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호계리 동계문서

한국무속신앙사전
조선 후기부터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서 전승되어 온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동계 관련 기록물. 2008년 4월 11일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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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서 전승되어 온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동계 관련 기록물. 2008년 4월 11일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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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정의조선 후기부터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서 전승되어 온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동계 관련 기록물. 2008년 4월 11일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조선 후기부터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서 전승되어 온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동계 관련 기록물. 2008년 4월 11일 장흥 호계리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참조[장흥호계리별신제](/topic/장흥호계리별신제)
참고문헌장흥 호계리 별신제연구 (김삼기, 장흥문화 9, 장흥문화원, 1986)
장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박물관․전라남도․장흥군, 1989)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별신제 조사 연구 (나경수, 민속학연구 10, 국립민속박물관, 2002)
장흥 호계[마을](/topic/마을) 사람들의 삶과 앎 (나경수 외, 심미안, 2004)
晩守齋集, 長興邑誌,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연구 (임형,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호계리의 역사와 문화-호계문화예술회관 개관기념 학술발표회- (사단법인 장흥 호계리별신제보존회, 2007.9.15)
Donggyemunseo es el término que hace referencia a los registros guardados por la cooperativa de un pueblo llamada donggye en cuanto a la preparación y gestión de rituales comunitarios.

La donggye es una cooperativa formada para preparar la celebración de los festivales de los dioses tutelares del pueblo llamados dongje y su nombre puede alternarse por los de daedonggye o sanhyanggye. La cooperativa debe mantener todos los registros relacionadas con los rituales: los detalles sobre sacrificios ofrecidos incluyendo costos; la lista de oficiantes del ritual; y la lista de donantes. Los citados registros sirven como datos importantes que reflejan cómo gestionar una aldea y cómo llevar a cabo un ritual comunitario. Debido a que los dichos registros muestran los cambios en los objetos sacrificiales y en los costos correspondientes, ellos también sirven como importantes pistas para rastrear los cambios en la tradición relacionada con los rituales comunitarios a lo largo de los siglos.
村庄共同祭仪相关文件。

村里的居民为举办洞祭而建立的组织称作“洞契”,又称大同契,山乡契,而筹办洞祭时,必须将相关内容记录下来,这便是洞契文书。洞契文书记录着每年举行洞祭所需要的祭品种类及费用,祭官名单,捐款人名单等。洞契文书十分完好地整理出关于村庄运营的内容以及洞祭本质性的内容,同时还记录有祭品种类及变化,日常生活物价的变动。因此,洞契文书是追踪一个村庄洞祭传承与变化的重要线索。
Donggyemunseo are records kept by the village cooperative donggye regarding the preparation and management of communal rituals.

Donggye is a cooperative formed to prepare for the annual village tutelary festivals (dongje), and alternate terms include daedonggye (grand village cooperative) and sanhyanggye (mountain village cooperative). The cooperative must maintain all records related to the rituals: details about the sacrifices offered including costs; list of ritual officials; and list of donors. These records serve as important data that reflect how a village is managed and how a village ritual is staged. Since the records show the changes in sacrificial goods and in the costs involved, they also serve as important clues for tracking down the changes in the village ritual tradition over the centuries.
참조[장흥호계리별신제](/topic/장흥호계리별신제)
참고문헌장흥 호계리 별신제연구 (김삼기, 장흥문화 9, 장흥문화원, 1986)
장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박물관․전라남도․장흥군, 1989)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별신제 조사 연구 (나경수, 민속학연구 10, 국립민속박물관, 2002)
장흥 호계[마을](/topic/마을) 사람들의 삶과 앎 (나경수 외, 심미안, 2004)
晩守齋集, 長興邑誌,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연구 (임형,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호계리의 역사와 문화-호계문화예술회관 개관기념 학술발표회- (사단법인 장흥 호계리별신제보존회, 2007.9.15)
Donggyemunseo es el término que hace referencia a los registros guardados por la cooperativa de un pueblo llamada donggye en cuanto a la preparación y gestión de rituales comunitarios.

