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당촌별신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topic/마을)에서 전승되는 동제. 2000년 12월 29일에 당집과 당제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0시부터 교목지신을 모시는 당산제, 별신당의 당제, 마을 노상에서 마을신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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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topic/마을)에서 전승되는 동제. 2000년 12월 29일에 당집과 당제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0시부터 교목지신을 모시는 당산제, 별신당의 당제, 마을 노상에서 마을신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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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배
특징이 [마을](/topic/마을)의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자시(子時)에 마을 어귀에서 볼 때 왼쪽 둥구나무등이라고 부르는 언덕 위에 있는 귀목나무(느티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별신당집에서 모시는 당제를 먼저 지냈다고 하지만 궂은 날씨가 잦고 이동의 편의를 위해 교목지신 제사부터 지낸다고 한다. 이를 ‘교목제’, ‘당산제’라고도 한다. 교목제를 지내는언덕에 매우 큰 수백 년된 귀목나무가 있었으나 말라 죽었고, 지금은 새로 자란 나무를 당산목으로 삼고 있다.

별신당 제사는 ‘당뫼’ 또는 ‘당묘’라고 불리는 마을 뒤쪽 언덕에 있는 별신당집에서 모신다. 그 언덕[마루](/topic/마루)에 ‘천인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 당집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당집은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밤중에 제사를 모시러 다니기가 어렵고, 정월이어서 궂은 날이 많아 제사를 모시러 오르기가 힘들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당집에는 상량문이 있으며, 상량문에 “용 개국오백육년정유정월이십사일사시 [입주](/topic/입주) 동월이십육일미시 상량수겸유사김홍이 [화주](/topic/화주)김달천 귀(龍開國五百六年丁酉正月二十四日巳時 立柱同月二十六日未時 上樑手兼有司金弘伊 化主金達天 龜)”라는 글귀로 미루어 1897년에 당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당집은 전면 260㎝, 측면 240㎝에 맞배기와[지붕](/topic/지붕)으로 되어 있다. 당집의 안쪽에는 [시렁](/topic/시렁)이 있고, 시렁 위쪽에 다섯 개의 돌, 아래쪽에 두 개의 돌이 각각 놓여 있다. 돌은 모두위쪽을 [한지](/topic/한지)로 싸 왼새끼로 둘러놓았다. 이 돌을 ‘칠성석’이라고 하며 매년 정월대보름날이면 이 돌에 당제를 지낸다. 이들 돌에 대한 특별한 내력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예전에 길을 가던 행인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당집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이 돌들이 굴러내려 말을 상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돌들을 ‘말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사제(里社祭)는 마을 어귀 길가에서 지낸다. 이곳에 본래 당산목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사제의 장소는 세 번 정도 바뀌었다고 하며, 마을 소유의 땅이 개인 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사제는 마을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마을의 평안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박첨지](/topic/박첨지)를 모시는 제사도 함께 이루어진다. 이제사는 ‘박첨제’라고 하기도 한다. 박첨제는 옛날에 박첨지라는 마을 사람이 자손이 없어 자기 소유의 논 닷 [마지기](/topic/마지기), 즉 4,950㎡를 마을에 희사(喜捨)하고 죽은 뒤에 제사를지내 달라며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특징이 [마을](/topic/마을)의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자시(子時)에 마을 어귀에서 볼 때 왼쪽 둥구나무등이라고 부르는 언덕 위에 있는 귀목나무(느티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별신당집에서 모시는 당제를 먼저 지냈다고 하지만 궂은 날씨가 잦고 이동의 편의를 위해 교목지신 제사부터 지낸다고 한다. 이를 ‘교목제’, ‘당산제’라고도 한다. 교목제를 지내는언덕에 매우 큰 수백 년된 귀목나무가 있었으나 말라 죽었고, 지금은 새로 자란 나무를 당산목으로 삼고 있다.

