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불산신사

한국무속신앙사전
우불산 일대 지역을 수호하는 우불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우불산신사는 기우제에 특히 효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이 이 제당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제를 지낸 뒤 사흘 안에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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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불산 일대 지역을 수호하는 우불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우불산신사는 기우제에 특히 효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이 이 제당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제를 지낸 뒤 사흘 안에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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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숙
정의우불산 일대 지역을 수호하는 우불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우불산신사는 기우제에 특히 효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이 이 제당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제를 지낸 뒤 사흘 안에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정의우불산 일대 지역을 수호하는 우불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우불산신사는 기우제에 특히 효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이 이 제당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제를 지낸 뒤 사흘 안에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내용우불산신사의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제단이 중앙에 놓여 있으며, 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위패](/topic/위패) 보관함 안에 ‘우불산신령 위(于弗山神靈 位)’라고 쓴 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불산신제는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의 24 소사 중 하나로 매해 음력 이월과 팔월 하정일 두 차례 제를 모셔오다가 우불산신제가 국가적 의례로 행해지는 전통이 단절된 이후에는 우불산 일대 지역(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과 웅촌면 일대까지)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섬겨져 지역주민들이 주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공동으로 제의를 행해 왔으나. 근래에는 제의 담당층이 제한되어 서창, 소주, 덕계, 평산 등 네 개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주관하며 매해 한차례 음력 팔월 하정일에만 제의를 베풀고 있다.

우불산신제를 주관하는 제주는 매해 음력 팔월 초유일(初酉日)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와 유림회 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 제주의 선정 기준은 그해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마을의 발전에 공헌한 이나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깨끗한 이를 가려 선정한다. 제주로 선정된 이는 제를 지내기 사흘 전부터 부정을 가리는 금기를 행하며 제당 주위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을 먼저 가신다. 과거에는 제주의 금기가 제를 지낸 뒤에도 일정 기간 지속되었으나, 근래에는 제를 지낸 뒤 달리 행해지지 않는다. 제의를 베풀 때에는 제주를 비롯하여 마을 주민들도 함께 참여한다. 이때 출산과 혼사는 달리 가리지 않으나 초상과 사고 등 흉사는 가려 흉사가 있는 이는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제의에 진설하는 제물은 녹포(근래에는 쇠고기와 돼지머리로 대신함), 생선회 또는 육포, 생[미나리](/topic/미나리), 살짝 익힌 조밥, [수수](/topic/수수)밥, 과일(밤, [대추](/topic/대추), 배, 감, 석류) 등이다. 이를 [음복](/topic/음복)하면 액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긴다. 제의의 절차는 제당에서 산신제만 지내며 제의 방식은 유교식으로 행한다. 제의가 끝난 뒤에는 제물의 일부를 떼어 제당 앞에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시석을 행한 뒤, 우불산신사 안의 부속건물에서 날것으로 올린 제물을 조리하여 제의에 참여한 이들이 제당 옆에 위치한 사찰에서 함께 음복한다. 음복이 끝난 뒤에는 제의를 주관한 우불산신사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총회를 개최한다.

우불산신사의 연원에 대한 구전자료는 주로 조선의 건국주인 태조 [이성계](/topic/이성계)와 연계되어 전해진다. 일설에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전국의 명산들을 돌아보던 중 우불산에 오게 된 이성계가 우불산의 형세가 장엄하고 경관이 수려한 것에 반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발원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조선 왕조가 개창될 무렵 이성계가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다가 우불산에 산신이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제를 지냈는데, 이후 우불산신의 도움으로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가 명을 내려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고 유림들로 하여금 봄․가을 정일에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우불산신의 영험함에 대한 구전자료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일본군을 응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먼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우불산 남쪽에 진을 치자 우불산신이 신풍(神風)을 일으켜 왜병들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있던 어느해 울산부 서면장(西面將)이 우불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왜병들이 지경고개를 넘어 화승총을 쏘면서 우불산성으로 쳐들어 왔다. 바로 그때 남루한 차림의 한 도인이 걸어와 왜병들을 바라보며 필묵으로 글을 쓰고는 글쓴 종이를 손에 들고 하늘로 날렸다. 그러자 도인이 글을 쓴 종이가 바람에 실려 대운산 상봉에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낙엽이 왜병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는데 떨어진 낙엽은 모두 병졸로 변하여 왜군들과 대적해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병을 섬멸시킨 바람을 우불산신이 현신하여 일으킨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이라 하고 패한 왜병들의 시신이 쌓여 있던 곳을 왜시등(倭屍嶝)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 지역에 부임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인과 가족들이 해를 입어 일본인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특히 우불산신사가 있는 곳은 함부로 지나[가지](/topic/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우불산신의 [영험담](/topic/영험담)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우불산신사를 강제로 헐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이 [신벌](/topic/신벌)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나서지 못하자 윤씨라는 사람이 큰소리를 치며 앞에 나서 [사당](/topic/사당)을 허물기 위해 기왓장을 뜯었다. 그런데 얼마 후 기왓장을 뜯은 윤씨는 갑자기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으며, 이 일을 지휘했던 일본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한편, 우불산 앞길에는 아[무리](/topic/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를 어기고 말을 탄 채 지나가다가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는 경상감사 양씨가 이러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면서도 우불산신을 믿지 않고 이 같은 사실을 의심하여 말을 탄 채 제당 앞으로 지나갔다. 그러자 홀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산꼭대기에 뜨더니 맹호로 돌변해 무례하게 말을 타고 제당 앞을 지나간 경상감사 양씨를 물어 죽였다. 그 무덤이 아직도 웅촌면 검단리 산기슭에 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양산군지 (양산군, 1989)
땅이름 울산사랑 (강길부, 도서출판 정도, 2002)
내용우불산신사의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제단이 중앙에 놓여 있으며, 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위패](/topic/위패) 보관함 안에 ‘우불산신령 위(于弗山神靈 位)’라고 쓴 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불산신제는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의 24 소사 중 하나로 매해 음력 이월과 팔월 하정일 두 차례 제를 모셔오다가 우불산신제가 국가적 의례로 행해지는 전통이 단절된 이후에는 우불산 일대 지역(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과 웅촌면 일대까지)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섬겨져 지역주민들이 주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공동으로 제의를 행해 왔으나. 근래에는 제의 담당층이 제한되어 서창, 소주, 덕계, 평산 등 네 개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주관하며 매해 한차례 음력 팔월 하정일에만 제의를 베풀고 있다.

