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해창마을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 해창[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모시는 마을공동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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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 해창[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모시는 마을공동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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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숙
정의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 해창[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모시는 마을공동제의.
정의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 해창[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모시는 마을공동제의.
내용당제를 모시기 위한 [제관](/topic/제관)은 해창리 개발위원 여섯 명과 이장이 모여 선정한다. 대략 정월 초사흗날이면 제관이 결정된다. 이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제관을 ‘당주’라고 부른다. 제관은 60세 이상의 마을 사람 가운데 생년월일과 제일을 맞추어 부정이 없는 깨끗한 여성으로 가려 뽑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하여 올리는 제의이기 때문에 제일 당일에는 들일을 하지 않고, [마당](/topic/마당)에 [세탁](/topic/세탁)물도 널지 않으며, 가무(歌舞)를 삼가고, 이웃끼리 언쟁도 하지 않는 등 모두가 근신한다. 특히 제관들은 아침 일찍 목욕을 하고, 제를 마칠 때까지 언행을 삼간다.

제일 오전에 제관은 6.6㎡ 남짓한 당집 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밝히고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당주는 가장 먼저 당각시를 목욕시킨다. 전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새로 조각하여 앉힌 당각시를 물수건으로 머리로부터 깨끗이 닦아 내린다. 당제 제관이 여자인 이유가 당신인 당각시를 목욕시켜 드리는 것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간혹 시험이나 취직 등 자식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당각시를 목욕시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당 주위에는 목욕시켜 드린 수건이 수북이 쌓여 있다. 청소할 때 당주가 그 수건들을 밖으로 [가지](/topic/가지)고 나오면 당주의 남편이 마당에서 이 수건을 불태운다.

제의 시간이 되면 당주의 남편과 보조원들은 당주인 제관이 장만한 제물과 제기, 필요한 물건들을 마을 위 산자락에 자리한 당집으로 옮긴다.

당제를 모시기 전에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낸다. 거리제 제물은 제청에서 장만하되 매우 간소하게 현장에서 끓인 미역국과 메를 올린다. 메는 솥째 차려 놓고 술, 통돼지 한 마리 등만 짚을 깔고 땅바닥에 차린다. 그러나 당제는 많은 음식을 진설하기 때문에 더욱 정성을 기울인다. 당제 음식을 장만하는 당주의 사립에는 [금줄](/topic/금줄)을 쳐 놓고서 외부인의 접근을 금한다. 이는 부정한 사람,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다. 국과 메를 비롯하여 구운 생선, 거리제터에서 잡은 돼지의 목살, 나물, 식혜, 세 가지 과일인 [사과](/topic/사과)․배․[딸기](/topic/딸기), 포를 당 안에 차리고 향을 사른 뒤 제주를 올린다. 일 년 만에 바치는 음식을 맛있게 드시라는 뜻에서 수저를 밥그릇에 꽂고 젓가락은 생선 위에 올려놓는다.

제물을 진설하면 이어서 당주인 제관은 당각시에게 온절 두 번과 반절 두 번을 하고 손을 모아 구축을 한다. 구축은 “당각시님, 차린 것은 부족해도 많이 드시고, 어쩌든지 우리 해창리 주민들 병 없이 올 한 해도 잘살고, 타관에 나가 있는 동네 사람들도 모두 아무 탈 없이 하는 일들 성공시켜 주십시오. 비나이다!”라고 한다. 모든 제의를 마치면 촛불과 음식을 그대로 두고 모두 집으로 간다. 이처럼 당제는 여자 제관을 중심으로 거리제와는 별도로 마[무리](/topic/무리)된다.

당제를 지낸 이튿날에는 마을 사람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총회 겸 잔치를 연다. 남은 비용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거나 [윷놀이](/topic/윷놀이)를 한다. 전에는 집집마다 돌면서 [농악](/topic/농악)을 쳤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마을총회에서 지난해의 마을 [살림살이](/topic/살림살이)를 결산하고 새해 사업을 의결한다. 품삯 조정도 이날 협의하여 일 년 동안 적용시킨다.

