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원수산산신제문서

한국무속신앙사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전승되는 원수산 산신제의 홀기(笏記)와 [축문](/topic/축문) 등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한 동계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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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전승되는 원수산 산신제의 홀기(笏記)와 [축문](/topic/축문) 등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한 동계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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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복
정의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전승되는 원수산 산신제의 홀기(笏記)와 [축문](/topic/축문) 등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한 동계문서.
정의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전승되는 원수산 산신제의 홀기(笏記)와 [축문](/topic/축문) 등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한 동계문서.
내용양화리는 원수산을 등지고 삼기강(三岐江)으로 불리는 금강변의 비옥한 터전에 자리한 [마을](/topic/마을)이다. 일찍이 고려 말엽의 충신이자 부안 임씨의 중시조가 되는 임난수(林蘭秀)가 이곳에 정착한 이래 그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의 취락』에는 충남에서 가장 특색 있는 동족마을의 하나로 양화리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원수산 산신제는 바로 부안 임씨 집성촌인 양화2리 가학동이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동짓달 초에 거행하는 동제이며, ‘원수산산신제문서’는 19세기 산신제에 대한 제반 절차 및 계를 운영하면서 생산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문서의 표제는 ‘산제홀기 병축문 산신□□헌취위궤(山祭笏記 倂祝文 山神□□獻就位詭)’로 되어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산제사완정일십일월초삼일(山祭祀元定日十一月初三日)’이라 하여 산제일을 명기하고, 그 뒤에 「제물진설도」, 「산제홀기」, 「산제축문」 등이 기록되었다.

[축문](/topic/축문) 옆에 ‘병자시월이십이[일경](/topic/일경)초(丙子十月二十二日敬抄)’라고 명기한 것으로 보아 1876년 또는 1816년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효(孝)․우(友)․제(悌)․목(睦)․임(任)․휼(恤)의 육행지목(六行之目)과 불효(不孝)․불우(不友),․부제(不悌)․불임(不任)․불휼(不恤)․불화(不和)․불경(不敬)의 팔형지목(八刑之目), 제사필치성(祭祀必致誠)․인리상교조(隣里相校助)․의관필정제(衣冠必整齊) 삼건행실지목(三件行實之目) 등의 지켜야 할 덕목, 「종중통문(宗中通文)」, 「계후포양공사(稧後褒揚公事)」, 「분급사(分給事)」를 기재하였다.

그리고 병진년(1856년 추정) 이후로 병자년(1936년 추정)까지 동계의 논의사항을 정리한 「수계사(修稧事)」를 매년 기록하였다. 「수계사」에는 추봉조(秋捧租), 추봉전(秋捧錢), 분급사(分給事), 제후공사(祭後公事), 계후공사(稧後公事), 상벌공사(賞罰公事), 임원명단 등 동계 기금의 식리와 수입 지출에 대한 기록 및 상벌을 준 계원의 명단이 기재되었다. 이와 함께 첨부된 고소장은 연기군 남면 가학동 통장 임노원 등이 본동의 원수산 산제는 수백 년을 이어온 규례이므로 여기에 필요한 소의 도살을 허락해 줄 것을 1907년(융희 원년) 11월 30일 군수서리에게 청원한 것이다. 좌측에는 같은 날 군수서리가 처결한 제사(題辭)가 있다.

원수산 산제홀기는 조선 후기 유교식 산신제의 전범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행례절차는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와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홀기에 기록된 산신제의 행례절차는 제집사와 축관이 제단 앞뜰에 차례로 도열해 있다가 손을 씻고 제물을 진설한 다음, 집례가 부르는 홀에 따라 [참신](/topic/참신)례(參神禮)-강신례(降神禮)-[초헌](/topic/초헌)례(初獻禮)-[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례(亞獻禮)-[종헌](/topic/종헌)례(終獻禮)-사신례(辭神禮)-[음복](/topic/음복)례(飮福禮)-[분축](/topic/분축)(焚祝)-망예례(望瘞禮)-소지(燒紙)의 순으로 진행된다. 또한 홀기에 등장하는 [제관](/topic/제관)은 축승(祝陞),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봉로(奉爐), 봉향(奉香), 봉잔(奉盞), 전잔(奠盞), 사준(司罇), 집례(執禮) 등인데, 행례절차에 따른 각 제관과 집사의 역할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이로써 원수산 산제홀기는 성균관이나 향교의 석전홀기(釋奠笏記) 또는 서원․사우의 제향홀기를 상당부분 마을 차원의 산신제에 걸맞게 준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제물진설도」에 나타난 원수산 산신제의 제물은 다음과 같다.

