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천봉산성황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상북도 상주시 서북부에 위치한 천봉산(해발435.8m) 산록 ‘성황사’에서 치제(致祭)해 온 조선시대의 읍치(邑治)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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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서북부에 위치한 천봉산(해발435.8m) 산록 ‘성황사’에서 치제(致祭)해 온 조선시대의 읍치(邑治)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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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순
특징상주 지역에서 읍치를 중심으로 장기간 세거해 온 향리 가문은 상산 박씨와 상주 김씨(尙州 金氏) 두 [문중](/topic/문중)이다. 상산 박씨는 호장, 상주 김씨는 이방을 각각 세습해 오면서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상주의 읍치성황제는 상산 박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치제해 온 향리 주도의 성황제였다. 이는 1788년에서 193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성황사 중수기문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1900년(광무 4) 5월에 기록한 중수기문에는 성황신당을 중수하고 남은 돈으로 향리들을 중심으로 ‘등촉계’를 조직하고, 이때부터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을 ‘등촉’하는 날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후 상주목이 폐지되고 1935년 중수에는 ‘양로당’의 협조로 성황사를 중심으로 한 인근 논과 밭을 양로당에 위촉하여 상산 박씨 문중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또한 천봉산성황제의 제사권은 1936년에 상산 박씨 문중으로 이양된다. 양로당에서 성황제를 이양받은 초기에 성황제 준비를 위한 유사를 두어 성황사 관리와 성황제 준비를 맡도록 하였다. 유사는 성황사 관리사에 거주하면서 문중의 [위토](/topic/위토)를 경작하는 조건으로 다시 안너추리[마을](/topic/마을) 사람 개인에게 성황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후로 성황제는 지속과 중단을 거듭하다가 6·25전쟁 이후 양로당의 유사가 성황제를 준비하되 성황사 관리는 안너추리마을 사람에게 담당하게 된다. 1960년대에는 다른 마을에서 안너추리마을로 이주해 온무속인 부부에게 성황사 관리를 맡기는 등 무속인에 의해 관리와 [제물](/topic/제물) 준비가 이루어지다가 1991년부터 다시 성황사 제물 준비와 관리를 안너추리마을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징상주 지역에서 읍치를 중심으로 장기간 세거해 온 향리 가문은 상산 박씨와 상주 김씨(尙州 金氏) 두 [문중](/topic/문중)이다. 상산 박씨는 호장, 상주 김씨는 이방을 각각 세습해 오면서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상주의 읍치성황제는 상산 박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치제해 온 향리 주도의 성황제였다. 이는 1788년에서 193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성황사 중수기문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1900년(광무 4) 5월에 기록한 중수기문에는 성황신당을 중수하고 남은 돈으로 향리들을 중심으로 ‘등촉계’를 조직하고, 이때부터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을 ‘등촉’하는 날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후 상주목이 폐지되고 1935년 중수에는 ‘양로당’의 협조로 성황사를 중심으로 한 인근 논과 밭을 양로당에 위촉하여 상산 박씨 문중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또한 천봉산성황제의 제사권은 1936년에 상산 박씨 문중으로 이양된다. 양로당에서 성황제를 이양받은 초기에 성황제 준비를 위한 유사를 두어 성황사 관리와 성황제 준비를 맡도록 하였다. 유사는 성황사 관리사에 거주하면서 문중의 [위토](/topic/위토)를 경작하는 조건으로 다시 안너추리[마을](/topic/마을) 사람 개인에게 성황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후로 성황제는 지속과 중단을 거듭하다가 6·25전쟁 이후 양로당의 유사가 성황제를 준비하되 성황사 관리는 안너추리마을 사람에게 담당하게 된다. 1960년대에는 다른 마을에서 안너추리마을로 이주해 온무속인 부부에게 성황사 관리를 맡기는 등 무속인에 의해 관리와 [제물](/topic/제물) 준비가 이루어지다가 1991년부터 다시 성황사 제물 준비와 관리를 안너추리마을에서 담당하고 있다.