La donggye es una cooperativa formada para preparar la celebración de los festivales de los dioses tutelares del pueblo llamados dongje y su nombre puede alternarse por los de daedonggye o sanhyanggye. La cooperativa debe mantener todos los registros relacionadas con los rituales: los detalles sobre sacrificios ofrecidos incluyendo costos; la lista de oficiantes del ritual; y la lista de donantes. Los citados registros sirven como datos importantes que reflejan cómo gestionar una aldea y cómo llevar a cabo un ritual comunitario. Debido a que los dichos registros muestran los cambios en los objetos sacrificiales y en los costos correspondientes, ellos también sirven como importantes pistas para rastrear los cambios en la tradición relacionada con los rituales comunitarios a lo largo de los siglos.
村庄共同祭仪相关文件。

村里的居民为举办洞祭而建立的组织称作“洞契”,又称大同契,山乡契,而筹办洞祭时,必须将相关内容记录下来,这便是洞契文书。洞契文书记录着每年举行洞祭所需要的祭品种类及费用,祭官名单,捐款人名单等。洞契文书十分完好地整理出关于村庄运营的内容以及洞祭本质性的内容,同时还记录有祭品种类及变化,日常生活物价的变动。因此,洞契文书是追踪一个村庄洞祭传承与变化的重要线索。
내용장흥 호계리 동계문서는 1715년(숙종 41)에 대동계를 만든 내력을 담은 『대동창계(大洞刱契)』라는 책과 함께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그해 선정되었던 [제관](/topic/제관)과 결산 내역을 기록하는 문서가 결책되어 보관되어 있다. 또 예전 [마을](/topic/마을)의 풍물을 마련할 때 부의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그 내역을 기록한 책, 제관록, 그리고 홀기 등 문적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재난을 구제해 달라는 등장 상서와 향도제감절목 등이 있다. 장흥 호계리 동계문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흥 호계리 동계문서 목록『대동계안(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은 대동계서(序)와 완의(完議)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계의 배경과 목적과 마을에 관련된 제반 규율과 의무 등 일종의 자치규약 34개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상부상조를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에 대한 처벌, 춘추강회의 실시, 마을의 공동납 등 대동계를 운영하고 마을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제의 갑인년은 1734년으로 보고 있다.

『대동창계(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는 을미년(1715)과 신축년(1721)에 기록된 대동계 임원과 계원 명단, 그리고 8조의 완의이다. 표제가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로 되어 있는데 숙종 41년 을미년은 1715년이다. 지금 남아 있는 호계리 동계문서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표지에 창계(刱契)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1715년)에 대동계가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1715년 기록에는 계원들의 명단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고 명단 밑에 생년간지와 자(字)를 기록하고 있다. 1721년 기록에는 계원 명단이 나오면서 유사와 별유사 등 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8개조의 완의가 있다.

『호계촌중집강안(虎溪村中執綱案)(第二)』은 임신년(1752)과 정유년(1777) 사이 계 임원 명단이다. 표지가 결락되어 있다. 임원은 1년 단위로 교체되었는데, 1754년에서 1758년 사이에 유임의 기록도 함께 보인다. 촌장(1), 도유사(1), 공사원(2), 유사(2), 직월(2) 등의 임원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1721년 이후 중단된 호계리 대동계가 1752년부터는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그 조직 기반도 확고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호계촌중집강안(虎溪村中執綱案)(第三)』은 신축년(1781)과 신묘년(1831)사이의 대동계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문서 앞부분과 정미년(1787)에 작성된 완의 2종이 있다. 문서 앞부분의 완의는 마을 공동 소유의 상여 활용에 관한 내용이다. 1787년의 완의는 춘추강회를 실시할 때 힘을 보태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따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하는 규정이다. 또 계원들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이 생기면 상사 치를 때 부의금을 거두어 주도록 하였다.

『대동계촌안(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은 임진년(1832)과 무오년(1858) 사이의 임원에 관한 기록이다. 촌장, 도유사, 공사원, 유사 등의 직임인데, 1847년부터 1853년 사이는 공사원과 유사 대신 별유사가 기록되고 있어 조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호계리집강안(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은 무오년(1858)과 계유년(1873)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인, 도유사 1인, 공사원 2인, 유사 2인인데, 1867년과 1870년 사이는 공사원이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계리집강안(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은 계유년(1873)과 갑오년(1894)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표제에는 갑술년(1874년)이지만 실제 그 전해인 1873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조직인 유사 중심에서 직월 중심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호계대동안(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은 을미년(1895)에서 임신년(1932)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 도유사 1, 공사원 1, 직월 1, 직일 1인의 체제이다.

『호계대동중(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은 계유년(1933)에서 계사년(1953) 사이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임원 직임의 수가 변화를 보이며, 현대사의 혼란한 시기인 광복과 6․25전쟁 전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호계동안(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은 무술년의 동안이다. 『호계동안(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은 병신년의 동안이다. 『호계동중금고부의책(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은 경인년 마을에서 금고([[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마련하면서 부의를 받은 내용을 일일이 기록한 내용이다.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면과 마을, 보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의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서이다. 마을은 장동 11개 마을, 부평 39개 마을, 그리고 보림사중 등 모두 54곳에 이른다.

