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징장군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완도군의 몇몇 [마을](/topic/마을) 동제에서 모셔지는 전설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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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의 몇몇 [마을](/topic/마을) 동제에서 모셔지는 전설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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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수
정의전라남도 완도군의 몇몇 [마을](/topic/마을) 동제에서 모셔지는 전설적인 인물.
정의전라남도 완도군의 몇몇 [마을](/topic/마을) 동제에서 모셔지는 전설적인 인물.
참조완도장좌리당제
참고문헌康津郡誌 (1923)
참조완도장좌리당제
참고문헌康津郡誌 (1923)
내용완도에서 송징을 동제의 주신으로 모시던 [마을](/topic/마을)은 완도읍을 비롯해 여러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완도읍 장좌리의 동제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이 역시활발하게 모셔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좌리의 당집이 있는 장도는 본래 [장보고](/topic/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하고 현재(2010년)는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는 지역이다. 장도의 정상에 숲으로 싸인 당집이 있으며, 매년 정월 초열흘날 쯤에 날을 가려 당제를 모셔 오고 있다. 본래 당집에서 모시던 신은송징 [장군](/topic/장군), 정년 장군, 혜일 대사였다. 그러나 연고로 따지고 보면 송징은 전설적 인물에 불과하지만 장보고는 역사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지역민들에 의해 송징보다 장보고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여겨졌음인지 현재는 주벽에 장보고의 [영정](/topic/영정)을 걸고 장보고를 주신으로 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1982년에 장좌리 동제가 남도문화제에 경[연작](/topic/연작)품으로 출연하면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지역의 인물인 장보고를 주신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 추배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그 후 논란이 있어 오다가 현재는 장보고 장군을 주신으로 하고, 전부터 모셔 온 3위의 신격을 부신으로 격하시키는 변화를 겪었다.

본래 송징이 이 지역에서 동제의 신격으로 모셔[지게](/topic/지게) 된 배경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몇 [가지](/topic/가지)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있다. 임억령의 라는 시에서는 송징을 미적추(米敵酋)라고 불린다고 하고 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지도 모르고 과중한 세곡을 걷어 가는 중앙정부의 처사에 분개하여 송징 장군은 세곡선을 습격하여 곡식을 빼앗아 백성에게 나눠 준 사람이다.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지만 나라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송징 장군이 대신하여 굶주린 지역 주민을 위해 쌀을 훔쳐 나누어 준 것이었다.

한편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송징 장군은 장보고 장군과 상통하는 면도 지니고 있다. 즉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 것은 『[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수많은 지지류에 실려 있는 송징에 대한 전설 정보이다. 한편 장보고의 어릴 때 이름이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다. 지금 말로 하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활보’이며, 활을 잘 쏜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임억령의 에서는 심지어 활시위를 끊자 송징이 죽었다고 하여 송징과 활을 동일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또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송징과 엄장군이라는 사람이 세력다툼을 하다가 엄장군의 속임수에 의해 송징이 죽는다. 여기서 엄장군은 염장군, 즉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라도 방언에서 염장군이 엄장군으로 발음되는 현상, 즉 단모음화 현상은 매우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서 매년 모시는 동제에 송징 장군이 주신으로 모셔지다가 오늘날에 와서 장보고 장군으로 교체되는 현상도 어떻게 보면 두 인물 사이에 공유되는 이야기를 통해 동일인으로 생각하는 집단의 무의식적 전승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둘 사이를 동일인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허용의 기제가 작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징과 달리 장보고는 훗날 추배되면서도 주신격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남 해남 출신 임억령이 당집에서 송징 장군을 모시는 제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라는 시의 일부에서 읊고 있다.

장골이야 비록 초목과 함께 썩었으나
의연한 [혼백](/topic/혼백)은 풍뢰를 머금어 사납구나
귀신이 되어서도 웅걸하여 이 땅에서 제사하려
장대에 꿩깃 꽂고 나무 새겨 신상을 지었더니
저 어인 사람들인고 괴이하다 비웃고
허물어 마침내 물가에 버렸다네
백년 세월에 당집 한 칸 쓸쓸할 뿐
때를 맞춰 복날과 섣달에 마을에 북소리 울리고
뉘엿뉘엿 지는 해에 들가운데 무당의 굿소리
우[수수](/topic/수수) 하늬바람에 갈까마귀 춤을 춘다
신령이 내리는지 하늘에선 빗방울 날리고
[제상](/topic/제상)에 올려진 건 고작 막걸리 한 사발
오호라 이 어찌 음사류겠는가
심하도다 유생들의 고루함이여
종이 잘라 혼 부름은 예부터 있어온 일
때때로 수풀 속에 신이 내린다

壯骨雖與草木腐
毅魂尙含風雷怒
爲鬼雄兮食此土
揷雉羽兮木爲塑
彼何人兮怪而笑
毁而斥之江之滸
百年蕭條一間廟
歲時伏獵鳴村鼓
翩翩落日野巫禱
颯颯西風寒鴉舞
靈之來兮飄天雨
神之床兮瀝白酒
嗟乎此豈淫祠類
甚矣諸生識之陋
剪紙招魂着自古
往往下降叢林藪