별신당 제사는 ‘당뫼’ 또는 ‘당묘’라고 불리는 마을 뒤쪽 언덕에 있는 별신당집에서 모신다. 그 언덕[마루](/topic/마루)에 ‘천인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 당집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당집은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밤중에 제사를 모시러 다니기가 어렵고, 정월이어서 궂은 날이 많아 제사를 모시러 오르기가 힘들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당집에는 상량문이 있으며, 상량문에 “용 개국오백육년정유정월이십사일사시 [입주](/topic/입주) 동월이십육일미시 상량수겸유사김홍이 [화주](/topic/화주)김달천 귀(龍開國五百六年丁酉正月二十四日巳時 立柱同月二十六日未時 上樑手兼有司金弘伊 化主金達天 龜)”라는 글귀로 미루어 1897년에 당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당집은 전면 260㎝, 측면 240㎝에 맞배기와[지붕](/topic/지붕)으로 되어 있다. 당집의 안쪽에는 [시렁](/topic/시렁)이 있고, 시렁 위쪽에 다섯 개의 돌, 아래쪽에 두 개의 돌이 각각 놓여 있다. 돌은 모두위쪽을 [한지](/topic/한지)로 싸 왼새끼로 둘러놓았다. 이 돌을 ‘칠성석’이라고 하며 매년 정월대보름날이면 이 돌에 당제를 지낸다. 이들 돌에 대한 특별한 내력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예전에 길을 가던 행인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당집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이 돌들이 굴러내려 말을 상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돌들을 ‘말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사제(里社祭)는 마을 어귀 길가에서 지낸다. 이곳에 본래 당산목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사제의 장소는 세 번 정도 바뀌었다고 하며, 마을 소유의 땅이 개인 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사제는 마을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마을의 평안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박첨지](/topic/박첨지)를 모시는 제사도 함께 이루어진다. 이제사는 ‘박첨제’라고 하기도 한다. 박첨제는 옛날에 박첨지라는 마을 사람이 자손이 없어 자기 소유의 논 닷 [마지기](/topic/마지기), 즉 4,950㎡를 마을에 희사(喜捨)하고 죽은 뒤에 제사를지내 달라며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의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topic/마을)에서 전승되는 동제. 2000년 12월 29일에 당집과 당제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0시부터 교목지신을 모시는 당산제, 별신당의 당제, 마을 노상에서 마을신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정의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topic/마을)에서 전승되는 동제. 2000년 12월 29일에 당집과 당제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0시부터 교목지신을 모시는 당산제, 별신당의 당제, 마을 노상에서 마을신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참조보성당촌별신당
참고문헌보성군 문화유적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보성군, 1992)
보성군사 (보성군사편찬위원회, 전남실업출판국, 1995)
참조보성당촌별신당
참고문헌보성군 문화유적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보성군, 1992)
보성군사 (보성군사편찬위원회, 전남실업출판국, 1995)
내용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당촌[마을](/topic/마을)은 1664년쯤에 문씨(文氏), 송씨(宋氏)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그 뒤 광주 이씨(廣州 李氏) 이중원(李重遠)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그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많은농지가 수몰되었고, 그에 따라 마을 사람 대다수가 떠나면서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다.

[풍수](/topic/풍수)지리상으로 이 마을은 봉황이 홰를 치면서 날아오르고, 봉황의 알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 밖 먼 곳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이러한 마을의 형상을 잘 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은 예전에 복내면이 복성현(福城縣)인 때 사직신(社稷神)을 모시는 당이었다 하여 ‘당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뒤 별신당집이 있는 곳을 마을 사람들은 ‘당뫼’라 부르기도 하고, 그 자리에 묘가 있었다고 해서 ‘당묘’라 부르기도 한다.

정초가 되면 이장을 중심으로 동네 사정을 잘 아는 반장들이 모여 그해 당산제를 위한 협의를 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은 제비와 [제관](/topic/제관)에 관한 것이다. 당산제에 필요한 제비는 마을에서 호구전으로 걷는다. 한 사람당 쌀 한 홉을 걷고, 이것이 부족하면 모자란 만큼 돈으로 환산하여 개인당 얼마를 더 부과한다. 당산제를 모실 제관을 선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topic/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본인이나 집안에 유고(有故)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특히 [화주](/topic/화주)의 경우 집안에 어린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유고’에는 집안에 상(喪)을 당하거나 산고(産故)가 든 사람뿐만 아니라 이런 집에 다녀온 사람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개고기를 먹은 사람도 제외된다. 개고기는 흔히 추육(醜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화주 한 명, [헌관](/topic/헌관) 두 명, 축관 한 명과 준비에서부터 당산제를 모시기까지 뒷일을 맡아 볼 심부름꾼 두세 명을 뽑는다. 이때 화주가 [초헌](/topic/초헌)관이 된다.화주는 당산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뽑을 때부터 각별히 신경을 쓴다. 화주는 당산과 당샘 정리와 청소를 해야 하고, 이곳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도 깔며, 당산제에 필요한 일체의 제물도 준비해야 한다.