정의경상북도 상주시 서북부에 위치한 천봉산(해발435.8m) 산록 ‘성황사’에서 치제(致祭)해 온 조선시대의 읍치(邑治) 제의.
정의경상북도 상주시 서북부에 위치한 천봉산(해발435.8m) 산록 ‘성황사’에서 치제(致祭)해 온 조선시대의 읍치(邑治) 제의.
내용성황사는 현재 일(一) 자형 평면에 정면 세 칸(6.60m), 측면 두 칸(4.25m)으로 구성된 서향의 팔작[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바깥에서 보기에 양 [툇간](/topic/툇간)은 [온돌](/topic/온돌)방이고, 중앙칸은 [마루](/topic/마루)방 형태인 듯하다. 그러나 세 칸이 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에는 [우물](/topic/우물)마루를 깔았다. 건물 전체 모습이 [사당](/topic/사당)의 구조 형식을 따르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옮겨와 지은 집이어서서로 다른 목재를 사용하였다. 건물 전면의 작은 [편액](/topic/편액)에는 「성황사 무신년 정월(城隍祠 戊申年 正月)」(1908)이라 적혀 있어 성황사를 이건한 연도로 보인다. 국가에서 천봉산성황제를 치제하기 전에 성황사는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서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황사안에는 남매신상 외에 ‘말’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 말을 [봉안](/topic/봉안)하고있는 서낭당은 대체로 민간에서 서낭제를 행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천봉산 성황사에서 모셔져 있던 말은 읍치성황제 이전에 민속신앙에서 신앙한 신목과 돌무더기 서낭당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산동에서 이안면으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의 이름인 ‘서낭대이’라는 지명을 통해서도 성황사 이건 이전에 이미 돌무더기 형태의 서낭당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성황사 안에 모셔진 성황의 신체(神體)는 부부신상으로, 나무로 된 신체를 오색 헝겊과 흰색 [광목](/topic/광목)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흰색 [고깔](/topic/고깔)을 씌웠다. 그 위에 다시 여서낭은 붉은색 옷감, 남서낭은 파란색 옷감으로 각각 감아 놓았다. 여서낭은 머리를 얹었고, 남서낭은 [사모](/topic/사모)를 쓰고 나란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부부서낭이 입고 있는 옷은 성황사에서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무속인들이 매년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성황사중수상량문」에는 성황으로 모셔진 부부신상이 송나라의 부부신상을 모방한 것이고 성황제사의 형태는송나라 때부터 있어 온 것을 모방하였다는 간략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topic/마을)에서 구전되는 성황의 신격은 남매로 전해지고 있다.「 중수기문」을 통해 성황의 신격을 살펴보면 1714년(숙종 40)에 중수한 이래 52년 동안 성황사를 관리하지 않고 있다가 호장(戶長)에게 내린 현몽을 계기로 중수를 하였고, 중수 후 신상(神像)을 다시 받들어 모셨다고 하고 있어 기존에 모시던 성황이 곧 중수기문에 등장하는 현몽한 신령임을 알수 있다. 이를 계기로 향리들이 성황사를 수축(修築)할 계획을 세우게 되며, 이는 곧 성황제가 향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지역민이 해석하는 성황의 좌정 경위는 이와 다르다. 현재 만산2리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보편적인 성황 좌정유래담은 최근 각색된 부분이 많으나 마을에 살고 있던 남매가 죽고나서 모셔졌다는 이야기로, 신격이 실존 인물로 구체화되어 전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민에게 국가가 정한 성황의 신격은 다르게 해석된다. 지역을 수호하고 지역의 신을 대표하는 성황이라기보다 지역민이 인식하는 성황신으로서 소박하며 현실적이다.

