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운산2리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예산군 광시면 운산2리 [마을](/topic/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초닷샛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지내는 산신제.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 중앙 느티나무 앞에서 [거리제](/topic/거리제)인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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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광시면 운산2리 [마을](/topic/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초닷샛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지내는 산신제.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 중앙 느티나무 앞에서 [거리제](/topic/거리제)인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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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정의예산군 광시면 운산2리 [마을](/topic/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초닷샛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지내는 산신제.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 중앙 느티나무 앞에서 [거리제](/topic/거리제)인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낸다.
정의예산군 광시면 운산2리 [마을](/topic/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초닷샛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지내는 산신제.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 중앙 느티나무 앞에서 [거리제](/topic/거리제)인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낸다.
내용산제당은 [마을](/topic/마을) 뒤의 소쟁이산 중턱에 위치한다. 운산리에는 산제를 지내는 산제당과 제사 준비를 하는 산제당집으로 나뉘어 있다. 산제당 아래에 산제당집이 있다. 산제당집은 방과 [부엌](/topic/부엌)이 있는 두 칸 집이다. 안에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제기가 잘 보관되어 있다. 이곳은 산제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고 [제관](/topic/제관)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제당의 오른편에는 산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산제당 샘’이 있다. 이 [우물](/topic/우물)은 떡을 찌거나 메를 지을 때 사용한다. 이 밖에 통돼지를 잡을 때 사용하는 샘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마을에서 음력 섣달 스무날에서 그믐날 사이에 학식이 있는 분이 책력을 봐서 [제일](/topic/제일)(祭日)을 정한다. 대개 음력 정월 초열흘날 이전의 좋은 날로 택한다. 제일뿐만 아니라 산제를 주관할 제관(祭官)도 선정한다. 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사람 가운데 연장자가 하며, 부정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외출을 삼가는 등 몸을 조심한다. 산제일이 가까워오면 도시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까지도 마을에 와서 함께 정성을 드린다. 제를 지낼 때 외지인은 마을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산제들기’를 한다. 산제들기는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올해의 산신제에 참여하겠다고 의사표명을 하는 것이다. 산제에 들었는데 특별히 효험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듬해에 산제들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을에 거주하다가 [이사](/topic/이사)를 간 사람이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산제에 들겠다고 비용을 보내오면 소지를 올려준다. 산제에 든 사람을 ‘산제원’이라고 하며, 산제원은 남자만이 참여할 수 있다. 현재 마을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산제에 든다.

제비(祭費)는 산제답(山祭畓)에서 나온 도조(賭租)와 주민들에게 갹출한 돈으로 충당한다. 먼저 산제답은 산제당집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topic/계단)식의 논으로, 다섯 다랑이가 있다. 주민들이 갹출하는 비용은 해마다 다르다. 보통 가구당 5,000원을 추렴한다. 마을 주민들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을 낸다’고 한다. 제비를 내면 소지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외지로 나간 마을 사람들도 설에 귀향하여 동네 주민이나 가족들에게 소지 비용을 맡겨서 제비로 충당하도록 한다.

제비가 마련되면 통돼지․떡․삼색실과․식혜․포․메․탕․두부 등 제물과 [시접](/topic/시접)(匙楪)․소지종이 등을 장만한다. 제물은 모두 여섯 몫으로 산제당과 오방(五方)에 각각 놓을 것을 준비한다. 소 값이 저렴한 경우에는 통돼지 대신 통소를 잡아 올리기도 한다. 통돼지나 통소를 잡으면 머리는 산제당, 네 다리는 사방, 뱃살은 중앙에 각각 올린다.

산신제 하루 전날에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들은 산제당 샘을 깨끗하게 치우고, 산제당집과 자연제당의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리고 제사 당일 오전 여섯 시에 제관과 몸이 깨끗한 일부 마을 사람들이 산제당에 오른다. 이들은 제당을 청소하고 목욕재계를 한 이후에 제물을 장만한다.

