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봉정마을고청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강원도 동해시 단봉동 봉정[마을](/topic/마을)의 제의. ‘고청제(告淸祭)’란 명칭을 사용한다.
definition
강원도 동해시 단봉동 봉정[마을](/topic/마을)의 제의. ‘고청제(告淸祭)’란 명칭을 사용한다.
mp3Cnt
0
wkorname
이한길
정의강원도 동해시 단봉동 봉정[마을](/topic/마을)의 제의. ‘고청제(告淸祭)’란 명칭을 사용한다.
정의강원도 동해시 단봉동 봉정[마을](/topic/마을)의 제의. ‘고청제(告淸祭)’란 명칭을 사용한다.
내용1. 제의 일시 : 고청제는 언젠가 [마을](/topic/마을)에서 부정이 발생하여 한 해 제사를 건너뛴 적이 있었지만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0시에 지낸다.

2. 당집과 당목 : 제당은 마을 건너편인 마을 앞산자락에 위치하며,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더욱이 도랑을 건너 올라가야 한다. 제당 주위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여러 그루 둘러져 있고, 그 앞에 땅을 우묵하게 파놓아 제단을 만들고 돌로 담을 야트막하게 쳐 놓았다. 이와 같이 이곳의 제당은 당집이 아닌 자연 상태이지만 [서낭당](/topic/서낭당)이라고 부른다. 고청제는 이곳에서 행하는 제의를 말하며 서낭제라고도 한다.
본래 서낭당이 있는 곳 토지는 마을 소유였지만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토지정리를 할 때 개인 소유가 됐다. 1993년 마을회관을 신축한 다음 서낭제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지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당으로 가는 길이 험하기도 하지만 겨울에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라도 오면 올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제의 과정에 필요한 불을 놓기 위해서는 나무도 한 짐 필요하였다. 나무를 준비하는 일은 마을의 대소사에서 잔일을 담당하던 소사의 몫이었지만 소사가 없어진 뒤에는 제의를 주로 담당하는 노인들이 직접 [장작](/topic/장작)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힘겨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본래의 제당은 그대로 둔 채 제의의 편의를 위해서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그래서 고청제당 주위의[잡초](/topic/잡초)를 베어내는 일은 지금도 추석 전에 매년 행하고 있다.

3. 신위 : 고청제단에다 중앙에 성황지신, 좌우로 토지지신과 여역지신의 지방을 종이에 써 붙이고 지낸다.

4. [축문](/topic/축문)과 홀기 : 마을에는 ‘숭정후삼신해사월하한(崇禎後三辛亥四月下澣)’(숭정은 중국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연호로 1628~1644년에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세 번째 신해년이므로 1791년이 된다. 하한은 하순을 말하며 21~30일이다)이라는 축문이 전승되고 있다. 이 축문은 대구1리의 축문과 몇 글자만 다르고 거의 동일하다. 축문은 성황신축, 토지신축, 여역신축 등 3종류로 되어 있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 및 제집사의 선정은 섣달 보름쯤에 한다. 제관은 생기를 보아 선정하고, 생기만 좋다면 매년 선정될 수 있다. 제관 및 제집사를 선정할 때에는 고청제의 전통을 전승하고자 마을의 젊은이들도 참여하게 해 제의가 중단되지 않도록 교육을 시킨다. 제관을 선정하면 봉정마을 통장 이름으로 발부한 [망지](/topic/망지)를 전달해 준다. 망지(望紙)는 누구를 무슨 제관(혹은 제집사)으로 임명하였음을 알린다는 내용을 적은 종이이다. 제물을 장만하는 집은 ‘제소(齊所)’ 또는 ‘제소댁(齊所宅)’이라 한다. 제소댁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목록에 따라서 제물을 장만한다. 본래 제소댁은 따로 선정하였지만 근래에는 통장이 제소댁을 맡도록 하였고, 제물을 사러 갈 때에는 두 명 이상의 주민이 함께 간다. 또한 야외 고청제당에서 제향할 때에는 제관 및 제집사들이 모두 참여해 함께 음식을 장만하였는데, 이 전통은 제의를 마을회관에서 행하게 된 다음에도 전승되고 있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근신하면서 문 밖 출입을 삼간다.