옛날에는 마을의 공동체 질서와 도덕에 위배되는 마을 구성원을 징계하는 절차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때 불효자나 도벽이 심한 자에게 ‘[덕석](/topic/덕석)몰이’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총회의 모든 내용은 기록되어 ‘동안(同案)’이라는 문서철로 남겨진다. 진도의 마을마다 보존해 오던 ‘동안’은 거의 멸실되었으나 해창리는 1915년부터 시작된 동계안을 마을 총무가 보관하고 있다.
특징 및 의의해창[마을](/topic/마을)당제는 작지만 [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품위를 갖춘 당집이라든지 [대문](/topic/대문) 전변에 커다랗게 그린 오색 태극그림과 여자가 [제관](/topic/제관)이라는 점 등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옛날 큰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로서 안전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배의 선장실에 오색실이나 [오색천](/topic/오색천)을 함께 넣어 모시는 배서낭과 그 신체(神體)가 젊은 여성인 점은 이 마을의 당신을 당할머니가 아닌 ‘당각시’로 부르는 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당제가 예전에 비해 오늘날에는 눈에 띄게 축소되고, 제의 성격 역시 퇴색되었다고 해창마을 사람들은 우려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소포만 [간척](/topic/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없어졌기 때문에 제의 대상과 종교적 신심이 약해진 것이 우선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제를 모시기 위해 여러 [가지](/topic/가지)를 근신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서로 제관을 맡지 않으려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점도 또 다른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 자산이 2,000만 원이 넘고,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출향 향우들까지 무사안위과 제액을 기원하는 제의로 확대되고 있으며, 마을 사람 모두가 단합하여 제를 지내고 있고, 이를 앞으로도 계속 지내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현재적 민간신앙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진도군의 [마을](/topic/마을)굿 (나경수 외, 민속원, 2007)
내용당제를 모시기 위한 [제관](/topic/제관)은 해창리 개발위원 여섯 명과 이장이 모여 선정한다. 대략 정월 초사흗날이면 제관이 결정된다. 이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제관을 ‘당주’라고 부른다. 제관은 60세 이상의 마을 사람 가운데 생년월일과 제일을 맞추어 부정이 없는 깨끗한 여성으로 가려 뽑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하여 올리는 제의이기 때문에 제일 당일에는 들일을 하지 않고, [마당](/topic/마당)에 [세탁](/topic/세탁)물도 널지 않으며, 가무(歌舞)를 삼가고, 이웃끼리 언쟁도 하지 않는 등 모두가 근신한다. 특히 제관들은 아침 일찍 목욕을 하고, 제를 마칠 때까지 언행을 삼간다.

제일 오전에 제관은 6.6㎡ 남짓한 당집 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밝히고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당주는 가장 먼저 당각시를 목욕시킨다. 전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새로 조각하여 앉힌 당각시를 물수건으로 머리로부터 깨끗이 닦아 내린다. 당제 제관이 여자인 이유가 당신인 당각시를 목욕시켜 드리는 것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간혹 시험이나 취직 등 자식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당각시를 목욕시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당 주위에는 목욕시켜 드린 수건이 수북이 쌓여 있다. 청소할 때 당주가 그 수건들을 밖으로 [가지](/topic/가지)고 나오면 당주의 남편이 마당에서 이 수건을 불태운다.

제의 시간이 되면 당주의 남편과 보조원들은 당주인 제관이 장만한 제물과 제기, 필요한 물건들을 마을 위 산자락에 자리한 당집으로 옮긴다.

당제를 모시기 전에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낸다. 거리제 제물은 제청에서 장만하되 매우 간소하게 현장에서 끓인 미역국과 메를 올린다. 메는 솥째 차려 놓고 술, 통돼지 한 마리 등만 짚을 깔고 땅바닥에 차린다. 그러나 당제는 많은 음식을 진설하기 때문에 더욱 정성을 기울인다. 당제 음식을 장만하는 당주의 사립에는 [금줄](/topic/금줄)을 쳐 놓고서 외부인의 접근을 금한다. 이는 부정한 사람,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다. 국과 메를 비롯하여 구운 생선, 거리제터에서 잡은 돼지의 목살, 나물, 식혜, 세 가지 과일인 [사과](/topic/사과)․배․[딸기](/topic/딸기), 포를 당 안에 차리고 향을 사른 뒤 제주를 올린다. 일 년 만에 바치는 음식을 맛있게 드시라는 뜻에서 수저를 밥그릇에 꽂고 젓가락은 생선 위에 올려놓는다.

제물을 진설하면 이어서 당주인 제관은 당각시에게 온절 두 번과 반절 두 번을 하고 손을 모아 구축을 한다. 구축은 “당각시님, 차린 것은 부족해도 많이 드시고, 어쩌든지 우리 해창리 주민들 병 없이 올 한 해도 잘살고, 타관에 나가 있는 동네 사람들도 모두 아무 탈 없이 하는 일들 성공시켜 주십시오. 비나이다!”라고 한다. 모든 제의를 마치면 촛불과 음식을 그대로 두고 모두 집으로 간다. 이처럼 당제는 여자 제관을 중심으로 거리제와는 별도로 마[무리](/topic/무리)된다.

