는데, 그 기록이 바로 1851년 6월 하순에 공사를 마치고 김낙흥이 기록한 「성호신당중수기」이다. 이 중수기에는 신당이 [기와](/topic/기와)가 오래되고 [기둥](/topic/기둥)이 썩어 갑자기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이해 봄에 수리를 결의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니 모두들 협조하여 3월에 착공하여 [서까래](/topic/서까래)와 재목은 하나같이 새로 깎고 다듬었으며, 칸수는 옛날과 같았지만 우뚝 솟은 [난간](/topic/난간)과 빛나는 [단청](/topic/단청)은 옛날과 비교하면 자못 볼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중수기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봉안된 신격의 변화 문제이다. 즉 “이 당은 [장군](/topic/장군)과 부인의 두 신상을 모신 곳인데 무릇 서해바다의 수운을 관장하는 신이다”라고 하여 봉안된 장군 부부는 1671년 당시와 다른 것으로, 이후 어느 시점엔가 성호신당에 봉안된 풍어의 신이 ‘신당지신’에서 ‘장군 부부’로 대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중수기에 등장하는 장군과 부인의 화상은 [임경업 장군](/topic/임경업장군)(1594~1646) 부부로 1970년대 초까지도 성호신당에 걸려 있던 화상은 임경업 장군 내외였고, 그런 까닭에 속칭 ‘임장군당’으로 불리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성호리 신당에 모셔졌던 원래의 풍우해신은 18세기 이후 임경업 장군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격의 변화는 조선 후기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저명한 포구촌으로 손꼽혔던 성호리에서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가 성행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1851년 중수된 이후 성호신당은 1970년대 초반 도괴된 이후 다시 건립되지 못했다. 어촌의 급속한 쇠락과 더불어 풍어를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당제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내용성호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풍어와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제를 성호신당에서 지내왔다. 이 「성호신당상량문」은 1671년 신당에 비가 새고 무너져 내려 중수하면서 [마을](/topic/마을)의 번성을 기원한 일종의 [축문](/topic/축문)원이다. 한량 신계복이 쓴 이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성호리 당제의 역사와 신격의 특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상량문에 따르면 성호리에서는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사당](/topic/사당)을 짓고 화상을 그려 [봉안](/topic/봉안)해 왔었으며, 신격은 큰 배와 작은 배를 통솔하는 해신(海神)으로서 혜풍감우(惠豊甘雨)와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주관하는 영험한 신이었다. 이 상량문이 지어지던 때인 17세기 후반에도 이미 여러 세대가 지났다고 하였으므로 성호리 당제는 조선 전기부터 전승되어 온 동제임을 시사한다.

한편 1671년 수리된 성호신당은 이후 180년 뒤에 다시 중수되는데, 그 기록이 바로 1851년 6월 하순에 공사를 마치고 김낙흥이 기록한 「성호신당중수기」이다. 이 중수기에는 신당이 [기와](/topic/기와)가 오래되고 [기둥](/topic/기둥)이 썩어 갑자기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이해 봄에 수리를 결의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니 모두들 협조하여 3월에 착공하여 [서까래](/topic/서까래)와 재목은 하나같이 새로 깎고 다듬었으며, 칸수는 옛날과 같았지만 우뚝 솟은 [난간](/topic/난간)과 빛나는 [단청](/topic/단청)은 옛날과 비교하면 자못 볼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중수기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봉안된 신격의 변화 문제이다. 즉 “이 당은 [장군](/topic/장군)과 부인의 두 신상을 모신 곳인데 무릇 서해바다의 수운을 관장하는 신이다”라고 하여 봉안된 장군 부부는 1671년 당시와 다른 것으로, 이후 어느 시점엔가 성호신당에 봉안된 풍어의 신이 ‘신당지신’에서 ‘장군 부부’로 대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중수기에 등장하는 장군과 부인의 화상은 [임경업 장군](/topic/임경업장군)(1594~1646) 부부로 1970년대 초까지도 성호신당에 걸려 있던 화상은 임경업 장군 내외였고, 그런 까닭에 속칭 ‘임장군당’으로 불리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성호리 신당에 모셔졌던 원래의 풍우해신은 18세기 이후 임경업 장군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격의 변화는 조선 후기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저명한 포구촌으로 손꼽혔던 성호리에서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가 성행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1851년 중수된 이후 성호신당은 1970년대 초반 도괴된 이후 다시 건립되지 못했다. 어촌의 급속한 쇠락과 더불어 풍어를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당제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의의「성호신당상량문」과 「중수기」는 조선 후기 서해안 당제의 역사와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로, 18세기 이후 서해안 일대에서 ‘조기의 신’으로 급속히 부상하는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이 신격화되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topic/사료)이다. 또한 이를 통해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에 임장군의 조력(助力)이 성패를 가름했다고 믿었던 임경업 장군이 당제의 신격으로 부상한 시기가 알려진 것보다 빠른 시기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참고문헌한국수산지 (농상공부수산국, 1910)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 3-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
조선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강성복,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0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07)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의의「성호신당상량문」과 「중수기」는 조선 후기 서해안 당제의 역사와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로, 18세기 이후 서해안 일대에서 ‘조기의 신’으로 급속히 부상하는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이 신격화되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topic/사료)이다. 또한 이를 통해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에 임장군의 조력(助力)이 성패를 가름했다고 믿었던 임경업 장군이 당제의 신격으로 부상한 시기가 알려진 것보다 빠른 시기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참고문헌한국수산지 (농상공부수산국, 1910)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 3-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
조선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강성복,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0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07)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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