천봉산성황제는 호장을 중심으로 향리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세 차례에 걸친 중수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1855년의 성황사 중수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성황사와 무당들이 관련되어 있음이 나타나며, 현재에도 천봉산 성황사에는 각처의 무속인들이 모여 큰 굿판을 벌이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사료](/topic/사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읍치성황사나 성황제에 관여하는 일이 흔하게 나타나고, 조선 후기에는 지방관이나 향리들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이 많아[지게](/topic/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학에 밝은 유지들이 읍치의 성황제를 주도했다는 기록도 상당수 있다. 1516년(중종 11)에 진강(盡講)에서 경연관들이 성황제를 음사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으며, 같은 해 조강(朝講)에서도 성황제를 일체 금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중앙에서는 성황제의 비유교적 요소를 척결하려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상주의 경우 1788년(정조 12)에 성황사를 중건하면서 이전에 방치한 신상을 새로 봉안하여 이후로 계속 모셨다. 성황신앙은 점차 제도권 신앙 내지 관방신앙으로서의 위치가 약화되고 민속신앙으로 자리하게 된다. 더구나 국가제사로서의 명맥도 1908년 이후로 완전히 끊어지게 되면서 이 시기에 전남 나주와 경북 영주시 순흥면을 비롯한 각지역에서 행하던 관(官) 주도의 성황제는 단절되거나 민(民) 주도의 제의로 변화하게 된다. 상주천봉산성황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천봉산성황제는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에 유교식 제의로 치제한다. 준비 과정과 제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제일(祭日) 이틀 전에 안너추리마을 노인회장은 회원들을 회관에 소집하여 제의 준비에 대한 간단한 회의를 연다. 제물 마련을 위한 장보기는 하루 전인 사월 초이렛날 아침 9시쯤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된 마을 사람 두 명이 행한다. 성황제의 제물 비용은 12~20만 원 정도이다.

한편 상산 박씨(常山 朴氏)는 매년 양력 4월 20일 양로당에 모여 대종회를 연다. 양로당은 조선시대 향리출신 가문의 후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면서, 이들이 모이는 건물의명칭이기도하다. 상산 박씨는 230여 년에 걸쳐 호장을 세습해 왔고, 읍치성황제로 제의가 이루어졌을 때 거의 주도적으로 치제하는 [문중](/topic/문중)이다. 이날 성황제 준비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성황제에 참석하는 상산 박씨는 약 7명이며, 이들은 양로당에서 오전 9시쯤 마을로 출발하여 회관에서 머물다가 천봉산으로 제를 지내러 올라간다.

제일 당일 아침 여성노인회원이 성황당으로 올라가 청소한 후 마을회관에 모여서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오로지 여자 노인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제물 [진설도](/topic/진설도) 여성회원들이 한다. 먼저 [제관](/topic/제관) 한 명과 집사 한 명이 성황사 앞에 있는 산신당에서 통명태, [삼실과](/topic/삼실과), 전을 차려 놓고 강신과 [초헌](/topic/초헌)으로 산신제를 올린 뒤 성황제를 올린다. 제의 절차는 강신-초헌-[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철상](/topic/철상)-[음복](/topic/음복)으로 이루어진다. 초헌관은 매년 상주문화원장 역임자 등이 맡고, 아헌관은 안너추리마을 노인회장이, 종헌관은 상산 박씨 문중에서번갈아가며 맡는다. 성황제를 마치면 음복을 한다. 성황제 이후에는 성황사 아래에 위치한 미륵당인 ‘영암각’에 제물을 올리고 나서 [축문](/topic/축문)을 태우는 것으로 영암각의 제의는 끝난다.