우불산신제를 주관하는 제주는 매해 음력 팔월 초유일(初酉日)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와 유림회 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 제주의 선정 기준은 그해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마을의 발전에 공헌한 이나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깨끗한 이를 가려 선정한다. 제주로 선정된 이는 제를 지내기 사흘 전부터 부정을 가리는 금기를 행하며 제당 주위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을 먼저 가신다. 과거에는 제주의 금기가 제를 지낸 뒤에도 일정 기간 지속되었으나, 근래에는 제를 지낸 뒤 달리 행해지지 않는다. 제의를 베풀 때에는 제주를 비롯하여 마을 주민들도 함께 참여한다. 이때 출산과 혼사는 달리 가리지 않으나 초상과 사고 등 흉사는 가려 흉사가 있는 이는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제의에 진설하는 제물은 녹포(근래에는 쇠고기와 돼지머리로 대신함), 생선회 또는 육포, 생[미나리](/topic/미나리), 살짝 익힌 조밥, [수수](/topic/수수)밥, 과일(밤, [대추](/topic/대추), 배, 감, 석류) 등이다. 이를 [음복](/topic/음복)하면 액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긴다. 제의의 절차는 제당에서 산신제만 지내며 제의 방식은 유교식으로 행한다. 제의가 끝난 뒤에는 제물의 일부를 떼어 제당 앞에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시석을 행한 뒤, 우불산신사 안의 부속건물에서 날것으로 올린 제물을 조리하여 제의에 참여한 이들이 제당 옆에 위치한 사찰에서 함께 음복한다. 음복이 끝난 뒤에는 제의를 주관한 우불산신사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총회를 개최한다.

우불산신사의 연원에 대한 구전자료는 주로 조선의 건국주인 태조 [이성계](/topic/이성계)와 연계되어 전해진다. 일설에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전국의 명산들을 돌아보던 중 우불산에 오게 된 이성계가 우불산의 형세가 장엄하고 경관이 수려한 것에 반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발원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조선 왕조가 개창될 무렵 이성계가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다가 우불산에 산신이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제를 지냈는데, 이후 우불산신의 도움으로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가 명을 내려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고 유림들로 하여금 봄․가을 정일에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우불산신의 영험함에 대한 구전자료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일본군을 응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먼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우불산 남쪽에 진을 치자 우불산신이 신풍(神風)을 일으켜 왜병들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있던 어느해 울산부 서면장(西面將)이 우불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왜병들이 지경고개를 넘어 화승총을 쏘면서 우불산성으로 쳐들어 왔다. 바로 그때 남루한 차림의 한 도인이 걸어와 왜병들을 바라보며 필묵으로 글을 쓰고는 글쓴 종이를 손에 들고 하늘로 날렸다. 그러자 도인이 글을 쓴 종이가 바람에 실려 대운산 상봉에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낙엽이 왜병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는데 떨어진 낙엽은 모두 병졸로 변하여 왜군들과 대적해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병을 섬멸시킨 바람을 우불산신이 현신하여 일으킨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이라 하고 패한 왜병들의 시신이 쌓여 있던 곳을 왜시등(倭屍嶝)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 지역에 부임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인과 가족들이 해를 입어 일본인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특히 우불산신사가 있는 곳은 함부로 지나[가지](/topic/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우불산신의 [영험담](/topic/영험담)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우불산신사를 강제로 헐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이 [신벌](/topic/신벌)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나서지 못하자 윤씨라는 사람이 큰소리를 치며 앞에 나서 [사당](/topic/사당)을 허물기 위해 기왓장을 뜯었다. 그런데 얼마 후 기왓장을 뜯은 윤씨는 갑자기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으며, 이 일을 지휘했던 일본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한편, 우불산 앞길에는 아[무리](/topic/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를 어기고 말을 탄 채 지나가다가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는 경상감사 양씨가 이러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면서도 우불산신을 믿지 않고 이 같은 사실을 의심하여 말을 탄 채 제당 앞으로 지나갔다. 그러자 홀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산꼭대기에 뜨더니 맹호로 돌변해 무례하게 말을 타고 제당 앞을 지나간 경상감사 양씨를 물어 죽였다. 그 무덤이 아직도 웅촌면 검단리 산기슭에 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양산군지 (양산군, 1989)
땅이름 울산사랑 (강길부, 도서출판 정도, 2002)
역사우불산신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불산의 옛 명칭은 우화(于火)이며 24 소사(小祀) 증 하나로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이월에 제의를 올렸다고 하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기우제의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소사에 산악신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이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를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태종실록』 권1 태종 14년 8월 신유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신라시대와 같이 우불산신제가 소사로 받들어졌고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울산군 사묘조에 보면 우불산신사는 1623년(인조 1)에 세워졌으며, 1644년(인조 22)에 제사(齊舍) 세 칸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이월과 팔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하였다.