『제관록(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은 호계별신제의 제관록이다. 무오년(1918)의 호계대동별신제향 회유문 등의 기록과 함께 있다. 표제의 무오세수기망담서(戊午歲首旣望瞻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무오년에 처음 등서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歲次未攷]도 있으며, 1950년, 1953년, 1960년 등 서기가 함께 기록된 곳도 있다.

『별신제제수전장기(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는 신유년(1921)의 별신제 제수에 관한 기록이다.

『호계대동별신제홀기(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는 호계리 별신제의 홀기이다. 김기권(金基權)이란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호계리 별신제의 [축문](/topic/축문)은 만수재 이민기(1646~1704)가 지은 것으로 『만수재집』 권5에는 호계신기축문(虎溪新基祝文), 호계지신축문(虎溪地神祝文), 장항지신축문(獐項地神祝文), 호계별신축문(虎溪別神祝文) 등이 실려 있다.

『상서(上書)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丁未)』은 정미년 7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용계면 호계리 화민 32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서이다. 폭우로 인해 전답이 유실되고 인명이 표류하여 익사하였으며 [제방](/topic/제방)이 파손되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구휼해 달라는 내용이다. 자세히 살펴서 원조를 하겠다는 제음(題音)이 있다.

『상서(上書)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戊申)』는 무신년 정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용계면 호계리 화민 29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서이다. 전년 6월에 입은 태풍의 피해로 잠긴 제방을 보수하여 물이 소통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전년(정미년)에 올린 상서의 답신에 확인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해가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와도 안 되고 있어 장정을 동원해 보수해 주고, 인근의 장서면(長西面) 상하점(上下店)과 와석정(瓦石亭) 홍거리(洪巨里) 등의 주민도 동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절목(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은 갑술년에 용계면의 향도역을 감제하는 절목이다. 용계면에 부과된 향도역을 순찰사가 조정해 주었는데 시일이 지나 다시 부과되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이에 대해 감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감제해준 절목이다.


| 연번 | 문서명| 연도 | 크기(㎝) |
| -------- | -------- | -------- | -------- |
| 1 |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 1734 | 44×29 |
| 2 |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 1715, 1721 | 35×30 |
| 3 | 虎溪村中執綱案(第二) | 1752~1777 | 34×28 |
| 4 | 虎溪村中執綱案(第三) | 1781~1831 | 35.5×25.5 |
| 5 |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 1832~1858 | 34×26 |
| 6 |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 1858~1873 | 35×27 |
| 7 |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 1873~1894 | 31.5×29 |
| 8 | 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 | 1895~1932 | 30.5×28.5 |
| 9 | 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 1933~1953 | 38×27 |
| 10 | 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 | 무술 | 32.5×28 |
| 11 | 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 | 병신 | 23×25.5 |
| 12 |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 1890 | 31×27 |
| 13 |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 경진 | 30×26.5 |
| 14 | 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 | 1921 | 20×21 |
| 15 |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 | 25× 9.5 |
| 16 | 上書 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정미 | 59×93.5 |
| 17 | 上書 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무신 | 58×100 |
| 18 |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 갑술 | 113.5×48 |


장흥호계리동계문서 목록
내용장흥 호계리 동계문서는 1715년(숙종 41)에 대동계를 만든 내력을 담은 『대동창계(大洞刱契)』라는 책과 함께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그해 선정되었던 [제관](/topic/제관)과 결산 내역을 기록하는 문서가 결책되어 보관되어 있다. 또 예전 [마을](/topic/마을)의 풍물을 마련할 때 부의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그 내역을 기록한 책, 제관록, 그리고 홀기 등 문적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재난을 구제해 달라는 등장 상서와 향도제감절목 등이 있다. 장흥 호계리 동계문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흥 호계리 동계문서 목록『대동계안(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은 대동계서(序)와 완의(完議)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계의 배경과 목적과 마을에 관련된 제반 규율과 의무 등 일종의 자치규약 34개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상부상조를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에 대한 처벌, 춘추강회의 실시, 마을의 공동납 등 대동계를 운영하고 마을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제의 갑인년은 1734년으로 보고 있다.

『대동창계(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는 을미년(1715)과 신축년(1721)에 기록된 대동계 임원과 계원 명단, 그리고 8조의 완의이다. 표제가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로 되어 있는데 숙종 41년 을미년은 1715년이다. 지금 남아 있는 호계리 동계문서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표지에 창계(刱契)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1715년)에 대동계가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1715년 기록에는 계원들의 명단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고 명단 밑에 생년간지와 자(字)를 기록하고 있다. 1721년 기록에는 계원 명단이 나오면서 유사와 별유사 등 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8개조의 완의가 있다.