당제를 지낸 이튿날에는 마을 사람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총회 겸 잔치를 연다. 남은 비용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거나 [윷놀이](/topic/윷놀이)를 한다. 전에는 집집마다 돌면서 [농악](/topic/농악)을 쳤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마을총회에서 지난해의 마을 [살림살이](/topic/살림살이)를 결산하고 새해 사업을 의결한다. 품삯 조정도 이날 협의하여 일 년 동안 적용시킨다.

옛날에는 마을의 공동체 질서와 도덕에 위배되는 마을 구성원을 징계하는 절차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때 불효자나 도벽이 심한 자에게 ‘[덕석](/topic/덕석)몰이’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총회의 모든 내용은 기록되어 ‘동안(同案)’이라는 문서철로 남겨진다. 진도의 마을마다 보존해 오던 ‘동안’은 거의 멸실되었으나 해창리는 1915년부터 시작된 동계안을 마을 총무가 보관하고 있다.
특징 및 의의해창[마을](/topic/마을)당제는 작지만 [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품위를 갖춘 당집이라든지 [대문](/topic/대문) 전변에 커다랗게 그린 오색 태극그림과 여자가 [제관](/topic/제관)이라는 점 등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옛날 큰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로서 안전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배의 선장실에 오색실이나 [오색천](/topic/오색천)을 함께 넣어 모시는 배서낭과 그 신체(神體)가 젊은 여성인 점은 이 마을의 당신을 당할머니가 아닌 ‘당각시’로 부르는 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당제가 예전에 비해 오늘날에는 눈에 띄게 축소되고, 제의 성격 역시 퇴색되었다고 해창마을 사람들은 우려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소포만 [간척](/topic/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없어졌기 때문에 제의 대상과 종교적 신심이 약해진 것이 우선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제를 모시기 위해 여러 [가지](/topic/가지)를 근신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서로 제관을 맡지 않으려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점도 또 다른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 자산이 2,000만 원이 넘고,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출향 향우들까지 무사안위과 제액을 기원하는 제의로 확대되고 있으며, 마을 사람 모두가 단합하여 제를 지내고 있고, 이를 앞으로도 계속 지내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현재적 민간신앙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진도군의 [마을](/topic/마을)굿 (나경수 외, 민속원, 2007)
역사해창[마을](/topic/마을)은 진도읍사무소에서 서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 때 시행한 고작리(庫作里) [간척](/topic/간척)사업 이전부터 병기창과 식량창고가 있던 진도의 해상관문이었다. 이곳이 번성한 때에는 200가구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38가구 42세대 109명이 살고 있다. 주요 성씨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경주 정씨(慶州 鄭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원주 이씨(原州 李氏), 현풍 곽씨(玄風 郭氏), 양천 허씨(陽川 許氏), 인동 장씨(仁同 張氏), 진주 강씨(晉州 姜氏), 경주 박씨(慶州 朴氏), 경주 채씨(慶州 蔡氏) 등이다. 간척사업 이후 주민들은 모두 [농업](/topic/농업)에 종사하여 벼, 구기자, 대파, 월동[배추](/topic/배추)를 경작하며 농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마을 주민이면 3만 원을 내고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되는 상도계(喪徒契)가 있다. 상도계에서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상여소리를 하고 출상을 한다. 이 상도계는 1961년부터 동정계(同情契)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해창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거리제](/topic/거리제)와 함께 당집에서 당제를 지내고 있다. 당제는 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다. 당집은 한 칸으로 되어 있어 여느 마을의 당집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당집 주변은 [돌담](/topic/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입구에는 양쪽과 가운데에 세 개의 돌[기둥](/topic/기둥)이 세워져 있어 들어오고 나가는 문 구실을 한다. 입구에서 당집까지 1m 남짓한 거리이고 바닥은 돌과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당집 외부는 돌기둥을 세워 벽면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고, 정면은 나무 재질의 문이 달려 있다. 제를 모시지 않는 평소에는 이 출입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다. [지붕](/topic/지붕)은 [기와](/topic/기와)를 얹었으며, 지붕 위는 풀이 덮여 있어 당집 옆의 큰 이팝나무 및 주변 대나무숲과 하나된 모습으로 고즈넉하다. 당집 출입문에는 태극문양이 오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서까래](/topic/서까래)와 도리 역시 오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여느 마을의 당집과는 달리 독특한 멋을 풍기며 고풍스러워 아름답기까기하다. 당집 내부에는 대리석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할머니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당신(堂神)’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제단 위에는 [향로](/topic/향로)와 [촛대](/topic/촛대)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당을 ‘할머니당’이라고 부른다. 