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제사.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로 봉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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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제사.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로 봉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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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정의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제사.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로 봉행되었다.
정의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topic/마을)제사.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로 봉행되었다.
참조[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죽령산신당[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
참고문헌죽령국행제 조사연구 (이창식·안상경, 박이정, 2003)
죽령국행제의 무속적 기원과 전승 (이창식·안상경, 한국무속학 7, 한국무속학회, 2003)
죽령산신당 당신화 다자구 할머니와 죽령 산신제 (최운식, 한국민속학 39, 한국민속학회, 2004)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 설화의 신화적 성격 (이창식·최명환, 동아시아고대학 7, 동아시아고대학회, 2005)
참조[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죽령산신당[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
참고문헌죽령국행제 조사연구 (이창식·안상경, 박이정, 2003)
죽령국행제의 무속적 기원과 전승 (이창식·안상경, 한국무속학 7, 한국무속학회, 2003)
죽령산신당 당신화 다자구 할머니와 죽령 산신제 (최운식, 한국민속학 39, 한국민속학회, 2004)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 설화의 신화적 성격 (이창식·최명환, 동아시아고대학 7, 동아시아고대학회, 2005)
내용죽령산신당이 [자리](/topic/자리)한 공간인 죽령산의 죽령(해발 689m)은 ‘죽령재’ 또는 ‘대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전장의 요충지이자 영남과 호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다.

용부원리 [마을](/topic/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산신당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죽령산신당은 국[사당](/topic/사당)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400m 정도의 당산 산[마루](/topic/마루) 정상에 목조[기와](/topic/기와) 건물 형식을 갖추고 있다. 1895년 3월에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뒷면 통칸, 앞면 전퇴(前退)로 개방한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 대상은 죽령산신이며 그 구체적인 신격(神格)은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이다. 이로 인해 죽령산신당을 ‘다자구할머니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것과 관련해 이 일대를 괴롭히던 산적들을 다자구야 할머니의 지혜로 물리치게 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국행제 소사의 경우 제사일은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의 상순 기간에 택일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죽령산신제의 제일은 음력 삼월과 구월 중순의 정일(丁日, ‘丁’자가 들어간 날)에 잡는다. 이러한 제일의 전통은 조선시대 국행제 전통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제일이 정해지고 나서 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 한 달 정도 뒤에 새로운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다.

한편 『죽령산치성문(竹嶺山致誠文)』에 따르면 “매년 [원월](/topic/원월)(정월)에 국가로부터 향축을 받아서 일 년에 세 차례 제사를 지낸다(每歲元月自國家蠲 以吉辰一年三次致祀焉)”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중춘과 중추의 제일 이외에도 정월에 고유제(告由祭)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국행제이던 죽령산신제는 현재 관의 지원을 받아 제를 지내는 마을 단위의 제사로 전승되고 있다. 제일이 정해지면 제사 사흘 전에 마을 어귀와 죽령사, 도가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근신한다. 또한 부정한 일이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마을에서 죽령사에 이르는 길을 포함해 제당 주변을 정비한다.

제물의 구입과 손질은 도가에서 맡아서 한다. 의례 하루 전에 목욕재계한 후 단양시장에서 제물을 구입한다. 죽령산신제에 올리는 제물은 봄과 가을의 절기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나 대개 쌀 서 홉 정도를 [새옹](/topic/새옹)에 담아 큰 솥에 넣어 찐 메, 쌀 석 되 분량에 간을 하지 않고 장만한 백설기, 삼색실과, 나물, 포, 교미 경험이 없는 검은 돼지인 희생물 등이다.

도가에서 제물 준비를 마치면 마을 이장과 집사 등이 도가집 [대문](/topic/대문)에서 제물을 인도받는다. 이때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인도받은 제물은 죽령산신당에 진설된다. 이때 죽령산신의 위패에 반으로 접은 4절지 크기의 [창호지](/topic/창호지)를 올려놓는다. 이는 죽령산신을 새옷으로 치장한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죽령산신제의 의례는 「죽령산별제홀기(竹嶺山別祭笏記)』에 의거해 봉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topic/제관) 가운데 [헌관](/topic/헌관)은 마을 이장을 포함해 제사 당일 참여한 각 기관 및 단체장의 직급순으로 선출한다. 그 밖의 제관은 산신제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 중에서 뽑는다.