![마을신앙 연기원수산산신제문서](/upload/img/20170106/20170106144425_t_.jpg)

원수산산신제문서는 조선 후기 주변마을이 산신제를 주관할 목적으로 동계(산제계)를 운영하였음을 보여준다. 문서에는 여기에 참여한 마을로 월룡(月龍)․학천(鶴川, 궉말)․상촌(上村)․복룡(伏龍)․원곡(元谷, 원사골)․학동(鶴洞)․외삼(外三) 등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양화리 임헌우(1914년생) 옹에 따르면 동계가 해체되기 [직전](/topic/직전)인 30여 년 전까지도 양화 2리와 갈운리 원사골․상촌에 거주하는 세대는 대부분 가입되어 있었고, 이웃마을인 진의리 긴여울․성전에서도 일부 세대가 계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절목이나 좌목, 그 내력을 기록한 서문이 전하지 않는 까닭에 동계를 조직한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서만으로도 그것은 적어도 조선 후기의 관행을 계승한 조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계는 상계원(上稧員)과 하계원(下稧員)으로 구분되었다. 상계원이란 사족의 후예인 부안 임씨를 의미하고, 하계원은 그들의 노복이나 [머슴](/topic/머슴)으로 입향한 하층민을 지칭한다. 또한 동계의 운영은 상계원의 자격을 갖춘 마을 사람들이 순번제로 유사와 공원 각 1명을 선정하여 대소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아울러 동계에서는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일 외에, 각 자연마을별로 책임자격인 별임(別任)을 두어 선행을 행한 자와 악행을 저지른 자를 가려서 예속의 교화에 힘썼다. 이에 대해 경신년 11월 19일에 작성된 ‘수계사(修稧事)’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오직 우리 동계는 비단 전곡(錢穀)의 취리(取利)가 공정할 뿐 아니라 오로지 약법(約法)의 상규(相規)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무릇 수년 간 사람들의 마음에 틈이 벌어져 예속이 무너졌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오호라! 이미 지나간 일은 논하지 말고 지금 이후 동계에 속한 각 리별로 별임을 정하여 선행을 행한 자는 칭찬을 해주고, 악행을 범한 자는 징계를 내려 영원히 입법을 좇아 행하도록 한즉 이 역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말할 것이다.

이에 따라 마을별로 별임을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날 월룡별임, 학천별임, 상촌별임, 복룡별임, 원곡별임 등 5명이 선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각 별임은 백배 유념하여 혹 계의 규약을 범한 자가 있으면 단속하고, 이를 관에 알려 징치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실제 이러한 결의가 있은 후 10일 뒤인 경신년 11월 29일에는 상촌과 외삼에 거주하는 2인이 징벌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이날 이후에 또 규약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비단 벌을 줄 뿐 아니라 훼가출동(毁家出洞,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냄)하고 할명좌목(割名座目, 좌목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동계의 운영은 자산으로 비치된 전곡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장리(長利)로 빌려 주고 원금과 이자를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식리(殖利)를 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기금은 제수비용으로 충당되었으며, 산신제를 마치면 이튿날(동짓달 초삼일) 총회를 열고 주연을 베풀었다. 이날 전 계원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회합을 갖고 유사와 공원을 선출하였으며, 전곡의 수납과 새로운 대출을 결정하는 등 제반 대소사를 논의하였다. 모든 결산을 마친 뒤에는 ‘계후포양공사(稧後褒揚公事)’를 실시하여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거나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한 자, 곤궁한 이웃을 도운 자, 동네를 위해 선행을 베푼 자를 추천받아 칭찬하고 상을 주는 자리를 가졌다. 그 대상은 부안 임씨 외에 비복인 하계원도 포함되었으며, 현전하는 동계 자료에는 해마다 수상자의 성명과 공적 사실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경신년부터는 별임을 두고 악행을 저지르거나 상하가 불손한 자를 단속, ‘계후상벌공사(稧後賞罰公事)’를 통해 포상과 더불어 징벌을 내림으로써 풍속을 바로잡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내용양화리는 원수산을 등지고 삼기강(三岐江)으로 불리는 금강변의 비옥한 터전에 자리한 [마을](/topic/마을)이다. 일찍이 고려 말엽의 충신이자 부안 임씨의 중시조가 되는 임난수(林蘭秀)가 이곳에 정착한 이래 그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의 취락』에는 충남에서 가장 특색 있는 동족마을의 하나로 양화리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원수산 산신제는 바로 부안 임씨 집성촌인 양화2리 가학동이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동짓달 초에 거행하는 동제이며, ‘원수산산신제문서’는 19세기 산신제에 대한 제반 절차 및 계를 운영하면서 생산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문서의 표제는 ‘산제홀기 병축문 산신□□헌취위궤(山祭笏記 倂祝文 山神□□獻就位詭)’로 되어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산제사완정일십일월초삼일(山祭祀元定日十一月初三日)’이라 하여 산제일을 명기하고, 그 뒤에 「제물진설도」, 「산제홀기」, 「산제축문」 등이 기록되었다.

