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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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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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병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내용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그 시기가 2월이어서 기상이 악화되면 도민들의 고통이 매우 컸으며, 심할 때는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1470년(성종 1) 당시 제주목사 이약동은 도민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이곳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다.

제주시 아라동 375-1[번지](/topic/번지) 외 5필지 안에는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곰솔[黑松]나무와 함께 그 부근의 지명이 되어 불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신제의 제단이 있다. 산천단은 한라산신제 외에도 산천제, 포신제(酺神祭), 기우제 등 오랜 시대에 걸친 제사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소림천(小林泉), 소림과원(小林果園), 소림사(小林寺) 고송(古松)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소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곰솔만 일부 남아 있다.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이약동 목사 한라산신단 기적비(紀蹟碑) 등이 서 있다.

원래 이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비(漢拏山神墠碑)가 있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다.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들은 조선 말기 이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만 이 비들도 중간에 없어진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그 뒤 1989년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중](/topic/문중)회가 공동으로 제휘하여 추진한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이 새로 건립되었다.

산천단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에서 한라산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제주읍지(濟州邑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록(耽羅錄)』,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사묘조(祠廟條)에 “산천단은 남문 밖 15리쯤 아라리(我羅里) 지경에 있으니 담당관원은 4인이다. 한라산 산신제(山神祭)를 봉행하는 장소이다. 1470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재임 시 이곳에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山川壇 我羅里境 直四人 漢拏山神祭 舊時 山頂致祭 人多凍死 成宗元年 牧師 李約東 創建 今廢)”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라산신제의 [제관](/topic/제관)(祭官)은 [초헌](/topic/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향(奉香), 봉로(奉爐),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작(奠爵), 전사관(典司官)으로 구성된다. [축문](/topic/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正月朔日 獻官○○○
敢昭告于
漢拏山神 惟此山川 有神靈明
自古設壇 歲祀已久 今擇吉日
依舊明煙 惟

神監顧
大韓民國奠我地 安玆居民 辟邪進慶 三災八難
官災口舌
疾病盜賊 永爲消滅
大韓民國 國泰民安 各自所願
意得成功 謹以淸酌 牲幣
祗薦于神 尙饗

제례(祭禮) 절차는 다음과 같다. 초헌관이 신위전에 폐백을 올리고(전폐례), 첫 잔을 올리고 축문을 받아드린 후 꿇어앉는다(초헌례). 대축이 초헌관을 대신해 축을 고한다([독축](/topic/독축)). 이때 제관 모두 굴복한다. 아헌례와 종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신위전에 꿇어앉아 집사가 내려주는 술과 안주를 받아 마신다([음복](/topic/음복)례). 대축에 들어가 변과두를 거둔다(철변두). 다음에는 [헌관](/topic/헌관)을 비롯한 참여자 전원이 사배한다. 대축은 폐백과 축 등을 거두어 망료위에 나가 불사른다(망료). 이때 초헌관도 함께 배석한다.

한라산신제 봉행 과정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탐라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축년(1841) 7월 초 4일에 한라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주(州)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돌담](/topic/돌담)으로 두른 묘(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topic/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어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포신묘(酺神廟)에 대해서는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 사묘조(四廟條)에 “포신묘는 소림 과원 안에 있다(酺神廟 在小林果園中)”고 하였고, 조선 정조대에 발행된 『제주읍지』에는 “포신단은 산천단 아래에 있다(酺神段 在山川壇下)”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나온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포신묘는 옛날 소림 과원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한라산신묘 옆으로 옮겨 세웠다(酺神廟 舊在小林果園中 今移建于漢拏山神廟傍)”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포신묘는 사람과 사물에게 닥친 재해(災害)를 신에게 빌어 액을 막고 복을 빌던 제단으로, 오늘날의 포제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은 남쪽 끝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이며, [진산](/topic/진산)(鎭山)이요, 신령한 산이다. 운공(雲空)에 맞닿아 백령(百靈)이 머무는 곳으로 모든 산악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한라산에 제사하는 산천제(山川祭)는 산의 백령을 위하는 산신제이자 하늘을 여는 천신제의 의미를 지닌다. 한라산신은 천신의 권능을 빌려 탐라 백성들을 지켜 주는 산신이자 천기(天氣)를 관장하고 하늘의 기운과 풍운뇌우를 조절하는 천신(天神), 탐라 백성을 지켜 주는 한라산신으로서는 전염병의 재앙을 막아주는 신, 탐라 백성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 곡식의 풍요와 [가축](/topic/가축)의 번성을 지켜 주는 이사지신(里社之神)이자 포신(酺神)이다.