먼저 집례(集禮)가 개사배(皆四拜)를 행하라 하면 모든 헌관이 이에 따라 예를 올린다. 이어 [초헌](/topic/초헌)관에게 초헌관예관세위(初獻官詣盥洗位)를 행하라 하면 초헌관은 오른쪽에 준비해 둔 대야에서 손을 씻고 사당 안에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삼상향(향을 세 번 올림), 집작(술잔을 받음), [헌작](/topic/헌작)(술잔에 술을 받음), 준작(헌관이 술잔을 준작에게 주면 준작은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림), 배례(예를 두 번 올림), 퇴잔(잔을 내려놓음), [음복](/topic/음복) 순으로 의례를 행한다.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도 이와 동일한 순서로 의례를 행한다. 한편 제관이 아닌 경우에도 의례에 참여하여 종헌 이후 배례를 올리기도 한다.

현재 죽령산신제의 제사 비용은 단양군의 지원과 참여한 사람들의 찬조금으로 운영된다. 본래 죽령산신제 봉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할머니땅으로 불리던 밭을 마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마련한 기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이 땅이 국가에 환수되면서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제비를 충당해 오다가 관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내용죽령산신당이 [자리](/topic/자리)한 공간인 죽령산의 죽령(해발 689m)은 ‘죽령재’ 또는 ‘대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전장의 요충지이자 영남과 호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다.

용부원리 [마을](/topic/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산신당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죽령산신당은 국[사당](/topic/사당)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400m 정도의 당산 산[마루](/topic/마루) 정상에 목조[기와](/topic/기와) 건물 형식을 갖추고 있다. 1895년 3월에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뒷면 통칸, 앞면 전퇴(前退)로 개방한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 대상은 죽령산신이며 그 구체적인 신격(神格)은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이다. 이로 인해 죽령산신당을 ‘다자구할머니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것과 관련해 이 일대를 괴롭히던 산적들을 다자구야 할머니의 지혜로 물리치게 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국행제 소사의 경우 제사일은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의 상순 기간에 택일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죽령산신제의 제일은 음력 삼월과 구월 중순의 정일(丁日, ‘丁’자가 들어간 날)에 잡는다. 이러한 제일의 전통은 조선시대 국행제 전통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제일이 정해지고 나서 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 한 달 정도 뒤에 새로운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다.

한편 『죽령산치성문(竹嶺山致誠文)』에 따르면 “매년 [원월](/topic/원월)(정월)에 국가로부터 향축을 받아서 일 년에 세 차례 제사를 지낸다(每歲元月自國家蠲 以吉辰一年三次致祀焉)”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중춘과 중추의 제일 이외에도 정월에 고유제(告由祭)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국행제이던 죽령산신제는 현재 관의 지원을 받아 제를 지내는 마을 단위의 제사로 전승되고 있다. 제일이 정해지면 제사 사흘 전에 마을 어귀와 죽령사, 도가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근신한다. 또한 부정한 일이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마을에서 죽령사에 이르는 길을 포함해 제당 주변을 정비한다.

제물의 구입과 손질은 도가에서 맡아서 한다. 의례 하루 전에 목욕재계한 후 단양시장에서 제물을 구입한다. 죽령산신제에 올리는 제물은 봄과 가을의 절기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나 대개 쌀 서 홉 정도를 [새옹](/topic/새옹)에 담아 큰 솥에 넣어 찐 메, 쌀 석 되 분량에 간을 하지 않고 장만한 백설기, 삼색실과, 나물, 포, 교미 경험이 없는 검은 돼지인 희생물 등이다.