산제원들은 산제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가장 먼저 [황토](/topic/황토)를 구해온다. 구해온 황토를 [대문](/topic/대문) 앞 양쪽으로 세 무더기씩 놓는다. 황토를 놓는 이유는 부정한 사람이나 피를 본 사람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예전에는 대문에 [금줄](/topic/금줄)도 둘렀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의 준비는 크게 산제당집 안에서 하는 것과 밖에서 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산제당집 안에서는 위목을 작성하고 소지명단을 확인한다. 그리고 제물을 준비한다. 밖에서는 돼지를 잡고, 제기를 씻고, 산신제를 지낼 때 불편이 없도록 전기시설을 마련한다.

산제당 밖에서의 제의 준비는 다음과 같다. 산제를 지낼 때 올리는 돼지는 ‘산제톷’이라고 부른다. 산제톷은 거세를 하지 않은 수퇘지를 사용한다. 산제당에는 절대로 여자가 갈 수 없으며, 수퇘지를 거세하면 암컷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색깔이 까만 ‘꺼먹돼지’나 ‘밤돼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요즘은 꺼먹돼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백돼지를 사용한다.

돼지를 잡으면 뜨거운 물을 부어서 손으로 털을 말끔하게 제거하고 머리를 베어낸다. 그리고 정수리에 식칼을 꽂아서 산제당집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가 제의가 시작되면 제관이 맨 앞에 서서 돼지머리를 들고 올라간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 배 부분의 고기를 떼어낸다. 이를 ‘업장’이라고 부르며 ‘중앙황제지신(中央黃帝地神)’에게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다.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여섯 조각으로 나눈다. 두 앞다리는 각각 동방과 서방, 두 뒷다리는 각각 남방과 북방에 두고 오방돌기를 할 때 제물로 올린다.

한편 산신제에 올릴 떡, 오방메, 산신메, 식혜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쌀이 두 말 정도 소요된다. 산제에 올리는 떡은 멥쌀과 콩을 섞어서 만든다. 분량은 10㎏ 정도 된다. 예전에는 직접 산제당집에서 [절구](/topic/절구)질을 하여 떡을 쪘으나 요즘은 방앗간에 주문한다. 오방메는 6㎏ 분량, 산신메는 한 되 서 홉 분량이다. 나머지는 식혜를 만든다. 산신메는 예전 샘 옆자리, 오방메는 부엌에서 각각 짓는다.

운산리에서는 산제에 두부탕을 올린다. 두부는 마을에서 제의 당일에 만들어서 사용한다. 북어는 따뜻한 물에 불려 두었다가 나무몽둥이로 두들겨 껍질을 벗긴다. [제상](/topic/제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올린다. 예전에는 산제당집 주변의 나뭇[가지](/topic/가지)를 잘라 젓가락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동네에 여유 비용이 있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산제당이나 산제당집 주변에서 제의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근처의 산에 가서 사철나무인 소나무나 대나무를 잘라 온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깃대’라고 부른다.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낼 때 각 방위에 도착하면 그 방위의 신목을 깃대에 달고 제사를 지낸다. 산제당집 안에서는 위목(位目)을 작성한다.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쓰면 이것을 바로 제단에 있는 바위에 붙여 놓는다. 그리고 동방청제지신(東方靑帝之神), 서방백제지신(西方白帝之神), 남방적제지신(南方赤帝之神), 북방흑제지신(北方黑帝之神), 중앙황제지신(中央黃帝之神) 등을 작성한다.

산제당에서는 [담배](/topic/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제의를 준비하다가 피가 나는 경우 그 사람은 바로 산제당을 내려가야 한다. 산제에 올릴 통돼지와 떡․탕 등이 마련되면 점심을 먹는다. 제의 당일에는 모든 마을 사람이 비린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점심은 비리지 않은 음식으로 간단하게 차린다.

