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도동리석장승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당산거리에 있는 2기의 장승. 1992년 11월 30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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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당산거리에 있는 2기의 장승. 1992년 11월 30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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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
정의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당산거리에 있는 2기의 장승. 1992년 11월 30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당산거리에 있는 2기의 장승. 1992년 11월 30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영광 도동리석장승은 당산나무 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불린다. 3m 거리를 두고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할아버지장승과 할머니장승 사이에는 거칠게 다듬은 원통형 돌이 서 있다. 이 또한 장승으로 불린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이 작은 장승을 ‘애[기장](/topic/기장)생’ 또는 ‘말막뚝이’라고도 한다. 이들 3기를 통칭하여 ‘장승’ 또는 ‘대장돌’이라고 한다.

통상 장승이나 대장돌로 불리는 입석으로, 마을수호신격에 해당된다. 특히 득남을 기원하는 기자신앙석(祈子信仰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립 연대로 보아 천연두(天然痘)를 막기 위해 세운 장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광읍 단주리의 목장승과 묘량면 영당마을의 목장승이 천연두 등 질병 예방을 위해 세웠다는 내용이 구전되고 있다.

1996년 이후로 도동리석장승과 관련한 의례는 중단되었다. 할아버지장승의 전체적인 형태는 시묘석인(侍墓石人)의 [문인석](/topic/문인석)(文人石) 형상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유건](/topic/유건)(儒巾)을 썼으며, 양각(陽刻)으로 튀어나온 두 눈은 부리부리하다. 균형 잡힌 코에서도 위엄을 읽을 수 있다. 아랫입술까지 새긴 입은 반쯤 벌어졌으며, 이빨이 새겨져 있다. 얼굴 밑 부분에는 홀(笏)로 추정되는 조각도 보인다.

1987년 이전까지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장승과 당산나무 아래서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 절차는 일반적인 마을의 당산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산 주위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리고 흰 종이를 끼운 왼새끼줄을 묶어 당산나무와 장승을 일시적 보호공간으로 격리한다. [제관](/topic/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으로 선택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제물](/topic/제물)을 준비하고 제의를 시작한다. 흰떡, 콩나물, [녹두](/topic/녹두)나물, 돼지머리, 조기, 상어, 청어, 삼색실과 등 제물을 준비한다. 메를 진설하고 나면 [축문](/topic/축문)을 읽어 신격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구한다. 당산제의 비용은 통상 [인구전](/topic/인구전)(人口錢) 등으로 호명되는 호당갹출(戶當醵出) 방식을 택했다.

당산제가 끝나면 가가호호 [[마당](/topic/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연행했다. 매굿패의 구성은 [꽹과리](/topic/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topic/소고), [나발](/topic/나발) 등을 중심으로 [잡색](/topic/잡색)(雜色)들이 뒤를 이었다. 잡색은 [양반](/topic/양반), 참봉, [할미](/topic/할미), 포수, 초랭이, 창부, 중, [각시](/topic/각시)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악대의 복색은 [쾌자](/topic/쾌자)를 덧입고 그 위에 청·홍·황색의 띠를 둘렀으며, 쇠잡이를 제외한 전원이 [고깔](/topic/고깔)을 착용했다.

당산제가 끝나면 남녀로 편을 갈라 외줄다리기를 했다. 스무 살 이전의 총각들은 모두 여자 편에 속한다. 대개의 마을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에도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장승 옆에 서 있는 입석(높이 40㎝, 둘레 110㎝)에 입히는 의례를 치fms다. 영광군에는 이러한 줄다리기와 입석감기의 의례가 광범위하게 전승된 것으로 보고된다. 묘량면 영당마을의 수살, 군남면 동월리 치산마을 할아버지 및 할머니당산의 선돌, 홍농읍 진덕리 진정마을의 입석, 군남면 반안리 안수마을의 할머니당산인 오릿대에 줄 감는 풍습 등은 도동리의 장승과 더불어 이러한 전통의 맥을 이어 오는 사례이다.
참고문헌남녘의 벅수 (이종철 외, 호남문화사, 1990)
벅수와 장승 (김두하, 1990)
영광군 문화유적 학술조사 (전남대박물관, 영광군, 1993)
영광군의 장승유적 (강현구, 전남문화재 6, 전라남도, 1993)
옥당골 영광향토문화[사료](/topic/사료)집 12 (영광문화원, 1994)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내용영광 도동리석장승은 당산나무 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불린다. 3m 거리를 두고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할아버지장승과 할머니장승 사이에는 거칠게 다듬은 원통형 돌이 서 있다. 이 또한 장승으로 불린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이 작은 장승을 ‘애[기장](/topic/기장)생’ 또는 ‘말막뚝이’라고도 한다. 이들 3기를 통칭하여 ‘장승’ 또는 ‘대장돌’이라고 한다.