화주로 뽑힌 사람은 제일(祭日) 4~5일 전에 뒷산 어귀에 있는 당샘에 올라가 깨끗이 청소한 다음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 뒤 맑은 물을 길어와 제주(祭酒)를 앉힌다. 당샘에 금줄이 쳐지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물을 길어 가면 안 된다. 일단 제주를 앉히면 화주는 그때부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궂은 곳에 가지 않고, 궂은 사람과 만나지도 않는다. 또 [대문](/topic/대문)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화주 집에 드나들지 않는다. 이때부터 화주 부부는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 하고, 동침해서도 안 된다.

제물은 이웃 문덕 장에서 산다. 제사를 모시는 날에서 가장 가까운 날에 장을 보기 때문에 제삿날 하루나 이틀 전에 장에 가는 것이 통례이다. 화주와 이장이 함께 장에 가서제물을 사며, 이때 물건값은 깎지 않는다. 전에는 시루와 돗자리, 그리고 일체의 제기(祭器)까지 매년 새로 구입하여 썼지만 지금은 화주가 된 사람 집의 물건을 이용한다. 장을 보아 오면 화주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제물을 만든다.

정월 열나흗날 오전에 화주는 세 곳의 당산을 돌아다니면서 금줄을 걸고 황토를 깐다. 특히 당집에 가서는 안을 두루 청소하며, 당집 안에 있는 이른바‘말칼’로 불리는 돌들에 옷을 입힌다. 옷을 입힌다는 것은 [한지](/topic/한지)로 돌 위쪽을 감싸고 왼새끼로 두르는 것이다. 이는 한 해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이듬해 다시 옷을 해 입힌다. 또 이사제를 모실 곳에는 대나무를 베어 얽어 [제상](/topic/제상)을 만들어 두고 제를 모실 때 거기에다 떡시루를 얹어 놓게 된다.

제물은 제사에 임박해서 주로 열나흗날부터 만들기 시작하며, 화주 부부만 만든다. 제물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당샘에서 물을 길어다 쓴다. 또 이때부터는 [화장실](/topic/화장실)을 다녀오면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해야 한다. 이 일이 번거롭다 보니 화주 부부는 며칠간 거의 절식(節食)을 한다. 제물을 만들 때에는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몸가짐을 정결히 해야 한다. 음식물에 머리칼이 빠지지 않도록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침이 들어가지 않도록 입도 가린다. 간을 본다거나 맛을 보아서도 안 된다. 음식에 고춧가루는 쓰지 않는다.제물을 만들면 셋으로 나누어 둔다.

지금은 마을에 [농악](/topic/농악)을 칠 줄 아는 사람이 현격히 줄어서 굿을 치지 못하지만 전에는 초저녁부터 농악을 울려 정월 열나흗날 밤이 되면 온 마을이 흥겨운 잔치집처럼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 사람들이 합세하여 놀고 달집태우기도 하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 마을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고 마을 제사인 당산제만 지낸다.

자정(정월대보름 0시)이 가까워지면 화주 집에서 제물을 들고 먼저 교목제를 지내기 위해 산에 오른다. 여기에는 화주부부를 비롯하여 헌관과 축관,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함께 따른다. 제사의 순서는 유교식으로 한다. 제물 역시 집안 제사와 같다. 교목제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쓰며, 제사가 끝나면 그것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분향](/topic/분향)-강신-[독축](/topic/독축)-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사신의 순서에 따라 제사한다. 그러고 난 뒤 참가한 사람들 모두 한두 장씩 소지를 올리며 복을 빈다. 교목제가 끝나면 화주 집으로 모두 돌아가서 다시 제물을 들고 나와 당집에 올라 동일한 방법으로 제사한다. 또 이것이 끝나면 동일한 방법으로 제물을 들고 마을 앞으로 나가서 이사제를 모신다.