[축문](/topic/축문) 옆에 ‘병자시월이십이[일경](/topic/일경)초(丙子十月二十二日敬抄)’라고 명기한 것으로 보아 1876년 또는 1816년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효(孝)․우(友)․제(悌)․목(睦)․임(任)․휼(恤)의 육행지목(六行之目)과 불효(不孝)․불우(不友),․부제(不悌)․불임(不任)․불휼(不恤)․불화(不和)․불경(不敬)의 팔형지목(八刑之目), 제사필치성(祭祀必致誠)․인리상교조(隣里相校助)․의관필정제(衣冠必整齊) 삼건행실지목(三件行實之目) 등의 지켜야 할 덕목, 「종중통문(宗中通文)」, 「계후포양공사(稧後褒揚公事)」, 「분급사(分給事)」를 기재하였다.

그리고 병진년(1856년 추정) 이후로 병자년(1936년 추정)까지 동계의 논의사항을 정리한 「수계사(修稧事)」를 매년 기록하였다. 「수계사」에는 추봉조(秋捧租), 추봉전(秋捧錢), 분급사(分給事), 제후공사(祭後公事), 계후공사(稧後公事), 상벌공사(賞罰公事), 임원명단 등 동계 기금의 식리와 수입 지출에 대한 기록 및 상벌을 준 계원의 명단이 기재되었다. 이와 함께 첨부된 고소장은 연기군 남면 가학동 통장 임노원 등이 본동의 원수산 산제는 수백 년을 이어온 규례이므로 여기에 필요한 소의 도살을 허락해 줄 것을 1907년(융희 원년) 11월 30일 군수서리에게 청원한 것이다. 좌측에는 같은 날 군수서리가 처결한 제사(題辭)가 있다.

원수산 산제홀기는 조선 후기 유교식 산신제의 전범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행례절차는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와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홀기에 기록된 산신제의 행례절차는 제집사와 축관이 제단 앞뜰에 차례로 도열해 있다가 손을 씻고 제물을 진설한 다음, 집례가 부르는 홀에 따라 [참신](/topic/참신)례(參神禮)-강신례(降神禮)-[초헌](/topic/초헌)례(初獻禮)-[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례(亞獻禮)-[종헌](/topic/종헌)례(終獻禮)-사신례(辭神禮)-[음복](/topic/음복)례(飮福禮)-[분축](/topic/분축)(焚祝)-망예례(望瘞禮)-소지(燒紙)의 순으로 진행된다. 또한 홀기에 등장하는 [제관](/topic/제관)은 축승(祝陞),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봉로(奉爐), 봉향(奉香), 봉잔(奉盞), 전잔(奠盞), 사준(司罇), 집례(執禮) 등인데, 행례절차에 따른 각 제관과 집사의 역할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이로써 원수산 산제홀기는 성균관이나 향교의 석전홀기(釋奠笏記) 또는 서원․사우의 제향홀기를 상당부분 마을 차원의 산신제에 걸맞게 준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제물진설도」에 나타난 원수산 산신제의 제물은 다음과 같다.

![마을신앙 연기원수산산신제문서](/upload/img/20170106/20170106144425_t_.jpg)

원수산산신제문서는 조선 후기 주변마을이 산신제를 주관할 목적으로 동계(산제계)를 운영하였음을 보여준다. 문서에는 여기에 참여한 마을로 월룡(月龍)․학천(鶴川, 궉말)․상촌(上村)․복룡(伏龍)․원곡(元谷, 원사골)․학동(鶴洞)․외삼(外三) 등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양화리 임헌우(1914년생) 옹에 따르면 동계가 해체되기 [직전](/topic/직전)인 30여 년 전까지도 양화 2리와 갈운리 원사골․상촌에 거주하는 세대는 대부분 가입되어 있었고, 이웃마을인 진의리 긴여울․성전에서도 일부 세대가 계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절목이나 좌목, 그 내력을 기록한 서문이 전하지 않는 까닭에 동계를 조직한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서만으로도 그것은 적어도 조선 후기의 관행을 계승한 조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계는 상계원(上稧員)과 하계원(下稧員)으로 구분되었다. 상계원이란 사족의 후예인 부안 임씨를 의미하고, 하계원은 그들의 노복이나 [머슴](/topic/머슴)으로 입향한 하층민을 지칭한다. 또한 동계의 운영은 상계원의 자격을 갖춘 마을 사람들이 순번제로 유사와 공원 각 1명을 선정하여 대소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아울러 동계에서는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일 외에, 각 자연마을별로 책임자격인 별임(別任)을 두어 선행을 행한 자와 악행을 저지른 자를 가려서 예속의 교화에 힘썼다. 이에 대해 경신년 11월 19일에 작성된 ‘수계사(修稧事)’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오직 우리 동계는 비단 전곡(錢穀)의 취리(取利)가 공정할 뿐 아니라 오로지 약법(約法)의 상규(相規)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무릇 수년 간 사람들의 마음에 틈이 벌어져 예속이 무너졌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오호라! 이미 지나간 일은 논하지 말고 지금 이후 동계에 속한 각 리별로 별임을 정하여 선행을 행한 자는 칭찬을 해주고, 악행을 범한 자는 징계를 내려 영원히 입법을 좇아 행하도록 한즉 이 역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말할 것이다.