즉 한라산신은 탐라국과 탐라 백성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시켜 주고, 전염병에서 건강을 지켜 주는 치병의 신이며, 3재인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막아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이다. 한라산신은 풍우를 조절하여 태풍과 장마를 막아 주며, 축산 번성과 농사의 풍요를 가져오는 산천신․풍운뇌우신․포신의 기능을 하는 신(神)이다.
참고문헌제주도부락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1996)
제주의 민속 (제주도, 1998)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제주도, 1998)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제주도 본향당신앙과 본풀이 (문무병, 민속원, 2008)
아라동지 (아라동지편찬위원회, 2008)
화산섬, 제주문화재탐방 (제주문화예술재단, 2009)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 2010)
내용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그 시기가 2월이어서 기상이 악화되면 도민들의 고통이 매우 컸으며, 심할 때는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1470년(성종 1) 당시 제주목사 이약동은 도민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이곳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다.

제주시 아라동 375-1[번지](/topic/번지) 외 5필지 안에는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곰솔[黑松]나무와 함께 그 부근의 지명이 되어 불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신제의 제단이 있다. 산천단은 한라산신제 외에도 산천제, 포신제(酺神祭), 기우제 등 오랜 시대에 걸친 제사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소림천(小林泉), 소림과원(小林果園), 소림사(小林寺) 고송(古松)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소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곰솔만 일부 남아 있다.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이약동 목사 한라산신단 기적비(紀蹟碑) 등이 서 있다.

원래 이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비(漢拏山神墠碑)가 있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다.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들은 조선 말기 이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만 이 비들도 중간에 없어진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그 뒤 1989년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중](/topic/문중)회가 공동으로 제휘하여 추진한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이 새로 건립되었다.

산천단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에서 한라산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제주읍지(濟州邑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록(耽羅錄)』,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사묘조(祠廟條)에 “산천단은 남문 밖 15리쯤 아라리(我羅里) 지경에 있으니 담당관원은 4인이다. 한라산 산신제(山神祭)를 봉행하는 장소이다. 1470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재임 시 이곳에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山川壇 我羅里境 直四人 漢拏山神祭 舊時 山頂致祭 人多凍死 成宗元年 牧師 李約東 創建 今廢)”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라산신제의 [제관](/topic/제관)(祭官)은 [초헌](/topic/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향(奉香), 봉로(奉爐),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작(奠爵), 전사관(典司官)으로 구성된다. [축문](/topic/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正月朔日 獻官○○○
敢昭告于
漢拏山神 惟此山川 有神靈明
自古設壇 歲祀已久 今擇吉日
依舊明煙 惟

神監顧
大韓民國奠我地 安玆居民 辟邪進慶 三災八難
官災口舌
疾病盜賊 永爲消滅
大韓民國 國泰民安 各自所願
意得成功 謹以淸酌 牲幣
祗薦于神 尙饗

제례(祭禮) 절차는 다음과 같다. 초헌관이 신위전에 폐백을 올리고(전폐례), 첫 잔을 올리고 축문을 받아드린 후 꿇어앉는다(초헌례). 대축이 초헌관을 대신해 축을 고한다([독축](/topic/독축)). 이때 제관 모두 굴복한다. 아헌례와 종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신위전에 꿇어앉아 집사가 내려주는 술과 안주를 받아 마신다([음복](/topic/음복)례). 대축에 들어가 변과두를 거둔다(철변두). 다음에는 [헌관](/topic/헌관)을 비롯한 참여자 전원이 사배한다. 대축은 폐백과 축 등을 거두어 망료위에 나가 불사른다(망료). 이때 초헌관도 함께 배석한다.

한라산신제 봉행 과정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탐라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축년(1841) 7월 초 4일에 한라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주(州)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돌담](/topic/돌담)으로 두른 묘(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topic/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어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포신묘(酺神廟)에 대해서는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 사묘조(四廟條)에 “포신묘는 소림 과원 안에 있다(酺神廟 在小林果園中)”고 하였고, 조선 정조대에 발행된 『제주읍지』에는 “포신단은 산천단 아래에 있다(酺神段 在山川壇下)”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나온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포신묘는 옛날 소림 과원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한라산신묘 옆으로 옮겨 세웠다(酺神廟 舊在小林果園中 今移建于漢拏山神廟傍)”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포신묘는 사람과 사물에게 닥친 재해(災害)를 신에게 빌어 액을 막고 복을 빌던 제단으로, 오늘날의 포제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은 남쪽 끝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이며, [진산](/topic/진산)(鎭山)이요, 신령한 산이다. 운공(雲空)에 맞닿아 백령(百靈)이 머무는 곳으로 모든 산악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한라산에 제사하는 산천제(山川祭)는 산의 백령을 위하는 산신제이자 하늘을 여는 천신제의 의미를 지닌다. 한라산신은 천신의 권능을 빌려 탐라 백성들을 지켜 주는 산신이자 천기(天氣)를 관장하고 하늘의 기운과 풍운뇌우를 조절하는 천신(天神), 탐라 백성을 지켜 주는 한라산신으로서는 전염병의 재앙을 막아주는 신, 탐라 백성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 곡식의 풍요와 [가축](/topic/가축)의 번성을 지켜 주는 이사지신(里社之神)이자 포신(酺神)이다.