내용성황사는 현재 일(一) 자형 평면에 정면 세 칸(6.60m), 측면 두 칸(4.25m)으로 구성된 서향의 팔작[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바깥에서 보기에 양 [툇간](/topic/툇간)은 [온돌](/topic/온돌)방이고, 중앙칸은 [마루](/topic/마루)방 형태인 듯하다. 그러나 세 칸이 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에는 [우물](/topic/우물)마루를 깔았다. 건물 전체 모습이 [사당](/topic/사당)의 구조 형식을 따르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옮겨와 지은 집이어서서로 다른 목재를 사용하였다. 건물 전면의 작은 [편액](/topic/편액)에는 「성황사 무신년 정월(城隍祠 戊申年 正月)」(1908)이라 적혀 있어 성황사를 이건한 연도로 보인다. 국가에서 천봉산성황제를 치제하기 전에 성황사는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서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황사안에는 남매신상 외에 ‘말’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 말을 [봉안](/topic/봉안)하고있는 서낭당은 대체로 민간에서 서낭제를 행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천봉산 성황사에서 모셔져 있던 말은 읍치성황제 이전에 민속신앙에서 신앙한 신목과 돌무더기 서낭당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산동에서 이안면으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의 이름인 ‘서낭대이’라는 지명을 통해서도 성황사 이건 이전에 이미 돌무더기 형태의 서낭당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성황사 안에 모셔진 성황의 신체(神體)는 부부신상으로, 나무로 된 신체를 오색 헝겊과 흰색 [광목](/topic/광목)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흰색 [고깔](/topic/고깔)을 씌웠다. 그 위에 다시 여서낭은 붉은색 옷감, 남서낭은 파란색 옷감으로 각각 감아 놓았다. 여서낭은 머리를 얹었고, 남서낭은 [사모](/topic/사모)를 쓰고 나란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부부서낭이 입고 있는 옷은 성황사에서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무속인들이 매년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성황사중수상량문」에는 성황으로 모셔진 부부신상이 송나라의 부부신상을 모방한 것이고 성황제사의 형태는송나라 때부터 있어 온 것을 모방하였다는 간략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topic/마을)에서 구전되는 성황의 신격은 남매로 전해지고 있다.「 중수기문」을 통해 성황의 신격을 살펴보면 1714년(숙종 40)에 중수한 이래 52년 동안 성황사를 관리하지 않고 있다가 호장(戶長)에게 내린 현몽을 계기로 중수를 하였고, 중수 후 신상(神像)을 다시 받들어 모셨다고 하고 있어 기존에 모시던 성황이 곧 중수기문에 등장하는 현몽한 신령임을 알수 있다. 이를 계기로 향리들이 성황사를 수축(修築)할 계획을 세우게 되며, 이는 곧 성황제가 향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지역민이 해석하는 성황의 좌정 경위는 이와 다르다. 현재 만산2리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보편적인 성황 좌정유래담은 최근 각색된 부분이 많으나 마을에 살고 있던 남매가 죽고나서 모셔졌다는 이야기로, 신격이 실존 인물로 구체화되어 전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민에게 국가가 정한 성황의 신격은 다르게 해석된다. 지역을 수호하고 지역의 신을 대표하는 성황이라기보다 지역민이 인식하는 성황신으로서 소박하며 현실적이다.

천봉산성황제는 호장을 중심으로 향리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세 차례에 걸친 중수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1855년의 성황사 중수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성황사와 무당들이 관련되어 있음이 나타나며, 현재에도 천봉산 성황사에는 각처의 무속인들이 모여 큰 굿판을 벌이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사료](/topic/사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읍치성황사나 성황제에 관여하는 일이 흔하게 나타나고, 조선 후기에는 지방관이나 향리들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이 많아[지게](/topic/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학에 밝은 유지들이 읍치의 성황제를 주도했다는 기록도 상당수 있다. 1516년(중종 11)에 진강(盡講)에서 경연관들이 성황제를 음사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으며, 같은 해 조강(朝講)에서도 성황제를 일체 금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중앙에서는 성황제의 비유교적 요소를 척결하려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상주의 경우 1788년(정조 12)에 성황사를 중건하면서 이전에 방치한 신상을 새로 봉안하여 이후로 계속 모셨다. 성황신앙은 점차 제도권 신앙 내지 관방신앙으로서의 위치가 약화되고 민속신앙으로 자리하게 된다. 더구나 국가제사로서의 명맥도 1908년 이후로 완전히 끊어지게 되면서 이 시기에 전남 나주와 경북 영주시 순흥면을 비롯한 각지역에서 행하던 관(官) 주도의 성황제는 단절되거나 민(民) 주도의 제의로 변화하게 된다. 상주천봉산성황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천봉산성황제는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에 유교식 제의로 치제한다. 준비 과정과 제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제일(祭日) 이틀 전에 안너추리마을 노인회장은 회원들을 회관에 소집하여 제의 준비에 대한 간단한 회의를 연다. 제물 마련을 위한 장보기는 하루 전인 사월 초이렛날 아침 9시쯤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된 마을 사람 두 명이 행한다. 성황제의 제물 비용은 12~20만 원 정도이다.