이사제를 할 때 자손 없이 죽은 [박첨지](/topic/박첨지)를 위한 제상을 따로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 준다. 박첨지 제사는 제상 없이 짚을 깔고 흰 종이 위에 밥을 두세 그릇 되는 분량으로 가능한 한 많이 차려서 바가지에 담아 놓고 간단하게 지낸다고 한다. 옛날에 마을 주민이 300가구가 넘던 시절에는 짚을 꼬아 줄을 크게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메고 소리를 하면서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서는 불놀이(달집태우기)를 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당뫼에 있던 당산나무에 줄을 매어 놓고 [그네](/topic/그네)를 뛰면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이사제까지 모두 끝나면 동이 튼다. 날이 밝으면 마을에서 공용으로 쓰는 서당으로 준비된 모든 음식을 화주 집에서 옮겨 온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이면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동회(洞會)를 연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은 마을 일 전반이며, 특히 그해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품삯 등을 정했다. 여기서 정해진 것은 누구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회의는 최근에 들어와 열리지 않는다.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이런 모임에 참석해 떡 한쪽이라도 먹으려 했으나 지금은 먹을 것이 흔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고, 더욱이 품삯의 경우도 이제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사고 또 마을 사람들이 타처에 가서 일하는 경우도 많아 마을에서 품삯을 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마을회의가 끝나면 며칠 동안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고 하지만 근자에는 역시 굿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내용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당촌[마을](/topic/마을)은 1664년쯤에 문씨(文氏), 송씨(宋氏)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그 뒤 광주 이씨(廣州 李氏) 이중원(李重遠)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그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많은농지가 수몰되었고, 그에 따라 마을 사람 대다수가 떠나면서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다.

[풍수](/topic/풍수)지리상으로 이 마을은 봉황이 홰를 치면서 날아오르고, 봉황의 알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 밖 먼 곳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이러한 마을의 형상을 잘 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은 예전에 복내면이 복성현(福城縣)인 때 사직신(社稷神)을 모시는 당이었다 하여 ‘당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뒤 별신당집이 있는 곳을 마을 사람들은 ‘당뫼’라 부르기도 하고, 그 자리에 묘가 있었다고 해서 ‘당묘’라 부르기도 한다.

정초가 되면 이장을 중심으로 동네 사정을 잘 아는 반장들이 모여 그해 당산제를 위한 협의를 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은 제비와 [제관](/topic/제관)에 관한 것이다. 당산제에 필요한 제비는 마을에서 호구전으로 걷는다. 한 사람당 쌀 한 홉을 걷고, 이것이 부족하면 모자란 만큼 돈으로 환산하여 개인당 얼마를 더 부과한다. 당산제를 모실 제관을 선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topic/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본인이나 집안에 유고(有故)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특히 [화주](/topic/화주)의 경우 집안에 어린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유고’에는 집안에 상(喪)을 당하거나 산고(産故)가 든 사람뿐만 아니라 이런 집에 다녀온 사람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개고기를 먹은 사람도 제외된다. 개고기는 흔히 추육(醜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화주 한 명, [헌관](/topic/헌관) 두 명, 축관 한 명과 준비에서부터 당산제를 모시기까지 뒷일을 맡아 볼 심부름꾼 두세 명을 뽑는다. 이때 화주가 [초헌](/topic/초헌)관이 된다.화주는 당산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뽑을 때부터 각별히 신경을 쓴다. 화주는 당산과 당샘 정리와 청소를 해야 하고, 이곳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도 깔며, 당산제에 필요한 일체의 제물도 준비해야 한다.

화주로 뽑힌 사람은 제일(祭日) 4~5일 전에 뒷산 어귀에 있는 당샘에 올라가 깨끗이 청소한 다음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 뒤 맑은 물을 길어와 제주(祭酒)를 앉힌다. 당샘에 금줄이 쳐지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물을 길어 가면 안 된다. 일단 제주를 앉히면 화주는 그때부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궂은 곳에 가지 않고, 궂은 사람과 만나지도 않는다. 또 [대문](/topic/대문)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화주 집에 드나들지 않는다. 이때부터 화주 부부는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 하고, 동침해서도 안 된다.

제물은 이웃 문덕 장에서 산다. 제사를 모시는 날에서 가장 가까운 날에 장을 보기 때문에 제삿날 하루나 이틀 전에 장에 가는 것이 통례이다. 화주와 이장이 함께 장에 가서제물을 사며, 이때 물건값은 깎지 않는다. 전에는 시루와 돗자리, 그리고 일체의 제기(祭器)까지 매년 새로 구입하여 썼지만 지금은 화주가 된 사람 집의 물건을 이용한다. 장을 보아 오면 화주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제물을 만든다.