이미 오백여 년 전에도 송징 장군은 지역의 지식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로 송징의 신상(神像)을 새겨 매년 제사를 모셔오고 있었는데 괴력난신을 말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신상이 버려진 것이다. 신앙보다는 사상을 중시하던 유학으로 무장한 당시 사람들의 소행이다. 지역의 유학자들이 음사(陰祀)로 간주한 정황이 분명하다. 임억령이 본 송징의 제사는 무당이 주재를 하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신상까지 갖춘 나름대로 격식이 뚜렷한 제사에서 송징은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또 장대에 꿩깃을 꽂고 제사를 모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농악](/topic/농악)에서 볼 수 있는 [영기](/topic/영기)의 모습이다. 즉 송징의제사에는 풍물패가 함께 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도 역시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서 모시고 있는 동제를 보면 여전히 풍물패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풍물패는 단지 당굿을 담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징을 따른 군사의 역할을 제사 과정에서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송징은 또 한 번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신상을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징 자체를 장보고와 교체한 것이다. 설화보다는 역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반영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송징 장군을 마을의 신격으로 모셔 오던 당집이 위치한 장소의 성격에 기인한 확대해석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즉 장도가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까지 하게 되면서 기존에 모셔져 온 전설적 인물인 송징보다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장보고 장군을 주신으로 모심으로써 지역의 역사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식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완도에서 송징을 동제의 주신으로 모시던 [마을](/topic/마을)은 완도읍을 비롯해 여러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완도읍 장좌리의 동제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이 역시활발하게 모셔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좌리의 당집이 있는 장도는 본래 [장보고](/topic/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하고 현재(2010년)는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는 지역이다. 장도의 정상에 숲으로 싸인 당집이 있으며, 매년 정월 초열흘날 쯤에 날을 가려 당제를 모셔 오고 있다. 본래 당집에서 모시던 신은송징 [장군](/topic/장군), 정년 장군, 혜일 대사였다. 그러나 연고로 따지고 보면 송징은 전설적 인물에 불과하지만 장보고는 역사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지역민들에 의해 송징보다 장보고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여겨졌음인지 현재는 주벽에 장보고의 [영정](/topic/영정)을 걸고 장보고를 주신으로 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1982년에 장좌리 동제가 남도문화제에 경[연작](/topic/연작)품으로 출연하면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지역의 인물인 장보고를 주신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 추배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그 후 논란이 있어 오다가 현재는 장보고 장군을 주신으로 하고, 전부터 모셔 온 3위의 신격을 부신으로 격하시키는 변화를 겪었다.

본래 송징이 이 지역에서 동제의 신격으로 모셔[지게](/topic/지게) 된 배경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몇 [가지](/topic/가지)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있다. 임억령의 라는 시에서는 송징을 미적추(米敵酋)라고 불린다고 하고 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지도 모르고 과중한 세곡을 걷어 가는 중앙정부의 처사에 분개하여 송징 장군은 세곡선을 습격하여 곡식을 빼앗아 백성에게 나눠 준 사람이다.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지만 나라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송징 장군이 대신하여 굶주린 지역 주민을 위해 쌀을 훔쳐 나누어 준 것이었다.

한편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송징 장군은 장보고 장군과 상통하는 면도 지니고 있다. 즉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 것은 『[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수많은 지지류에 실려 있는 송징에 대한 전설 정보이다. 한편 장보고의 어릴 때 이름이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다. 지금 말로 하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활보’이며, 활을 잘 쏜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임억령의 에서는 심지어 활시위를 끊자 송징이 죽었다고 하여 송징과 활을 동일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또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송징과 엄장군이라는 사람이 세력다툼을 하다가 엄장군의 속임수에 의해 송징이 죽는다. 여기서 엄장군은 염장군, 즉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라도 방언에서 염장군이 엄장군으로 발음되는 현상, 즉 단모음화 현상은 매우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서 매년 모시는 동제에 송징 장군이 주신으로 모셔지다가 오늘날에 와서 장보고 장군으로 교체되는 현상도 어떻게 보면 두 인물 사이에 공유되는 이야기를 통해 동일인으로 생각하는 집단의 무의식적 전승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둘 사이를 동일인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허용의 기제가 작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징과 달리 장보고는 훗날 추배되면서도 주신격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남 해남 출신 임억령이 당집에서 송징 장군을 모시는 제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라는 시의 일부에서 읊고 있다.