한편 상산 박씨(常山 朴氏)는 매년 양력 4월 20일 양로당에 모여 대종회를 연다. 양로당은 조선시대 향리출신 가문의 후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면서, 이들이 모이는 건물의명칭이기도하다. 상산 박씨는 230여 년에 걸쳐 호장을 세습해 왔고, 읍치성황제로 제의가 이루어졌을 때 거의 주도적으로 치제하는 [문중](/topic/문중)이다. 이날 성황제 준비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성황제에 참석하는 상산 박씨는 약 7명이며, 이들은 양로당에서 오전 9시쯤 마을로 출발하여 회관에서 머물다가 천봉산으로 제를 지내러 올라간다.

제일 당일 아침 여성노인회원이 성황당으로 올라가 청소한 후 마을회관에 모여서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오로지 여자 노인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제물 [진설도](/topic/진설도) 여성회원들이 한다. 먼저 [제관](/topic/제관) 한 명과 집사 한 명이 성황사 앞에 있는 산신당에서 통명태, [삼실과](/topic/삼실과), 전을 차려 놓고 강신과 [초헌](/topic/초헌)으로 산신제를 올린 뒤 성황제를 올린다. 제의 절차는 강신-초헌-[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철상](/topic/철상)-[음복](/topic/음복)으로 이루어진다. 초헌관은 매년 상주문화원장 역임자 등이 맡고, 아헌관은 안너추리마을 노인회장이, 종헌관은 상산 박씨 문중에서번갈아가며 맡는다. 성황제를 마치면 음복을 한다. 성황제 이후에는 성황사 아래에 위치한 미륵당인 ‘영암각’에 제물을 올리고 나서 [축문](/topic/축문)을 태우는 것으로 영암각의 제의는 끝난다.
역사천봉산은 상주시에서 1.5㎞ 떨어진 북쪽 만산2리(안너추리[마을](/topic/마을))의 뒷산으로, 상주의 삼악(三嶽) 가운데 하나이자 [진산](/topic/진산)(鎭山)이다. 성황사가 위치하고 있는 만산2리는 성황사 외에도 [미륵당](/topic/미륵당), 골맥이, 산신당 등 마을신앙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1788년 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성황사가 원래 천봉산 꼭대기에 있었으며, 1714년(숙종 40)에 중수를하였으나 20년 후에 건물이 오래되고 퇴폐하여 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천봉산 성황사는 [사전](/topic/사전)에 등재된 기록이 없어 언제부터 관(官)에서 치제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없다. 만산2리 마을 뒷산(천봉산)에 성황사가 위치한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1928년에 7권 3책으로 전질이 완성된『 상산지(商山誌)』 증보판과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상산지』 질사조(秩祀條)에 처음 실린 내용으로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성황사는 [사당](/topic/사당)(祠堂)인 현재의 형태와 달리 단(壇) 형태였으며, 큰 바위 위의 단에성황을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에서 치제하기 이전에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서 지역민이 섬겼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상주의 사직단을 비롯한 사우(祠宇)를 정비하면서 성황사의 사우를 상주 북쪽에 위치한 신계리(현재 계산리)에 세웠으며, 얼마 후 천봉산 동쪽 기슭으로 옮겨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주천봉산 성황사의 역사는 4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천봉산은 상주시에서 1.5㎞ 떨어진 북쪽 만산2리(안너추리[마을](/topic/마을))의 뒷산으로, 상주의 삼악(三嶽) 가운데 하나이자 [진산](/topic/진산)(鎭山)이다. 성황사가 위치하고 있는 만산2리는 성황사 외에도 [미륵당](/topic/미륵당), 골맥이, 산신당 등 마을신앙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1788년 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성황사가 원래 천봉산 꼭대기에 있었으며, 1714년(숙종 40)에 중수를하였으나 20년 후에 건물이 오래되고 퇴폐하여 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천봉산 성황사는 [사전](/topic/사전)에 등재된 기록이 없어 언제부터 관(官)에서 치제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없다. 