모든 제의 준비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난 오후 6시쯤부터 산신제를 지낸다. 제를 올리기 전에 제관은 마지막으로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한 다음 [제복](/topic/제복)으로 갈아입고 산신제에 임한다. 먼저 제관이 맨 앞에 돼지머리를 들고 올라가면 그 뒤에 다른 사람들도 각자 제물 등을 들고 뒤따라 올라간다. 제관 일행이 제물을 들고 산제당에 도착하면 다음과 같이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이 진설되고 제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면 제관 일행은 재배를 한다. 재배를 한 다음에 축관이 [축문](/topic/축문)을 읽는다.

운산2리 산신제 축문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初五日乙卯
幼學○○○ 敢昭告于
皇天后土明山大川之神
乾大坤地 止以靜軆 一氣所周 成形理賊
資始資生 動則有聲 五行旣均 尊我生民
民人攸告 陰陽失宜 降厲非時 維時維靈
家國賴興 灾殃頻仍 象凜不保 伊祈伊禱
時惟孟春 齊一殫心 以幣以牲 神監在玆
恭修明禋 恐非循因 物薄誠賟 載揚載顯
賜福孔嘉 冀蒙神休 靡忱曷報謹告虔告 尙饗

[독축](/topic/독축)이 끝나면 제관 일행이 재배한 다음 산제당집으로 내려온다. 제관 일행이 내려오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원래 산제당에서 올려야 하지만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산제당집에서 올린다. 소지는 산제에 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제관뿐만 아니라 여타의 산제원들도 함께 참여하여 올린다. 소지의 내용은 주로 안과태평(安過太平), 운수대통(運數大通), 재액소멸(災厄消滅) 등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산제원들이 소지를 올릴 때 제관은 뒤에서 모든 액을 소멸해 달라는 의미로 ‘초록방’을 읊는다. 초록방은 “幼學 ○○○ 家內眷蜀保體 官灾口舌 三灾八亂 四百四病 一時尼消滅”이다. 초록방을 읊어서 액을 소멸한 다음에 소지를 올려 복을 비는 것이기 때문에 소지보다 초록방을 빨리 읽어야 한다.

소지와 초록방 읊기를 다한 제관 일행은 다시 산제당으로 올라가 재배를 한다. 이렇게 하면 산신제가 끝난다. 제관 일행은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한 다음 제물을 들고 산제당집으로 내려온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오방에 올릴 제물을 [고리짝](/topic/고리짝)에 담아서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마을로 내려와 오방제를 지낸다. 오방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두 패로 갈라 동쪽과 서쪽으로 간다. 동쪽과 서쪽에서 제사가 끝나면 산제당으로 돌아와 다시 제물을 지고 동쪽 패는 남쪽, 서쪽 패는 북쪽으로 각각 간 함께 제사를 지낸다. 동쪽은 ‘동방청제지신’으로 천태리와 경계를 지고 있는 ‘동달’에서 지내고, 남방은 ‘남방적제지신’으로 ‘두줍메’에서 지낸다. ‘두줍메’는 두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서방은 ‘서방백제지신’으로 ‘서달’의 공판[마당](/topic/마당) 서낭 근처에서 지낸다. 공판마당은 산 위에 공을 찰 수 있을 정도로 평편한 공터이다. 북방은 ‘북방흑제지신’으로 정주나무반의 ‘우묵고개’에서 지낸다. ‘우묵고개’는 두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이어서 ‘우물고개’라고도 부른다. 중앙은 ‘중앙황제지신’으로 마을회관 뒤쪽의 길가에서 지낸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오방을 모두 돌지 않고 산제당과 중앙에서 각각 한 번만 하는 것으로 간소화하였다.
오방제의 순서는 산신제와 동일하다. 다만 축문의 내용이 산신제와 다르다.