『호계촌중집강안(虎溪村中執綱案)(第二)』은 임신년(1752)과 정유년(1777) 사이 계 임원 명단이다. 표지가 결락되어 있다. 임원은 1년 단위로 교체되었는데, 1754년에서 1758년 사이에 유임의 기록도 함께 보인다. 촌장(1), 도유사(1), 공사원(2), 유사(2), 직월(2) 등의 임원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1721년 이후 중단된 호계리 대동계가 1752년부터는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그 조직 기반도 확고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호계촌중집강안(虎溪村中執綱案)(第三)』은 신축년(1781)과 신묘년(1831)사이의 대동계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문서 앞부분과 정미년(1787)에 작성된 완의 2종이 있다. 문서 앞부분의 완의는 마을 공동 소유의 상여 활용에 관한 내용이다. 1787년의 완의는 춘추강회를 실시할 때 힘을 보태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따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하는 규정이다. 또 계원들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이 생기면 상사 치를 때 부의금을 거두어 주도록 하였다.

『대동계촌안(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은 임진년(1832)과 무오년(1858) 사이의 임원에 관한 기록이다. 촌장, 도유사, 공사원, 유사 등의 직임인데, 1847년부터 1853년 사이는 공사원과 유사 대신 별유사가 기록되고 있어 조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호계리집강안(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은 무오년(1858)과 계유년(1873)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인, 도유사 1인, 공사원 2인, 유사 2인인데, 1867년과 1870년 사이는 공사원이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계리집강안(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은 계유년(1873)과 갑오년(1894)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표제에는 갑술년(1874년)이지만 실제 그 전해인 1873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조직인 유사 중심에서 직월 중심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호계대동안(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은 을미년(1895)에서 임신년(1932)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 도유사 1, 공사원 1, 직월 1, 직일 1인의 체제이다.

『호계대동중(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은 계유년(1933)에서 계사년(1953) 사이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임원 직임의 수가 변화를 보이며, 현대사의 혼란한 시기인 광복과 6․25전쟁 전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호계동안(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은 무술년의 동안이다. 『호계동안(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은 병신년의 동안이다. 『호계동중금고부의책(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은 경인년 마을에서 금고([[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마련하면서 부의를 받은 내용을 일일이 기록한 내용이다.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면과 마을, 보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의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서이다. 마을은 장동 11개 마을, 부평 39개 마을, 그리고 보림사중 등 모두 54곳에 이른다.

『제관록(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은 호계별신제의 제관록이다. 무오년(1918)의 호계대동별신제향 회유문 등의 기록과 함께 있다. 표제의 무오세수기망담서(戊午歲首旣望瞻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무오년에 처음 등서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歲次未攷]도 있으며, 1950년, 1953년, 1960년 등 서기가 함께 기록된 곳도 있다.

『별신제제수전장기(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는 신유년(1921)의 별신제 제수에 관한 기록이다.

『호계대동별신제홀기(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는 호계리 별신제의 홀기이다. 김기권(金基權)이란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호계리 별신제의 [축문](/topic/축문)은 만수재 이민기(1646~1704)가 지은 것으로 『만수재집』 권5에는 호계신기축문(虎溪新基祝文), 호계지신축문(虎溪地神祝文), 장항지신축문(獐項地神祝文), 호계별신축문(虎溪別神祝文) 등이 실려 있다.

『상서(上書)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丁未)』은 정미년 7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용계면 호계리 화민 32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서이다. 폭우로 인해 전답이 유실되고 인명이 표류하여 익사하였으며 [제방](/topic/제방)이 파손되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구휼해 달라는 내용이다. 자세히 살펴서 원조를 하겠다는 제음(題音)이 있다.

『상서(上書)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戊申)』는 무신년 정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용계면 호계리 화민 29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서이다. 전년 6월에 입은 태풍의 피해로 잠긴 제방을 보수하여 물이 소통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전년(정미년)에 올린 상서의 답신에 확인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해가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와도 안 되고 있어 장정을 동원해 보수해 주고, 인근의 장서면(長西面) 상하점(上下店)과 와석정(瓦石亭) 홍거리(洪巨里) 등의 주민도 동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절목(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은 갑술년에 용계면의 향도역을 감제하는 절목이다. 용계면에 부과된 향도역을 순찰사가 조정해 주었는데 시일이 지나 다시 부과되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이에 대해 감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감제해준 절목이다.


