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물목기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수몰목단자(祭需物目單子)로 제수(祭需) 마련을 위해 필요한 각종 기명(器皿)과 물품의 수량을 적은 것, 또는 동제에서 사용하는 제수의 종류와 양을 기록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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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몰목단자(祭需物目單子)로 제수(祭需) 마련을 위해 필요한 각종 기명(器皿)과 물품의 수량을 적은 것, 또는 동제에서 사용하는 제수의 종류와 양을 기록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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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정의제수몰목단자(祭需物目單子)로 제수(祭需) 마련을 위해 필요한 각종 기명(器皿)과 물품의 수량을 적은 것, 또는 동제에서 사용하는 제수의 종류와 양을 기록한 문서.
정의제수몰목단자(祭需物目單子)로 제수(祭需) 마련을 위해 필요한 각종 기명(器皿)과 물품의 수량을 적은 것, 또는 동제에서 사용하는 제수의 종류와 양을 기록한 문서.
내용[한지](/topic/한지) 묶음이나 한지 두루마리 형태가 일반적이며, 약 22×25㎝이다. 현대에는 공책에 기록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경북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에서 사용하는 제수물목기를 사례로 본다.

동제사물목기(洞祭祀物目記): 1권. 임진년(1952)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동제의 준비에 필요한 제수의 내용과 구입 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수의 종류와 양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비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동제에 관한 공동체의 부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마을](/topic/마을)공동 재산의 효율적 운영이 물가변동과 같은 외적 변화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면서 동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음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제수 내용의 근소한 차이는 다른 문화요소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제의의 특성도 파악할 수 있다.

마을사회와 지역사회의 변화과정도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기유년(1969)부터 [금줄](/topic/금줄) 멜 때 비용이 기록되고, 제물 준비를 위해서 시장에 갔다 온 차비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공동체의 행사에서도 돈이 지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버스가 마을까지 들어온 후부터는 [제관](/topic/제관)들이 버스를 이용해서 시장을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물목기의 기록체제의 변화로는 경술년(1970)부터 한자 표기에서 한글 표기로 변화하였다. 또한 동미(洞米)와 동기(洞器) 등의 계산이 합산되던 것이 경술년부터 종류별로 기록되었다. 제수에는 돼지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계사년(1953)의 기록에는 돼지고기[猪肉]가 확인되어서 그것을 확인한 결과 술안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자료는 동제의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동제가 마을사회와 주변 환경의 변화에 긴밀하게 적응․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합성계(合成契): 1권. 합성계는 ‘동기추’라 불리면서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임인년(1962)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 마을의 ‘원주민’으로 불리는 7개 [문중](/topic/문중)만 거주할 때에는 동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문서가 없어도 잘 이루어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임인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전입해 온 타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에게도 ‘원주민’과 동일한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졌다. 그래서 결국 새로운 성격의 자치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1962년에 이르러 명칭 변경과 함께 자치조직 규약을 문서화하고 약간의 강제적인 성격을 띠면서 재조직되었다.

합성계의 목적은 계칙이 만들어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각성촌락에서 필요한 주민들의 융화단결과 개인의 대사(大事)를 공동의 대사로 여기면서 적극 협조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계칙에 의하면 촌락 주민들의 유대감은 “본 계원은 동일한 권한이 부여된다”라는 평등의식의 강조에서 출발한다. 계칙이 공표된 처음에는 불참자가 있어서 규제책을 문서화했으나 그 뒤 모든 주민이 계원이 되었다.

합성계 장부에는 임원 명단과 계금의 지출내역, 포편기(布便記: 계금을 빌린 사람과 원금과 이자를 기록)와 보간기(保簡記: 보관증)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지출내역은 합성계에서 주관하는 마을 공동작업이나 행사에 지출된 내용이다.

이 문서는 동제의 주체인 마을 주민들이 사회변동 현상을 극복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한 주민 중심적 전략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동대지수도(봉)기(洞垈地收都(捧)記): 1권. 촌락 공동체의 공동재산으로는 논과 산은 국가소유로 귀속되거나 학교 부지로 기부하였고, 현재는 동대지만 남아 있다. 언제부터 마을공동체 소유의 대지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대지수도기를 보면 기축년(1949)부터 20가구가 살다가 신묘년(1951)에 21가구, 이듬해인 임진년(1952)과 계사년(1953)에는 20가구가 살다가 갑오년(1954)부터 19가구가 살고 있다. 동대지 면적은 6,052㎡이며 수도금액은 쌀 4말5되(나락 9말)를 당년의 시장 시세에 따라 결정하고, 이 금액을 평당으로 환산한다.