운산2리 동방청제지신제 축문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初五日乙卯
幼學 ○○○ 敢昭告于
東方靑帝之神 南方赤帝之神
西方白帝之神 北方黑帝之神 中央黃帝之神
地有定名 比厥生靈 六氣不和 降厲非常
方分五位 咸安其地 五行失宜 人心凜危
有願攸應 金木水火 信墍于土 寔贊陰功
亶行祀事 仁義禮智 有靈各守 黙垂冥佑
維時孟春 楮幣脯菓 疾邪疫送 方里及井
敢陳菲薄 庶幾來格 攸伏攸畏 一心齊氣
展誠思報 載薦明禋 以祀以禱 敬伸虔告 尙饗

축문을 읊은 다음에는 위목을 떼어내어 소각한다. 독축이 끝나면 옆에서 제관이 초록방을 읊으며 산제원들은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모두 올린 제관 일행은 다음 제장으로 옮겨간다. 오방제가 모두 끝나면 제관 일행은 다시 산제당집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제관 일행은 제비를 낸 사람들에게 봉송(奉送)할 음식을 일일이 나누어 담는다. 그런 다음 밤을 지새우고 아침 10시가 넘어서야 마을로 내려온다.

한편 마을에는 산제가 중단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구리미’라는 곳에 임병구라는 사람의 부친이 살았다. 어느 날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현재의 광시면 소재지로 끌고 갔다. 일본 경찰은 그를 죽이려고 총을 머리에 겨누고 발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총부리가 부러져서 임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상히 여긴 경찰이 “너는 누구를 모시는 사람이냐?”라고 묻자 임병구의 아버지는 “나는 산신(山神)을 모시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산신의 무서움을 알고 그를 풀어 주었다. 그 즈음에 운산리 주민들은 산신제를 중단하려고 하였으나 산신의 영험함과 음덕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계속해서 제의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가 끝날 무렵에 소지불이 훤하게 오르면 각 가정에서는 집안의 평안과 자손의 건강을 기원하는 ‘맞시루’를 올린다.<ㅑ
참고문헌내포지역 [마을](/topic/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내용산제당은 [마을](/topic/마을) 뒤의 소쟁이산 중턱에 위치한다. 운산리에는 산제를 지내는 산제당과 제사 준비를 하는 산제당집으로 나뉘어 있다. 산제당 아래에 산제당집이 있다. 산제당집은 방과 [부엌](/topic/부엌)이 있는 두 칸 집이다. 안에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제기가 잘 보관되어 있다. 이곳은 산제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고 [제관](/topic/제관)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제당의 오른편에는 산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산제당 샘’이 있다. 이 [우물](/topic/우물)은 떡을 찌거나 메를 지을 때 사용한다. 이 밖에 통돼지를 잡을 때 사용하는 샘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마을에서 음력 섣달 스무날에서 그믐날 사이에 학식이 있는 분이 책력을 봐서 [제일](/topic/제일)(祭日)을 정한다. 대개 음력 정월 초열흘날 이전의 좋은 날로 택한다. 제일뿐만 아니라 산제를 주관할 제관(祭官)도 선정한다. 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사람 가운데 연장자가 하며, 부정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외출을 삼가는 등 몸을 조심한다. 산제일이 가까워오면 도시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까지도 마을에 와서 함께 정성을 드린다. 제를 지낼 때 외지인은 마을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산제들기’를 한다. 산제들기는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올해의 산신제에 참여하겠다고 의사표명을 하는 것이다. 산제에 들었는데 특별히 효험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듬해에 산제들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을에 거주하다가 [이사](/topic/이사)를 간 사람이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산제에 들겠다고 비용을 보내오면 소지를 올려준다. 산제에 든 사람을 ‘산제원’이라고 하며, 산제원은 남자만이 참여할 수 있다. 현재 마을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산제에 든다.

제비(祭費)는 산제답(山祭畓)에서 나온 도조(賭租)와 주민들에게 갹출한 돈으로 충당한다. 먼저 산제답은 산제당집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topic/계단)식의 논으로, 다섯 다랑이가 있다. 주민들이 갹출하는 비용은 해마다 다르다. 보통 가구당 5,000원을 추렴한다. 마을 주민들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을 낸다’고 한다. 제비를 내면 소지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외지로 나간 마을 사람들도 설에 귀향하여 동네 주민이나 가족들에게 소지 비용을 맡겨서 제비로 충당하도록 한다.