이는 당신의 신격이 여성이고, 여자를 모신다 하여 부르는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당신이 당할머니가 아니라 ‘당각시’이므로 ‘각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의 당제가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 전하는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당집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숲으로 보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당집 주위 고목들이 예전에는 더욱 무성했다고 하는데 광복 직후에 큰 나무들을 베어내 그 과정에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곳이 사유지 밭이어서 소[유자](/topic/유자) 소원씨(진도읍, 전 남진제재소 대표)로부터 제당 부속 땅으로 희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1350년부터 87년 동안의 공도기(空島期)가 끝나고 군치소(郡治所)가 고군면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바뀌어 1440년부터 행정이 재개된 이후 이 마을은 진도의 관문으로 조성된 창고마을 겸 항구여서 당의 역사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도군 보호수로 지정받은 나무 가운데 진도에서 가장 큰 이팝나무가 이곳에 있다. 일명 쌀나무인 이 나무에 꽃이 많이 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역사해창[마을](/topic/마을)은 진도읍사무소에서 서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 때 시행한 고작리(庫作里) [간척](/topic/간척)사업 이전부터 병기창과 식량창고가 있던 진도의 해상관문이었다. 이곳이 번성한 때에는 200가구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38가구 42세대 109명이 살고 있다. 주요 성씨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경주 정씨(慶州 鄭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원주 이씨(原州 李氏), 현풍 곽씨(玄風 郭氏), 양천 허씨(陽川 許氏), 인동 장씨(仁同 張氏), 진주 강씨(晉州 姜氏), 경주 박씨(慶州 朴氏), 경주 채씨(慶州 蔡氏) 등이다. 간척사업 이후 주민들은 모두 [농업](/topic/농업)에 종사하여 벼, 구기자, 대파, 월동[배추](/topic/배추)를 경작하며 농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마을 주민이면 3만 원을 내고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되는 상도계(喪徒契)가 있다. 상도계에서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상여소리를 하고 출상을 한다. 이 상도계는 1961년부터 동정계(同情契)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해창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에 [거리제](/topic/거리제)와 함께 당집에서 당제를 지내고 있다. 당제는 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다. 당집은 한 칸으로 되어 있어 여느 마을의 당집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당집 주변은 [돌담](/topic/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입구에는 양쪽과 가운데에 세 개의 돌[기둥](/topic/기둥)이 세워져 있어 들어오고 나가는 문 구실을 한다. 입구에서 당집까지 1m 남짓한 거리이고 바닥은 돌과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당집 외부는 돌기둥을 세워 벽면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고, 정면은 나무 재질의 문이 달려 있다. 제를 모시지 않는 평소에는 이 출입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다. [지붕](/topic/지붕)은 [기와](/topic/기와)를 얹었으며, 지붕 위는 풀이 덮여 있어 당집 옆의 큰 이팝나무 및 주변 대나무숲과 하나된 모습으로 고즈넉하다. 당집 출입문에는 태극문양이 오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서까래](/topic/서까래)와 도리 역시 오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여느 마을의 당집과는 달리 독특한 멋을 풍기며 고풍스러워 아름답기까기하다. 당집 내부에는 대리석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할머니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당신(堂神)’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제단 위에는 [향로](/topic/향로)와 [촛대](/topic/촛대)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당을 ‘할머니당’이라고 부른다. 이는 당신의 신격이 여성이고, 여자를 모신다 하여 부르는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당신이 당할머니가 아니라 ‘당각시’이므로 ‘각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의 당제가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 전하는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당집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숲으로 보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당집 주위 고목들이 예전에는 더욱 무성했다고 하는데 광복 직후에 큰 나무들을 베어내 그 과정에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곳이 사유지 밭이어서 소[유자](/topic/유자) 소원씨(진도읍, 전 남진제재소 대표)로부터 제당 부속 땅으로 희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1350년부터 87년 동안의 공도기(空島期)가 끝나고 군치소(郡治所)가 고군면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바뀌어 1440년부터 행정이 재개된 이후 이 마을은 진도의 관문으로 조성된 창고마을 겸 항구여서 당의 역사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도군 보호수로 지정받은 나무 가운데 진도에서 가장 큰 이팝나무가 이곳에 있다. 일명 쌀나무인 이 나무에 꽃이 많이 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1989
국립문화재연구소무·굿과 음식 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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