즉 한라산신은 탐라국과 탐라 백성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시켜 주고, 전염병에서 건강을 지켜 주는 치병의 신이며, 3재인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막아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이다. 한라산신은 풍우를 조절하여 태풍과 장마를 막아 주며, 축산 번성과 농사의 풍요를 가져오는 산천신․풍운뇌우신․포신의 기능을 하는 신(神)이다.
참고문헌제주도부락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1996)
제주의 민속 (제주도, 1998)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제주도, 1998)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제주도 본향당신앙과 본풀이 (문무병, 민속원, 2008)
아라동지 (아라동지편찬위원회, 2008)
화산섬, 제주문화재탐방 (제주문화예술재단, 2009)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 2010)
역사탐라국에서 비롯된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이 해체되는 고려 숙종 10년(1105)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라산신제 장소는 제사를 지내는 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라산 정상 북벽이었다. 고려 고종 40년(1253) 10월 무신(戊申)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8년(1418) 4월 11일 신묘(辛卯)에 [예조](/topic/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 [석전](/topic/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제주목사(濟州牧使)가 한라산신제 장소를 한라산 정상에서 산천단(山川壇)으로 옮겨와서 거행하였다. 봄과 가을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마다 제사를 올리러 간 제주도민들 가운데 얼어 죽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선조 34년(1601)에는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1601년에 제주도 지역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김상헌은 제주도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정성으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숙종 29년(1703)에는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제주목사의 치계를 바탕으로 한라산신제를 의논하였는데, 치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례의』를 살펴보니 주현(州縣)에서는 사직 문선왕 포제(酺祭), 여제(厲祭), 영제(禜祭)만 제사한다 했습니다. 주현에서 풍운뇌우의 제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장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성종 5년(1474)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찬성(纂成)하며 한라산신제가 [사전](/topic/사전)에 기록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명산대천에 제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사전에 등록하고 [치악산](/topic/치악산)․계룡산의 제례와 [축문](/topic/축문)식에 따라 정월․이월․칠월에 제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신제는 사전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정조 17년(1793) 11월 24일 계축(癸丑)에는 제주어사 심낙수(沈樂洙, 1739~?)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주현 명산대천의(州縣 名山大川儀)’에 의거하여 한라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순조 원년(1801) 8월 1일 을사(乙巳)에는 한라산신제와 풍운뇌우제의 향과 축문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난파해 향과 축문 모두 바다에서 유실되었으므로 다시 급히 내려주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들 [사료](/topic/사료)를 통해 한라산신제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헌종 7년(1841) 7월 초나흗날에 한라산신제를 거행했다. 제주목사는 향과 축문이 중앙에서 내려오자 좌수․유생들과 함께 치제하였으며, [돌담](/topic/돌담)을 두른 묘(廟)가 있어 그곳에 신패(神牌)를 [봉안](/topic/봉안)하고 옆에는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topic/마을) 주민에 의해 부활돼 유지돼 오다 2009년부터 아라동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계승해 봉행하고 있다.
역사탐라국에서 비롯된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이 해체되는 고려 숙종 10년(1105)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라산신제 장소는 제사를 지내는 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라산 정상 북벽이었다. 고려 고종 40년(1253) 10월 무신(戊申)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8년(1418) 4월 11일 신묘(辛卯)에 [예조](/topic/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 [석전](/topic/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제주목사(濟州牧使)가 한라산신제 장소를 한라산 정상에서 산천단(山川壇)으로 옮겨와서 거행하였다. 봄과 가을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마다 제사를 올리러 간 제주도민들 가운데 얼어 죽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선조 34년(1601)에는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1601년에 제주도 지역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김상헌은 제주도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정성으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숙종 29년(1703)에는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제주목사의 치계를 바탕으로 한라산신제를 의논하였는데, 치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례의』를 살펴보니 주현(州縣)에서는 사직 문선왕 포제(酺祭), 여제(厲祭), 영제(禜祭)만 제사한다 했습니다. 주현에서 풍운뇌우의 제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장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성종 5년(1474)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찬성(纂成)하며 한라산신제가 [사전](/topic/사전)에 기록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명산대천에 제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사전에 등록하고 [치악산](/topic/치악산)․계룡산의 제례와 [축문](/topic/축문)식에 따라 정월․이월․칠월에 제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신제는 사전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정조 17년(1793) 11월 24일 계축(癸丑)에는 제주어사 심낙수(沈樂洙, 1739~?)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주현 명산대천의(州縣 名山大川儀)’에 의거하여 한라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순조 원년(1801) 8월 1일 을사(乙巳)에는 한라산신제와 풍운뇌우제의 향과 축문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난파해 향과 축문 모두 바다에서 유실되었으므로 다시 급히 내려주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들 [사료](/topic/사료)를 통해 한라산신제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헌종 7년(1841) 7월 초나흗날에 한라산신제를 거행했다. 제주목사는 향과 축문이 중앙에서 내려오자 좌수․유생들과 함께 치제하였으며, [돌담](/topic/돌담)을 두른 묘(廟)가 있어 그곳에 신패(神牌)를 [봉안](/topic/봉안)하고 옆에는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topic/마을) 주민에 의해 부활돼 유지돼 오다 2009년부터 아라동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계승해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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