제비가 마련되면 통돼지․떡․삼색실과․식혜․포․메․탕․두부 등 제물과 [시접](/topic/시접)(匙楪)․소지종이 등을 장만한다. 제물은 모두 여섯 몫으로 산제당과 오방(五方)에 각각 놓을 것을 준비한다. 소 값이 저렴한 경우에는 통돼지 대신 통소를 잡아 올리기도 한다. 통돼지나 통소를 잡으면 머리는 산제당, 네 다리는 사방, 뱃살은 중앙에 각각 올린다.

산신제 하루 전날에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들은 산제당 샘을 깨끗하게 치우고, 산제당집과 자연제당의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리고 제사 당일 오전 여섯 시에 제관과 몸이 깨끗한 일부 마을 사람들이 산제당에 오른다. 이들은 제당을 청소하고 목욕재계를 한 이후에 제물을 장만한다.

산제원들은 산제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가장 먼저 [황토](/topic/황토)를 구해온다. 구해온 황토를 [대문](/topic/대문) 앞 양쪽으로 세 무더기씩 놓는다. 황토를 놓는 이유는 부정한 사람이나 피를 본 사람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예전에는 대문에 [금줄](/topic/금줄)도 둘렀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의 준비는 크게 산제당집 안에서 하는 것과 밖에서 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산제당집 안에서는 위목을 작성하고 소지명단을 확인한다. 그리고 제물을 준비한다. 밖에서는 돼지를 잡고, 제기를 씻고, 산신제를 지낼 때 불편이 없도록 전기시설을 마련한다.

산제당 밖에서의 제의 준비는 다음과 같다. 산제를 지낼 때 올리는 돼지는 ‘산제톷’이라고 부른다. 산제톷은 거세를 하지 않은 수퇘지를 사용한다. 산제당에는 절대로 여자가 갈 수 없으며, 수퇘지를 거세하면 암컷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색깔이 까만 ‘꺼먹돼지’나 ‘밤돼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요즘은 꺼먹돼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백돼지를 사용한다.

돼지를 잡으면 뜨거운 물을 부어서 손으로 털을 말끔하게 제거하고 머리를 베어낸다. 그리고 정수리에 식칼을 꽂아서 산제당집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가 제의가 시작되면 제관이 맨 앞에 서서 돼지머리를 들고 올라간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 배 부분의 고기를 떼어낸다. 이를 ‘업장’이라고 부르며 ‘중앙황제지신(中央黃帝地神)’에게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다.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여섯 조각으로 나눈다. 두 앞다리는 각각 동방과 서방, 두 뒷다리는 각각 남방과 북방에 두고 오방돌기를 할 때 제물로 올린다.

한편 산신제에 올릴 떡, 오방메, 산신메, 식혜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쌀이 두 말 정도 소요된다. 산제에 올리는 떡은 멥쌀과 콩을 섞어서 만든다. 분량은 10㎏ 정도 된다. 예전에는 직접 산제당집에서 [절구](/topic/절구)질을 하여 떡을 쪘으나 요즘은 방앗간에 주문한다. 오방메는 6㎏ 분량, 산신메는 한 되 서 홉 분량이다. 나머지는 식혜를 만든다. 산신메는 예전 샘 옆자리, 오방메는 부엌에서 각각 짓는다.