조사 당시(1989)에는 동대지세가 평당 45원이며, 총금액은 8만 2,800원이었다. 동대지는 동민 전체의 공동소유이므로 동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동대지세로 받는 셈이다. 합성계가 동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이 동계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이것은 합성계의 식리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마을에 자생하던 배나무를 베어서 매매한 수입도 합성계금에 포함한 것이 이것을 말해 준다.

동대지세는 재산세 명목인 대지세, 매년 행하는 동제 비용, 마을공동 경비 등에 사용하며, 남는 금액은 주민들에게 빌려 주어서 이자를 늘리면서 동기금을 불려 나간다. 이렇게 모여진 금액은 10년마다 행하는 [별신굿](/topic/별신굿)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공동재산의 이익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의 공동재산을 효과적으로 운영․관리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또한 마을공동체 신앙인 동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경비 조달방법을 이해하게 한다. 즉 동제는 주민 공동의 자발적 경제활동을 통한 유지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신제향기(禱神祭饗記): 1권. 이 기록은 조사 당시에는 기해년(1959)과 무신년(1968) 등 2회만 기록되어 있다. 제수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무신년에는 접대용으로 쓰인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무신년 물목기’에 별신굿의 과정을 약술한 ‘도신제향기’와 굿판의 제수 위치를 설명한 그림도 첨가되어 있다. 이 자료는 10년 주기로 행해지는 별신제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표시함으로써 별신제에 관한 제반 사항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의미위의 네 종류 자료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중앙통치 구조와는 다른 측면에서 자생하여 발전한 촌락 자치조직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촌락 공동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과 공동경제생활의 모습도 파악할 수 있다. 또 각성 촌락 안의 구성원 변화에 따라 발생한 촌락 자체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등주의를 [기초](/topic/기초)로 한 융화단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밖에 촌락 공동체의 종교적 관행인 동제를 중심으로 촌락 주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변동에 따른 공동제의의 변화와 기타 촌락 주민의 일상생활 모습의 단면들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부곡리의 동계-합성계 (이기태, 향토문화연구회, 향토문화 4, 1988)
부곡리의 동제 (김택규․이기태․영남대학교․경상북도, 경북예악지, 1989)
내용[한지](/topic/한지) 묶음이나 한지 두루마리 형태가 일반적이며, 약 22×25㎝이다. 현대에는 공책에 기록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경북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에서 사용하는 제수물목기를 사례로 본다.

동제사물목기(洞祭祀物目記): 1권. 임진년(1952)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동제의 준비에 필요한 제수의 내용과 구입 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수의 종류와 양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비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동제에 관한 공동체의 부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마을](/topic/마을)공동 재산의 효율적 운영이 물가변동과 같은 외적 변화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면서 동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음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제수 내용의 근소한 차이는 다른 문화요소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제의의 특성도 파악할 수 있다.

마을사회와 지역사회의 변화과정도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기유년(1969)부터 [금줄](/topic/금줄) 멜 때 비용이 기록되고, 제물 준비를 위해서 시장에 갔다 온 차비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공동체의 행사에서도 돈이 지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버스가 마을까지 들어온 후부터는 [제관](/topic/제관)들이 버스를 이용해서 시장을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물목기의 기록체제의 변화로는 경술년(1970)부터 한자 표기에서 한글 표기로 변화하였다. 또한 동미(洞米)와 동기(洞器) 등의 계산이 합산되던 것이 경술년부터 종류별로 기록되었다. 제수에는 돼지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계사년(1953)의 기록에는 돼지고기[猪肉]가 확인되어서 그것을 확인한 결과 술안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자료는 동제의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동제가 마을사회와 주변 환경의 변화에 긴밀하게 적응․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합성계(合成契): 1권. 합성계는 ‘동기추’라 불리면서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임인년(1962)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 마을의 ‘원주민’으로 불리는 7개 [문중](/topic/문중)만 거주할 때에는 동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문서가 없어도 잘 이루어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임인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전입해 온 타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에게도 ‘원주민’과 동일한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졌다. 그래서 결국 새로운 성격의 자치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1962년에 이르러 명칭 변경과 함께 자치조직 규약을 문서화하고 약간의 강제적인 성격을 띠면서 재조직되었다.