통상 장승이나 대장돌로 불리는 입석으로, 마을수호신격에 해당된다. 특히 득남을 기원하는 기자신앙석(祈子信仰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립 연대로 보아 천연두(天然痘)를 막기 위해 세운 장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광읍 단주리의 목장승과 묘량면 영당마을의 목장승이 천연두 등 질병 예방을 위해 세웠다는 내용이 구전되고 있다.

1996년 이후로 도동리석장승과 관련한 의례는 중단되었다. 할아버지장승의 전체적인 형태는 시묘석인(侍墓石人)의 [문인석](/topic/문인석)(文人石) 형상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유건](/topic/유건)(儒巾)을 썼으며, 양각(陽刻)으로 튀어나온 두 눈은 부리부리하다. 균형 잡힌 코에서도 위엄을 읽을 수 있다. 아랫입술까지 새긴 입은 반쯤 벌어졌으며, 이빨이 새겨져 있다. 얼굴 밑 부분에는 홀(笏)로 추정되는 조각도 보인다.

1987년 이전까지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장승과 당산나무 아래서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 절차는 일반적인 마을의 당산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산 주위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리고 흰 종이를 끼운 왼새끼줄을 묶어 당산나무와 장승을 일시적 보호공간으로 격리한다. [제관](/topic/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으로 선택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제물](/topic/제물)을 준비하고 제의를 시작한다. 흰떡, 콩나물, [녹두](/topic/녹두)나물, 돼지머리, 조기, 상어, 청어, 삼색실과 등 제물을 준비한다. 메를 진설하고 나면 [축문](/topic/축문)을 읽어 신격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구한다. 당산제의 비용은 통상 [인구전](/topic/인구전)(人口錢) 등으로 호명되는 호당갹출(戶當醵出) 방식을 택했다.

당산제가 끝나면 가가호호 [[마당](/topic/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연행했다. 매굿패의 구성은 [꽹과리](/topic/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topic/소고), [나발](/topic/나발) 등을 중심으로 [잡색](/topic/잡색)(雜色)들이 뒤를 이었다. 잡색은 [양반](/topic/양반), 참봉, [할미](/topic/할미), 포수, 초랭이, 창부, 중, [각시](/topic/각시)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악대의 복색은 [쾌자](/topic/쾌자)를 덧입고 그 위에 청·홍·황색의 띠를 둘렀으며, 쇠잡이를 제외한 전원이 [고깔](/topic/고깔)을 착용했다.

당산제가 끝나면 남녀로 편을 갈라 외줄다리기를 했다. 스무 살 이전의 총각들은 모두 여자 편에 속한다. 대개의 마을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에도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장승 옆에 서 있는 입석(높이 40㎝, 둘레 110㎝)에 입히는 의례를 치fms다. 영광군에는 이러한 줄다리기와 입석감기의 의례가 광범위하게 전승된 것으로 보고된다. 묘량면 영당마을의 수살, 군남면 동월리 치산마을 할아버지 및 할머니당산의 선돌, 홍농읍 진덕리 진정마을의 입석, 군남면 반안리 안수마을의 할머니당산인 오릿대에 줄 감는 풍습 등은 도동리의 장승과 더불어 이러한 전통의 맥을 이어 오는 사례이다.
참고문헌남녘의 벅수 (이종철 외, 호남문화사, 1990)
벅수와 장승 (김두하, 1990)
영광군 문화유적 학술조사 (전남대박물관, 영광군, 1993)
영광군의 장승유적 (강현구, 전남문화재 6, 전라남도, 1993)
옥당골 영광향토문화[사료](/topic/사료)집 12 (영광문화원, 1994)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형태석장승은 영광읍 도동리의 천주교회 입구에 있다. 예전에 우시장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장승뿐만 아니라 당산나무도 있다. 얼마 전에 군내버스 정류소가 생기고 시장통과 맞닿아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본래는 장승 셋이 큰길 쪽 방향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으나 오래전에 도로를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함께 서 있는 당산나무는 매우 오래된 팽나무이다.