운산리에서는 산제에 두부탕을 올린다. 두부는 마을에서 제의 당일에 만들어서 사용한다. 북어는 따뜻한 물에 불려 두었다가 나무몽둥이로 두들겨 껍질을 벗긴다. [제상](/topic/제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올린다. 예전에는 산제당집 주변의 나뭇[가지](/topic/가지)를 잘라 젓가락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동네에 여유 비용이 있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산제당이나 산제당집 주변에서 제의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근처의 산에 가서 사철나무인 소나무나 대나무를 잘라 온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깃대’라고 부른다.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를 지낼 때 각 방위에 도착하면 그 방위의 신목을 깃대에 달고 제사를 지낸다. 산제당집 안에서는 위목(位目)을 작성한다.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쓰면 이것을 바로 제단에 있는 바위에 붙여 놓는다. 그리고 동방청제지신(東方靑帝之神), 서방백제지신(西方白帝之神), 남방적제지신(南方赤帝之神), 북방흑제지신(北方黑帝之神), 중앙황제지신(中央黃帝之神) 등을 작성한다.

산제당에서는 [담배](/topic/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제의를 준비하다가 피가 나는 경우 그 사람은 바로 산제당을 내려가야 한다. 산제에 올릴 통돼지와 떡․탕 등이 마련되면 점심을 먹는다. 제의 당일에는 모든 마을 사람이 비린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점심은 비리지 않은 음식으로 간단하게 차린다.

모든 제의 준비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난 오후 6시쯤부터 산신제를 지낸다. 제를 올리기 전에 제관은 마지막으로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한 다음 [제복](/topic/제복)으로 갈아입고 산신제에 임한다. 먼저 제관이 맨 앞에 돼지머리를 들고 올라가면 그 뒤에 다른 사람들도 각자 제물 등을 들고 뒤따라 올라간다. 제관 일행이 제물을 들고 산제당에 도착하면 다음과 같이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이 진설되고 제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면 제관 일행은 재배를 한다. 재배를 한 다음에 축관이 [축문](/topic/축문)을 읽는다.

운산2리 산신제 축문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初五日乙卯
幼學○○○ 敢昭告于
皇天后土明山大川之神
乾大坤地 止以靜軆 一氣所周 成形理賊
資始資生 動則有聲 五行旣均 尊我生民
民人攸告 陰陽失宜 降厲非時 維時維靈
家國賴興 灾殃頻仍 象凜不保 伊祈伊禱
時惟孟春 齊一殫心 以幣以牲 神監在玆
恭修明禋 恐非循因 物薄誠賟 載揚載顯
賜福孔嘉 冀蒙神休 靡忱曷報謹告虔告 尙饗

[독축](/topic/독축)이 끝나면 제관 일행이 재배한 다음 산제당집으로 내려온다. 제관 일행이 내려오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원래 산제당에서 올려야 하지만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산제당집에서 올린다. 소지는 산제에 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제관뿐만 아니라 여타의 산제원들도 함께 참여하여 올린다. 소지의 내용은 주로 안과태평(安過太平), 운수대통(運數大通), 재액소멸(災厄消滅) 등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산제원들이 소지를 올릴 때 제관은 뒤에서 모든 액을 소멸해 달라는 의미로 ‘초록방’을 읊는다. 초록방은 “幼學 ○○○ 家內眷蜀保體 官灾口舌 三灾八亂 四百四病 一時尼消滅”이다. 초록방을 읊어서 액을 소멸한 다음에 소지를 올려 복을 비는 것이기 때문에 소지보다 초록방을 빨리 읽어야 한다.