도가에서 제물 준비를 마치면 마을 이장과 집사 등이 도가집 [대문](/topic/대문)에서 제물을 인도받는다. 이때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인도받은 제물은 죽령산신당에 진설된다. 이때 죽령산신의 위패에 반으로 접은 4절지 크기의 [창호지](/topic/창호지)를 올려놓는다. 이는 죽령산신을 새옷으로 치장한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죽령산신제의 의례는 「죽령산별제홀기(竹嶺山別祭笏記)』에 의거해 봉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topic/제관) 가운데 [헌관](/topic/헌관)은 마을 이장을 포함해 제사 당일 참여한 각 기관 및 단체장의 직급순으로 선출한다. 그 밖의 제관은 산신제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 중에서 뽑는다.

먼저 집례(集禮)가 개사배(皆四拜)를 행하라 하면 모든 헌관이 이에 따라 예를 올린다. 이어 [초헌](/topic/초헌)관에게 초헌관예관세위(初獻官詣盥洗位)를 행하라 하면 초헌관은 오른쪽에 준비해 둔 대야에서 손을 씻고 사당 안에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삼상향(향을 세 번 올림), 집작(술잔을 받음), [헌작](/topic/헌작)(술잔에 술을 받음), 준작(헌관이 술잔을 준작에게 주면 준작은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림), 배례(예를 두 번 올림), 퇴잔(잔을 내려놓음), [음복](/topic/음복) 순으로 의례를 행한다.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도 이와 동일한 순서로 의례를 행한다. 한편 제관이 아닌 경우에도 의례에 참여하여 종헌 이후 배례를 올리기도 한다.

현재 죽령산신제의 제사 비용은 단양군의 지원과 참여한 사람들의 찬조금으로 운영된다. 본래 죽령산신제 봉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할머니땅으로 불리던 밭을 마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마련한 기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이 땅이 국가에 환수되면서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제비를 충당해 오다가 관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역사조선 태조 연간에 전국 산천의 [사전](/topic/사전)화(祀典化)와 유교화(儒敎化)가 진행되면서 1414년(태종 14)에 악(嶽), 해(海), 독(瀆) 및 명산대천의 사전분류체계가 확정되었다. 조선 초기에 사전체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죽령산(竹嶺山)은 국행의례의 소사(小祀)로 등재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는데, 소사(小祀)로 한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호서읍지(湖西邑誌)』 등에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제사로 정비되기 이전의 죽령산신당은 무격(巫覡)에 의한 [별기은](/topic/별기은)(別祈恩)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별기은의 대상이 되는 신은 감악(紺嶽), 송악(松嶽), 덕적(德積) 등과 같은 명산의 신령이었고, 이를 위해 [사설](/topic/사설) 신사를 두루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 세종 19년 3월 계묘조에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제사지내는 곳은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이라고 기록한 내용은 죽령산신당이 본래 별기은의 제사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역사조선 태조 연간에 전국 산천의 [사전](/topic/사전)화(祀典化)와 유교화(儒敎化)가 진행되면서 1414년(태종 14)에 악(嶽), 해(海), 독(瀆) 및 명산대천의 사전분류체계가 확정되었다. 조선 초기에 사전체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죽령산(竹嶺山)은 국행의례의 소사(小祀)로 등재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는데, 소사(小祀)로 한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호서읍지(湖西邑誌)』 등에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제사로 정비되기 이전의 죽령산신당은 무격(巫覡)에 의한 [별기은](/topic/별기은)(別祈恩)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별기은의 대상이 되는 신은 감악(紺嶽), 송악(松嶽), 덕적(德積) 등과 같은 명산의 신령이었고, 이를 위해 [사설](/topic/사설) 신사를 두루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 세종 19년 3월 계묘조에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제사지내는 곳은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이라고 기록한 내용은 죽령산신당이 본래 별기은의 제사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교민속학회무당 문화-강신무당 전승고양종승1995
경희대 민속학연구소무당 문서를 통해본 무당사회의 전통양종승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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