석장승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한 쌍 2기의 형태로 각각 ‘서방대장(西方大將)’, ‘동방대장(東方大將)’으로 불린다. 1987년 조사에서는 두상 아래 부분이 매몰된 상태였다. 1992년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가 되면서 묻힌 부분을 끌어올렸다. 현재 높이는 145㎝ 크기이다. 서방대장은 높이 180㎝, 두상 길이 80㎝, 두께 25㎝에 달한다. 서방대장의 몸통에 새겨진 ‘도광십이년(道光十二年)’의 ‘도광(道光)’은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연호(年號)이다. 이에 따라 ‘도광십이년’은 조선 순조 32년을 말하며, 1832년에 해당된다.

동방대장은 높이 80㎝, 두상 길이 80㎝, 두께 40㎝ 크기이다. 동방대장이라고 앞면에 새겨진 할아버지장승은 북쪽을 향하여 서 있으며, 음각과 양각으로 얼굴의 윤곽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형적 불균형에서 오는 우직스러움이 느껴지면서도 마음씨 좋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소박한 시골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눈은 둥근 [안경](/topic/안경)을 쓴 듯하고, 코 역시 거의 둥그렇게 처리하여 모난 데가 없다. 초승달처럼 반원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눈, 코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턱 아래 두 줄로 내려뜨린 음각의 자국은 수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마 부분은 [망건](/topic/망건)을 쓴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비스듬히 뒤쪽으로 기울어진 이마는 얼굴 길이만큼 길다.

남향인 할머니장승은 몸통이 사다리꼴로 올라가다가 머리 부분에서 네모꼴로 깎였다. 할아버지 장승이 두꺼운 것에 반해 할머니장승은 두께 18㎝의 판석을 사용했다. 눈과 코는 할아버지장승과 같이 원형으로 그렸으나 입은 기형적으로 크게 네모꼴로 그리고, 그 안에 이빨 모양을 요철형으로 파 놓았다.
형태석장승은 영광읍 도동리의 천주교회 입구에 있다. 예전에 우시장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장승뿐만 아니라 당산나무도 있다. 얼마 전에 군내버스 정류소가 생기고 시장통과 맞닿아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본래는 장승 셋이 큰길 쪽 방향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으나 오래전에 도로를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함께 서 있는 당산나무는 매우 오래된 팽나무이다.

석장승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한 쌍 2기의 형태로 각각 ‘서방대장(西方大將)’, ‘동방대장(東方大將)’으로 불린다. 1987년 조사에서는 두상 아래 부분이 매몰된 상태였다. 1992년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가 되면서 묻힌 부분을 끌어올렸다. 현재 높이는 145㎝ 크기이다. 서방대장은 높이 180㎝, 두상 길이 80㎝, 두께 25㎝에 달한다. 서방대장의 몸통에 새겨진 ‘도광십이년(道光十二年)’의 ‘도광(道光)’은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연호(年號)이다. 이에 따라 ‘도광십이년’은 조선 순조 32년을 말하며, 1832년에 해당된다.

동방대장은 높이 80㎝, 두상 길이 80㎝, 두께 40㎝ 크기이다. 동방대장이라고 앞면에 새겨진 할아버지장승은 북쪽을 향하여 서 있으며, 음각과 양각으로 얼굴의 윤곽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형적 불균형에서 오는 우직스러움이 느껴지면서도 마음씨 좋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소박한 시골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눈은 둥근 [안경](/topic/안경)을 쓴 듯하고, 코 역시 거의 둥그렇게 처리하여 모난 데가 없다. 초승달처럼 반원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눈, 코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턱 아래 두 줄로 내려뜨린 음각의 자국은 수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마 부분은 [망건](/topic/망건)을 쓴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비스듬히 뒤쪽으로 기울어진 이마는 얼굴 길이만큼 길다.

남향인 할머니장승은 몸통이 사다리꼴로 올라가다가 머리 부분에서 네모꼴로 깎였다. 할아버지 장승이 두꺼운 것에 반해 할머니장승은 두께 18㎝의 판석을 사용했다. 눈과 코는 할아버지장승과 같이 원형으로 그렸으나 입은 기형적으로 크게 네모꼴로 그리고, 그 안에 이빨 모양을 요철형으로 파 놓았다.
전통무용연구소진도씻김굿지춘상 외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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