소지와 초록방 읊기를 다한 제관 일행은 다시 산제당으로 올라가 재배를 한다. 이렇게 하면 산신제가 끝난다. 제관 일행은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한 다음 제물을 들고 산제당집으로 내려온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오방에 올릴 제물을 [고리짝](/topic/고리짝)에 담아서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마을로 내려와 오방제를 지낸다. 오방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두 패로 갈라 동쪽과 서쪽으로 간다. 동쪽과 서쪽에서 제사가 끝나면 산제당으로 돌아와 다시 제물을 지고 동쪽 패는 남쪽, 서쪽 패는 북쪽으로 각각 간 함께 제사를 지낸다. 동쪽은 ‘동방청제지신’으로 천태리와 경계를 지고 있는 ‘동달’에서 지내고, 남방은 ‘남방적제지신’으로 ‘두줍메’에서 지낸다. ‘두줍메’는 두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서방은 ‘서방백제지신’으로 ‘서달’의 공판[마당](/topic/마당) 서낭 근처에서 지낸다. 공판마당은 산 위에 공을 찰 수 있을 정도로 평편한 공터이다. 북방은 ‘북방흑제지신’으로 정주나무반의 ‘우묵고개’에서 지낸다. ‘우묵고개’는 두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이어서 ‘우물고개’라고도 부른다. 중앙은 ‘중앙황제지신’으로 마을회관 뒤쪽의 길가에서 지낸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오방을 모두 돌지 않고 산제당과 중앙에서 각각 한 번만 하는 것으로 간소화하였다.
오방제의 순서는 산신제와 동일하다. 다만 축문의 내용이 산신제와 다르다.

운산2리 동방청제지신제 축문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初五日乙卯
幼學 ○○○ 敢昭告于
東方靑帝之神 南方赤帝之神
西方白帝之神 北方黑帝之神 中央黃帝之神
地有定名 比厥生靈 六氣不和 降厲非常
方分五位 咸安其地 五行失宜 人心凜危
有願攸應 金木水火 信墍于土 寔贊陰功
亶行祀事 仁義禮智 有靈各守 黙垂冥佑
維時孟春 楮幣脯菓 疾邪疫送 方里及井
敢陳菲薄 庶幾來格 攸伏攸畏 一心齊氣
展誠思報 載薦明禋 以祀以禱 敬伸虔告 尙饗

축문을 읊은 다음에는 위목을 떼어내어 소각한다. 독축이 끝나면 옆에서 제관이 초록방을 읊으며 산제원들은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모두 올린 제관 일행은 다음 제장으로 옮겨간다. 오방제가 모두 끝나면 제관 일행은 다시 산제당집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제관 일행은 제비를 낸 사람들에게 봉송(奉送)할 음식을 일일이 나누어 담는다. 그런 다음 밤을 지새우고 아침 10시가 넘어서야 마을로 내려온다.

한편 마을에는 산제가 중단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구리미’라는 곳에 임병구라는 사람의 부친이 살았다. 어느 날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현재의 광시면 소재지로 끌고 갔다. 일본 경찰은 그를 죽이려고 총을 머리에 겨누고 발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총부리가 부러져서 임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상히 여긴 경찰이 “너는 누구를 모시는 사람이냐?”라고 묻자 임병구의 아버지는 “나는 산신(山神)을 모시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산신의 무서움을 알고 그를 풀어 주었다. 그 즈음에 운산리 주민들은 산신제를 중단하려고 하였으나 산신의 영험함과 음덕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계속해서 제의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가 끝날 무렵에 소지불이 훤하게 오르면 각 가정에서는 집안의 평안과 자손의 건강을 기원하는 ‘맞시루’를 올린다.<ㅑ
참고문헌내포지역 [마을](/topic/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유래운산2리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산 아래에 있는 [마을](/topic/마을)이기 때문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산신을 모셨다고 한다. 즉 운산2리에서는 호환(虎患)이나 돌림병 등 여러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고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뒷산에 산신, 마을 입구에 거리신인 오방신을 각각 모셨다고 한다.
유래운산2리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산 아래에 있는 [마을](/topic/마을)이기 때문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산신을 모셨다고 한다. 즉 운산2리에서는 호환(虎患)이나 돌림병 등 여러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고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뒷산에 산신, 마을 입구에 거리신인 오방신을 각각 모셨다고 한다.
後漢書
洌陽歲時記
집문당한국무속연구김태곤1981
민족문화사한국민속대사전 1한국민속사전 편찬위원회1991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굿놀이정병호1991
안동대 석사논문연행예술로서 동해안 굿의 변화양상과 변화요인윤동환1999
도서출판 창솔한국민속문화대사전 상김용덕2004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윤동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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