합성계의 목적은 계칙이 만들어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각성촌락에서 필요한 주민들의 융화단결과 개인의 대사(大事)를 공동의 대사로 여기면서 적극 협조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계칙에 의하면 촌락 주민들의 유대감은 “본 계원은 동일한 권한이 부여된다”라는 평등의식의 강조에서 출발한다. 계칙이 공표된 처음에는 불참자가 있어서 규제책을 문서화했으나 그 뒤 모든 주민이 계원이 되었다.

합성계 장부에는 임원 명단과 계금의 지출내역, 포편기(布便記: 계금을 빌린 사람과 원금과 이자를 기록)와 보간기(保簡記: 보관증)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지출내역은 합성계에서 주관하는 마을 공동작업이나 행사에 지출된 내용이다.

이 문서는 동제의 주체인 마을 주민들이 사회변동 현상을 극복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한 주민 중심적 전략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동대지수도(봉)기(洞垈地收都(捧)記): 1권. 촌락 공동체의 공동재산으로는 논과 산은 국가소유로 귀속되거나 학교 부지로 기부하였고, 현재는 동대지만 남아 있다. 언제부터 마을공동체 소유의 대지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대지수도기를 보면 기축년(1949)부터 20가구가 살다가 신묘년(1951)에 21가구, 이듬해인 임진년(1952)과 계사년(1953)에는 20가구가 살다가 갑오년(1954)부터 19가구가 살고 있다. 동대지 면적은 6,052㎡이며 수도금액은 쌀 4말5되(나락 9말)를 당년의 시장 시세에 따라 결정하고, 이 금액을 평당으로 환산한다.

조사 당시(1989)에는 동대지세가 평당 45원이며, 총금액은 8만 2,800원이었다. 동대지는 동민 전체의 공동소유이므로 동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동대지세로 받는 셈이다. 합성계가 동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이 동계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이것은 합성계의 식리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마을에 자생하던 배나무를 베어서 매매한 수입도 합성계금에 포함한 것이 이것을 말해 준다.

동대지세는 재산세 명목인 대지세, 매년 행하는 동제 비용, 마을공동 경비 등에 사용하며, 남는 금액은 주민들에게 빌려 주어서 이자를 늘리면서 동기금을 불려 나간다. 이렇게 모여진 금액은 10년마다 행하는 [별신굿](/topic/별신굿)의 비용으로 사용한다. 공동재산의 이익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의 공동재산을 효과적으로 운영․관리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또한 마을공동체 신앙인 동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경비 조달방법을 이해하게 한다. 즉 동제는 주민 공동의 자발적 경제활동을 통한 유지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신제향기(禱神祭饗記): 1권. 이 기록은 조사 당시에는 기해년(1959)과 무신년(1968) 등 2회만 기록되어 있다. 제수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무신년에는 접대용으로 쓰인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무신년 물목기’에 별신굿의 과정을 약술한 ‘도신제향기’와 굿판의 제수 위치를 설명한 그림도 첨가되어 있다. 이 자료는 10년 주기로 행해지는 별신제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표시함으로써 별신제에 관한 제반 사항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의미위의 네 종류 자료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중앙통치 구조와는 다른 측면에서 자생하여 발전한 촌락 자치조직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촌락 공동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과 공동경제생활의 모습도 파악할 수 있다. 또 각성 촌락 안의 구성원 변화에 따라 발생한 촌락 자체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등주의를 [기초](/topic/기초)로 한 융화단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밖에 촌락 공동체의 종교적 관행인 동제를 중심으로 촌락 주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변동에 따른 공동제의의 변화와 기타 촌락 주민의 일상생활 모습의 단면들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부곡리의 동계-합성계 (이기태, 향토문화연구회, 향토문화 4, 1988)
부곡리의 동제 (김택규․이기태․영남대학교․경상북도, 경북예악지, 1989)
2009한국음악의 뿌리(이용식팔도 굿음악
집문당황해도 굿의 음악인류학이용식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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