장골이야 비록 초목과 함께 썩었으나
의연한 [혼백](/topic/혼백)은 풍뢰를 머금어 사납구나
귀신이 되어서도 웅걸하여 이 땅에서 제사하려
장대에 꿩깃 꽂고 나무 새겨 신상을 지었더니
저 어인 사람들인고 괴이하다 비웃고
허물어 마침내 물가에 버렸다네
백년 세월에 당집 한 칸 쓸쓸할 뿐
때를 맞춰 복날과 섣달에 마을에 북소리 울리고
뉘엿뉘엿 지는 해에 들가운데 무당의 굿소리
우[수수](/topic/수수) 하늬바람에 갈까마귀 춤을 춘다
신령이 내리는지 하늘에선 빗방울 날리고
[제상](/topic/제상)에 올려진 건 고작 막걸리 한 사발
오호라 이 어찌 음사류겠는가
심하도다 유생들의 고루함이여
종이 잘라 혼 부름은 예부터 있어온 일
때때로 수풀 속에 신이 내린다

壯骨雖與草木腐
毅魂尙含風雷怒
爲鬼雄兮食此土
揷雉羽兮木爲塑
彼何人兮怪而笑
毁而斥之江之滸
百年蕭條一間廟
歲時伏獵鳴村鼓
翩翩落日野巫禱
颯颯西風寒鴉舞
靈之來兮飄天雨
神之床兮瀝白酒
嗟乎此豈淫祠類
甚矣諸生識之陋
剪紙招魂着自古
往往下降叢林藪

이미 오백여 년 전에도 송징 장군은 지역의 지식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로 송징의 신상(神像)을 새겨 매년 제사를 모셔오고 있었는데 괴력난신을 말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신상이 버려진 것이다. 신앙보다는 사상을 중시하던 유학으로 무장한 당시 사람들의 소행이다. 지역의 유학자들이 음사(陰祀)로 간주한 정황이 분명하다. 임억령이 본 송징의 제사는 무당이 주재를 하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신상까지 갖춘 나름대로 격식이 뚜렷한 제사에서 송징은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또 장대에 꿩깃을 꽂고 제사를 모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농악](/topic/농악)에서 볼 수 있는 [영기](/topic/영기)의 모습이다. 즉 송징의제사에는 풍물패가 함께 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도 역시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서 모시고 있는 동제를 보면 여전히 풍물패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풍물패는 단지 당굿을 담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징을 따른 군사의 역할을 제사 과정에서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송징은 또 한 번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신상을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징 자체를 장보고와 교체한 것이다. 설화보다는 역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반영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송징 장군을 마을의 신격으로 모셔 오던 당집이 위치한 장소의 성격에 기인한 확대해석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즉 장도가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까지 하게 되면서 기존에 모셔져 온 전설적 인물인 송징보다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장보고 장군을 주신으로 모심으로써 지역의 역사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식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강진현(康津縣) 사묘조(祠廟條)와 고적조(古蹟條)에는 송징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사묘조에 “호국신사는 현의 남쪽 칠장리에 있는데 세간에 전하는 말로는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송징이라 한다(護國神祠 在縣南七長里 世稱祠神卽宋徵)”라는 기록과 고적조에 “사현은 완도에 있는데 세간에 전하는 말로는 옛날 섬사람 중에 송징이라는 사람이 있어 무용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육십리 밖에까지 날렸는데, 활줄이 끊어지자 줄에서 피가 흘렀더라 한다. 지금 반석 위에는 화살자국이남아 있는데 그로 인하여 그곳 이름을 사현이라 한다(射峴在莞島 諺稱昔島人名宋徵者 武勇絶人 射及六十里之外 弓弦絶則血出 至今盤石有矢痕 名其地曰射峴)”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편찬된 많은 관찬 및 사찬 지지류에도 송징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거의 모두 이『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다른 종류의 자료로는 임억령(1496~1568)의 문집인『 석천집(石川集)』에 실려 있는 송징에 대한 두 편의 시가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송징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서사시로서 매우 높은 시격을 보이고있다.
역사『[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강진현(康津縣) 사묘조(祠廟條)와 고적조(古蹟條)에는 송징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사묘조에 “호국신사는 현의 남쪽 칠장리에 있는데 세간에 전하는 말로는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송징이라 한다(護國神祠 在縣南七長里 世稱祠神卽宋徵)”라는 기록과 고적조에 “사현은 완도에 있는데 세간에 전하는 말로는 옛날 섬사람 중에 송징이라는 사람이 있어 무용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육십리 밖에까지 날렸는데, 활줄이 끊어지자 줄에서 피가 흘렀더라 한다. 지금 반석 위에는 화살자국이남아 있는데 그로 인하여 그곳 이름을 사현이라 한다(射峴在莞島 諺稱昔島人名宋徵者 武勇絶人 射及六十里之外 弓弦絶則血出 至今盤石有矢痕 名其地曰射峴)”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편찬된 많은 관찬 및 사찬 지지류에도 송징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거의 모두 이『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다른 종류의 자료로는 임억령(1496~1568)의 문집인『 석천집(石川集)』에 실려 있는 송징에 대한 두 편의 시가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송징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서사시로서 매우 높은 시격을 보이고있다.
제주도 무속신화문무병1998
민속원한국의 굿문무병 외2002
제주도의 굿춤문무병2005
황금알바람의 축제 칠머리당 영등굿문무병2005
제주특별자치도굿의 기메·전지문무병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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