정월 열나흗날 오전에 화주는 세 곳의 당산을 돌아다니면서 금줄을 걸고 황토를 깐다. 특히 당집에 가서는 안을 두루 청소하며, 당집 안에 있는 이른바‘말칼’로 불리는 돌들에 옷을 입힌다. 옷을 입힌다는 것은 [한지](/topic/한지)로 돌 위쪽을 감싸고 왼새끼로 두르는 것이다. 이는 한 해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이듬해 다시 옷을 해 입힌다. 또 이사제를 모실 곳에는 대나무를 베어 얽어 [제상](/topic/제상)을 만들어 두고 제를 모실 때 거기에다 떡시루를 얹어 놓게 된다.

제물은 제사에 임박해서 주로 열나흗날부터 만들기 시작하며, 화주 부부만 만든다. 제물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당샘에서 물을 길어다 쓴다. 또 이때부터는 [화장실](/topic/화장실)을 다녀오면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해야 한다. 이 일이 번거롭다 보니 화주 부부는 며칠간 거의 절식(節食)을 한다. 제물을 만들 때에는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몸가짐을 정결히 해야 한다. 음식물에 머리칼이 빠지지 않도록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침이 들어가지 않도록 입도 가린다. 간을 본다거나 맛을 보아서도 안 된다. 음식에 고춧가루는 쓰지 않는다.제물을 만들면 셋으로 나누어 둔다.

지금은 마을에 [농악](/topic/농악)을 칠 줄 아는 사람이 현격히 줄어서 굿을 치지 못하지만 전에는 초저녁부터 농악을 울려 정월 열나흗날 밤이 되면 온 마을이 흥겨운 잔치집처럼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 사람들이 합세하여 놀고 달집태우기도 하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 마을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고 마을 제사인 당산제만 지낸다.

자정(정월대보름 0시)이 가까워지면 화주 집에서 제물을 들고 먼저 교목제를 지내기 위해 산에 오른다. 여기에는 화주부부를 비롯하여 헌관과 축관,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함께 따른다. 제사의 순서는 유교식으로 한다. 제물 역시 집안 제사와 같다. 교목제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쓰며, 제사가 끝나면 그것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분향](/topic/분향)-강신-[독축](/topic/독축)-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사신의 순서에 따라 제사한다. 그러고 난 뒤 참가한 사람들 모두 한두 장씩 소지를 올리며 복을 빈다. 교목제가 끝나면 화주 집으로 모두 돌아가서 다시 제물을 들고 나와 당집에 올라 동일한 방법으로 제사한다. 또 이것이 끝나면 동일한 방법으로 제물을 들고 마을 앞으로 나가서 이사제를 모신다.

이사제를 할 때 자손 없이 죽은 [박첨지](/topic/박첨지)를 위한 제상을 따로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 준다. 박첨지 제사는 제상 없이 짚을 깔고 흰 종이 위에 밥을 두세 그릇 되는 분량으로 가능한 한 많이 차려서 바가지에 담아 놓고 간단하게 지낸다고 한다. 옛날에 마을 주민이 300가구가 넘던 시절에는 짚을 꼬아 줄을 크게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메고 소리를 하면서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서는 불놀이(달집태우기)를 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당뫼에 있던 당산나무에 줄을 매어 놓고 [그네](/topic/그네)를 뛰면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이사제까지 모두 끝나면 동이 튼다. 날이 밝으면 마을에서 공용으로 쓰는 서당으로 준비된 모든 음식을 화주 집에서 옮겨 온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이면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동회(洞會)를 연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은 마을 일 전반이며, 특히 그해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품삯 등을 정했다. 여기서 정해진 것은 누구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회의는 최근에 들어와 열리지 않는다.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이런 모임에 참석해 떡 한쪽이라도 먹으려 했으나 지금은 먹을 것이 흔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고, 더욱이 품삯의 경우도 이제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사고 또 마을 사람들이 타처에 가서 일하는 경우도 많아 마을에서 품삯을 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마을회의가 끝나면 며칠 동안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고 하지만 근자에는 역시 굿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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