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

한국무속신앙사전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topic/장군)신의 하나.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예종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topic/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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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topic/장군)신의 하나.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예종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topic/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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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길
정의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topic/장군)신의 하나.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예종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topic/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함.
내용남이 [장군](/topic/장군)(1441∼1468)이 비범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억울하게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남이 장군 신앙의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 된다. 비록 후대에 와서 신원(伸寃)이 되긴 하였지만 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민중의 억울한 심정은 그를 신격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역사 인식은 민간신앙과 구비전승물을 통해 표출된다. 이를 토대로 남이 장군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이한 출생을 하다
2. 원조자의 도움으로 수련을 하다
3. 신이한 행적을 남기다
4. [원귀](/topic/원귀)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다.

구비설화에 나타난 남이 장군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출생에서부터 완전한 신성성(神聖性)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네의 혼이 환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네는 [마을](/topic/마을) 사람들에게 [인신공희](/topic/인신공희)(人身供犧)를 요구하는 부정적 존재이다. 수련 과정에서도 그의 불완전한 상태는 해소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지네의 원혼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수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비 차림의 길손[客]이 남이를 데리고 가서 글과 무예를 가르쳤는데 수년 후 선비의 방에 비수를 든 사람이 나타나 선비의 가슴을 찔렀다고 한다. 비수를 든 사람이 바로 남이 장군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에게 신이한 능력을 지니도록 가르쳐 준 스승에게조차 칼을 겨누는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하는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또한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이 되거나 결과적으로 구원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부를 죽이려고 하는 [손각시](/topic/손각시)를 퇴치하지만 사실 그 신부는 이미 천명을 다한 사람이었거나 귀신을 퇴치하고 살아남은 처녀가 남이 장군에게 자신의 여생을 바치겠다고 하지만 남이 장군이 이를 냉정하게 뿌리쳐 결국 처녀가 자결하게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운명론적 결과로 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도리](/topic/도리)어 민중의 변혁에 대한 강한 욕구의 표명이 된다. 남이 장군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를 향해 숭배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지배층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그를 신격화하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나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민중의 역설적 저항의식의 표명을 나타낸다.

이처럼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은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관여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또 이것은 중부 지역 무속에서 [최영](/topic/최영)(崔瑩, 1316~1388) 등을 비롯한 원한 깊은 장군을 신으로 받드는 맥락과 일치한다. 즉 생전의 위대한 업적이나 충정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억울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현상은 비단 남이 장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원한 깊은 귀신을 모셔서 위해야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 탈이 생기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금기의식도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반영되어 있다. 또 민간에서는 남이 장군이 잡귀를 쫓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생전에 위엄 있는 장군이었다는 점에서 잡귀를 쫓을 수 있는 주력(呪力)이 있다는 믿음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남이 장군은 주로 서울 용산구에서 동제(洞祭)의 대상신으로 모셔진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남이장군[사당](/topic/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이다. 이것은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topic/번지)에 있는 남이장군사당에서 열리는 제의로, 1999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사당은 대지 294㎡에 건평 33㎡이며 크기는 3칸으로 한와(韓瓦)이다. 사당은 당 입구 전면에 있다. 이곳에 사당을 세운 이유는 남이 장군이 용산에서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화(慘禍)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사당은 원효로 2가에 위치한 거제산 당고개에 있었으며, 100여 년 전에 장군이 현몽해 현 위치로 옮겼다고도 한다. 당 내부에는 남이장군상을 비롯해 최영장군상, 부군대감내외상, 정추정씨내외상, 산신령상, 토지신상, 천신대감상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한국무속신 고찰 (양종승, 몽골학 4, 한국몽골학회, 1996)
동신당 (김태곤, 민속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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