| 연번 | 문서명| 연도 | 크기(㎝) |
| -------- | -------- | -------- | -------- |
| 1 |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 1734 | 44×29 |
| 2 |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 1715, 1721 | 35×30 |
| 3 | 虎溪村中執綱案(第二) | 1752~1777 | 34×28 |
| 4 | 虎溪村中執綱案(第三) | 1781~1831 | 35.5×25.5 |
| 5 |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 1832~1858 | 34×26 |
| 6 |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 1858~1873 | 35×27 |
| 7 |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 1873~1894 | 31.5×29 |
| 8 | 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 | 1895~1932 | 30.5×28.5 |
| 9 | 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 1933~1953 | 38×27 |
| 10 | 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 | 무술 | 32.5×28 |
| 11 | 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 | 병신 | 23×25.5 |
| 12 |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 1890 | 31×27 |
| 13 |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 경진 | 30×26.5 |
| 14 | 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 | 1921 | 20×21 |
| 15 |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 | 25× 9.5 |
| 16 | 上書 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정미 | 59×93.5 |
| 17 | 上書 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무신 | 58×100 |
| 18 |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 갑술 | 113.5×48 |


장흥호계리동계문서 목록
역사조선 후기(별신제 1702년께, 대동계(동계) 1715년)부터 전해오는 공동체 기록물(동계안, 집강록, [제관](/topic/제관)록, 홀기, 풍물 부의책 등 관련 문적 15책과 상서 2건, 절목 1건)로서 동계 창설과 운영 등 [마을](/topic/마을)사의 변천, 그리고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는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topic/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역사조선 후기(별신제 1702년께, 대동계(동계) 1715년)부터 전해오는 공동체 기록물(동계안, 집강록, [제관](/topic/제관)록, 홀기, 풍물 부의책 등 관련 문적 15책과 상서 2건, 절목 1건)로서 동계 창설과 운영 등 [마을](/topic/마을)사의 변천, 그리고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는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topic/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Donggyemunseo are records kept by the village cooperative donggye regarding the preparation and management of communal rituals.

Donggye is a cooperative formed to prepare for the annual village tutelary festivals (dongje), and alternate terms include daedonggye (grand village cooperative) and sanhyanggye (mountain village cooperative). The cooperative must maintain all records related to the rituals: details about the sacrifices offered including costs; list of ritual officials; and list of donors. These records serve as important data that reflect how a village is managed and how a village ritual is staged. Since the records show the changes in sacrificial goods and in the costs involved, they also serve as important clues for tracking down the changes in the village ritual tradition over the centuries.
의의장흥 호계리 동계문서는 조선시대 후기(1702년께 별신제, 1715년 대동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매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역사 자료이며, [마을](/topic/마을)공동체 의례인 별신제의 연혁과 변천을 알 수 있는 가치도 있다. 별신제는 전남지역에서는 흔한 용어는 아니지만, 장흥 호계리 지역에서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전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당산제와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제의(祭儀) 형식은 유교식 제차로 진행되는데, 제차․제물․[제관](/topic/제관) 등이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서 볼 수 있는 관제(官祭)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 호계리 별신제를 통하여 관제가 민간화되어 가는 양상을 알 수 있다. 호계리에는 별신제와 당산제가 병행되어 오다가 당산제는 폐지되었지만 민간신앙화된 별신제는 지금도 살아 있는 마을문화의 하나로서 매년 수행되고 있다. 특히 장흥 호계리 별신제는 1700년대부터 전해 내려오면서 관련 자료가 현존하고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별신제 및 동계문서가 함께 가치가 있었다.
의의장흥 호계리 동계문서는 조선시대 후기(1702년께 별신제, 1715년 대동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매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역사 자료이며, [마을](/topic/마을)공동체 의례인 별신제의 연혁과 변천을 알 수 있는 가치도 있다. 별신제는 전남지역에서는 흔한 용어는 아니지만, 장흥 호계리 지역에서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전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당산제와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제의(祭儀) 형식은 유교식 제차로 진행되는데, 제차․제물․[제관](/topic/제관) 등이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서 볼 수 있는 관제(官祭)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 호계리 별신제를 통하여 관제가 민간화되어 가는 양상을 알 수 있다. 호계리에는 별신제와 당산제가 병행되어 오다가 당산제는 폐지되었지만 민간신앙화된 별신제는 지금도 살아 있는 마을문화의 하나로서 매년 수행되고 있다. 특히 장흥 호계리 별신제는 1700년대부터 전해 내려오면서 관련 자료가 현존하고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별신제 및 동계문서가 함께 가치가 있었다.
大板 屋號書店朝鮮巫俗の硏究 上, 下赤松智城ㆍ秋葉隆1937
박이정동해안 지역 무극 연구이균옥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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