이에 따라 마을별로 별임을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날 월룡별임, 학천별임, 상촌별임, 복룡별임, 원곡별임 등 5명이 선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각 별임은 백배 유념하여 혹 계의 규약을 범한 자가 있으면 단속하고, 이를 관에 알려 징치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실제 이러한 결의가 있은 후 10일 뒤인 경신년 11월 29일에는 상촌과 외삼에 거주하는 2인이 징벌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이날 이후에 또 규약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비단 벌을 줄 뿐 아니라 훼가출동(毁家出洞,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냄)하고 할명좌목(割名座目, 좌목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동계의 운영은 자산으로 비치된 전곡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장리(長利)로 빌려 주고 원금과 이자를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식리(殖利)를 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기금은 제수비용으로 충당되었으며, 산신제를 마치면 이튿날(동짓달 초삼일) 총회를 열고 주연을 베풀었다. 이날 전 계원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회합을 갖고 유사와 공원을 선출하였으며, 전곡의 수납과 새로운 대출을 결정하는 등 제반 대소사를 논의하였다. 모든 결산을 마친 뒤에는 ‘계후포양공사(稧後褒揚公事)’를 실시하여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거나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한 자, 곤궁한 이웃을 도운 자, 동네를 위해 선행을 베푼 자를 추천받아 칭찬하고 상을 주는 자리를 가졌다. 그 대상은 부안 임씨 외에 비복인 하계원도 포함되었으며, 현전하는 동계 자료에는 해마다 수상자의 성명과 공적 사실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경신년부터는 별임을 두고 악행을 저지르거나 상하가 불손한 자를 단속, ‘계후상벌공사(稧後賞罰公事)’를 통해 포상과 더불어 징벌을 내림으로써 풍속을 바로잡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원수산산신제문서는 조선 후기 원수산 주변의 여러 [마을](/topic/마을)이 동계(산제계)를 구성하여 산신제를 지낸 사실과 유교식 행례절차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원수산 산신제는 황소를 도살하여 희생으로 바치는 등 적잖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원수산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에서는 동계를 운영함으로써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산신제라는 공동의 신앙의례에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수산 동계가 성립되고 지속되었던 배경에는 혈연․지연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하였다. 즉 동계에 참여했던 양화리․진의리․갈운리는 여말선초 부안 임씨가 터를 잡은 이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집안에서 부리는 노복을 제외하고는 타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종족마을을 이루었다. 이러한 혈연적 일체감과 더불어 오랜 세월 생활문화를 공유해온 끈끈한 유대감이 모태가 되어 원수산 동계는 산신제를 주관하는 일은 물론 마을의 풍속을 교화하고 미풍을 진작시키는 향촌의 자치조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원수산산신제문서는 부분적이나마 그 실상이 생생하게 [갈[무리](/topic/무리)](/topic/갈무리)되어 있는 기록물이다.
참고문헌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유병덕 외, 국사편찬위원회, 2008)
조선 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의의원수산산신제문서는 조선 후기 원수산 주변의 여러 [마을](/topic/마을)이 동계(산제계)를 구성하여 산신제를 지낸 사실과 유교식 행례절차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원수산 산신제는 황소를 도살하여 희생으로 바치는 등 적잖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원수산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에서는 동계를 운영함으로써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산신제라는 공동의 신앙의례에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수산 동계가 성립되고 지속되었던 배경에는 혈연․지연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하였다. 즉 동계에 참여했던 양화리․진의리․갈운리는 여말선초 부안 임씨가 터를 잡은 이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집안에서 부리는 노복을 제외하고는 타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종족마을을 이루었다. 이러한 혈연적 일체감과 더불어 오랜 세월 생활문화를 공유해온 끈끈한 유대감이 모태가 되어 원수산 동계는 산신제를 주관하는 일은 물론 마을의 풍속을 교화하고 미풍을 진작시키는 향촌의 자치조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원수산산신제문서는 부분적이나마 그 실상이 생생하게 [갈[무리](/topic/무리)](/topic/갈무리)되어 있는 기록물이다.
참고문헌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유병덕 외, 국사편찬위원회, 2008)
조선 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중랑문화원봉화산도당굿하효길 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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