만산2리 마을 뒷산(천봉산)에 성황사가 위치한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1928년에 7권 3책으로 전질이 완성된『 상산지(商山誌)』 증보판과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상산지』 질사조(秩祀條)에 처음 실린 내용으로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성황사는 [사당](/topic/사당)(祠堂)인 현재의 형태와 달리 단(壇) 형태였으며, 큰 바위 위의 단에성황을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에서 치제하기 이전에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서 지역민이 섬겼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상주의 사직단을 비롯한 사우(祠宇)를 정비하면서 성황사의 사우를 상주 북쪽에 위치한 신계리(현재 계산리)에 세웠으며, 얼마 후 천봉산 동쪽 기슭으로 옮겨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주천봉산 성황사의 역사는 4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1992년에 안너추리[마을](/topic/마을)에서는 성황사보존회를 발족시켜 천봉산성황제의 준비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행하고 있는 성황제는 향리들의 후손인 양로당 회원들이 주도하고있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지니지만 의식적인 측면과 천봉산성황제의 기능적인 부분은 과거와 상당히 다르다. 주재 집단은 지속되었으나 성황사 관리 집단이 변화됨으로써 성황제 또한 다른 지역과 특이한 면모를 보이며 지속되고 있다. 상산 박씨를 중심으로 한 양로당 사람들은 선대에서 현재까지 성황제를 치제해 온 역사성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확보하고 있다. 한편 안너추리마을 사람들이 성황사 관리권을 이양받은 뒤 성황제는 노인회 조직의 지연적 결속을 강화하는 의례로 기능하고 있다. 성황제에 대한 두 집단의 서로 다른 입장은 성황제 지속의 기반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상주 천봉산의 성황사 고찰-성황사 중수 [상량문](/topic/상량문)을 중심하여 (김기탁, 상주문화 2, 상주문화원, 1991)
상주 천봉산성황제 주재집단의 지속과 변화 (황경순,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의의1992년에 안너추리[마을](/topic/마을)에서는 성황사보존회를 발족시켜 천봉산성황제의 준비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행하고 있는 성황제는 향리들의 후손인 양로당 회원들이 주도하고있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지니지만 의식적인 측면과 천봉산성황제의 기능적인 부분은 과거와 상당히 다르다. 주재 집단은 지속되었으나 성황사 관리 집단이 변화됨으로써 성황제 또한 다른 지역과 특이한 면모를 보이며 지속되고 있다. 상산 박씨를 중심으로 한 양로당 사람들은 선대에서 현재까지 성황제를 치제해 온 역사성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확보하고 있다. 한편 안너추리마을 사람들이 성황사 관리권을 이양받은 뒤 성황제는 노인회 조직의 지연적 결속을 강화하는 의례로 기능하고 있다. 성황제에 대한 두 집단의 서로 다른 입장은 성황제 지속의 기반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상주 천봉산의 성황사 고찰-성황사 중수 [상량문](/topic/상량문)을 중심하여 (김기탁, 상주문화 2, 상주문화원, 1991)
상주 천봉산성황제 주재집단의 지속과 변화 (황경순,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한국무속학회무화연구 (1)김태연2001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경상도2005
한국무속학회동해안 무집단 지화의 문화적 의미윤동환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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