조선시대 우불산은 울산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근대 이후 행적구역이 개편되면서 지금은 양산시에 편입되어 있다.

우불산신사는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건물을 191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74년에 중수하였다. 중수할 당시 제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형태의 목조건물로 무[단청](/topic/단청)이었으며, 제당 출입문 위에는 ‘우불산신사(于弗山神祀)’라는 나무[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에서 다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우불산신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수 전과 대비해 그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은 제당의 건물에 색을 입히고 단청으로 장식한 변화와 제당 출입문 위의 현판이 ‘우불신사(于弗神祀)’로 교체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제당에 오르는 [계단](/topic/계단)과 [기단](/topic/기단)의 일부를 시멘트에서 돌로 교체하거나 제당 출입문에 유리를 부착하고 [담장](/topic/담장)에 [기와](/topic/기와)를 얹어 마감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역사우불산신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불산의 옛 명칭은 우화(于火)이며 24 소사(小祀) 증 하나로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이월에 제의를 올렸다고 하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기우제의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소사에 산악신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이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를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태종실록』 권1 태종 14년 8월 신유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신라시대와 같이 우불산신제가 소사로 받들어졌고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울산군 사묘조에 보면 우불산신사는 1623년(인조 1)에 세워졌으며, 1644년(인조 22)에 제사(齊舍) 세 칸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이월과 팔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하였다.

조선시대 우불산은 울산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근대 이후 행적구역이 개편되면서 지금은 양산시에 편입되어 있다.

우불산신사는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건물을 191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74년에 중수하였다. 중수할 당시 제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형태의 목조건물로 무[단청](/topic/단청)이었으며, 제당 출입문 위에는 ‘우불산신사(于弗山神祀)’라는 나무[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에서 다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우불산신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수 전과 대비해 그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은 제당의 건물에 색을 입히고 단청으로 장식한 변화와 제당 출입문 위의 현판이 ‘우불신사(于弗神祀)’로 교체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제당에 오르는 [계단](/topic/계단)과 [기단](/topic/기단)의 일부를 시멘트에서 돌로 교체하거나 제당 출입문에 유리를 부착하고 [담장](/topic/담장)에 [기와](/topic/기와)를 얹어 마감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형태우불산신사는 정면에 석축 [기단](/topic/기단) 위에 우불산신을 모시는 앞면 3.7ⅿ, 옆면 2ⅿ 규모의 제당과 출입문 측면에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topic/제물)을 조리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당은 [단청](/topic/단청)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형태이며 중앙에 ‘우불신사(于弗神祀)’라고 쓴 나무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다. 우불산신사 주위에는 [돌담](/topic/돌담)에 [기와](/topic/기와)로 장식한 [담장](/topic/담장)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출입문 앞쪽으로 수령이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우불산신사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개천은 [명주](/topic/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형태우불산신사는 정면에 석축 [기단](/topic/기단) 위에 우불산신을 모시는 앞면 3.7ⅿ, 옆면 2ⅿ 규모의 제당과 출입문 측면에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topic/제물)을 조리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당은 [단청](/topic/단청)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형태이며 중앙에 ‘우불신사(于弗神祀)’라고 쓴 나무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다. 우불산신사 주위에는 [돌담](/topic/돌담)에 [기와](/topic/기와)로 장식한 [담장](/topic/담장)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출입문 앞쪽으로 수령이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우불산신사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개천은 [명주](/topic/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신구문화사제주도무속자료사전현용준1980
제주전통문화연구소제주도 큰굿자료문무병 외2001
민속원한국의 굿문무병 외2002
민속원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문무병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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