6. 제물 : 제물은 원래 떡과 메를 제외하고는 모두 생것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메는 마을과 제당 사이의 논 가운데 위치한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밤중에 떠와서 짓는데, 세 그릇을 준비한다. 메를 짓는 그릇은 새우([새옹](/topic/새옹))이지만 새우가 없을 때에는 냄비를 사용한다. 백설기는 분량을 시루당 쌀 한 되 정도로 해서 3시루를 준비한다. 제소댁은 백설기를 준비할 때 [한지](/topic/한지)를 입에 물어서 입김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topic/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여 만든다. 나물은 [미나리](/topic/미나리)와 무를 사용하는데, 생것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미나리도다발째로 올리고, 무도 통째로 올린다. 과일은 [삼실과](/topic/삼실과)([대추](/topic/대추), 밤, 곶감)이고, 포는 대구포를 사용한다. 어물은 참가자미를 주둥이와 꼬리 부분을 손질하지 않고 비늘도 치지 않은 채로 신위당 세 마리씩 올린다. 쇠고기도 신위당 한 근 총 세 근을 날 것으로 사용한다. 제주(祭酒)는 10여 년 전에는 직접 제소 집에서 담근 청주를 사용했으나 오늘날에는 청주를 구입해서 쓴다. 수탉은 세 마리를 구입하여 부정을 치고 난 뒤에 털을 뽑고 손질을 하여 [제상](/topic/제상)에 올린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기와 [제복](/topic/제복)은 2008년에 장만하였는데, 관모와 [촛대](/topic/촛대)·[향로](/topic/향로)·술잔·제복 등을 전부 장만하였다.
를 보면 신위를 기준으로 좌4변(籩) 우4두(豆)라 하여 발이 달리지 않은 그릇은 왼편으로 네 개 놓고, 발이 달린 그릇은 오른편으로 네 개 놓는다. 좌4변에는 어포/대조(魚脯/大棗), 건시(乾柹), 율황(栗黃), 청저(菁菹), 근저(芹菹), 구저(韮菹) 등 실제로는 네 그릇 이상을 놓는다. 우4두에는 녹염(鹿鹽), 어염(魚鹽), 생(牲), 형염(形鹽) 등을 놓는다. 녹염은 소금에 절인 사슴고기, 어염은 소금에 절인 물고기, 형염은 모양을 낸 소금이다. 중앙에 떡을 놓고, 그 다음에 폐백지를 담은 [소쿠리](/topic/소쿠리)를 놓고, 그 다음에 술 석 잔을 놓는다.

7. 제의절차 : 고청제는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서 마을총회를 열어 주관한다. 제관은 제삿날이 다가오면 보름 전에 제당에 먼저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주위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린 다음 제관 및제집사 집에도 모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둔다. 그러나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긴 다음부터는 금줄을 하지 않는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고, 그 사이에 [솔가지](/topic/솔가지)와 한지를 끼워 넣어 만들었다. 황토를 뿌리는 것은 [마당](/topic/마당) 주위에 몇 덩이를 놓아두는 정도이며, 이것은 금줄처럼 부정한 이의 접근을 막는다는 뜻이다. 주민들은 제삿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장작을 준비해서 제당으로 날랐다. 이 장작은 제의를 준비하고 행할 때 제당에 불을 피워 놓고 제물을 장만했고, 추위도 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관과 집사들은 제의를 행하기 위해서 제당에 올라간 뒤 오후 4~5시쯤에 수탉 세 마리의 목을 베어서 제당(지금은 마을회관) 주위에 피를 뿌려 부정을 가신다. 이는 잡신의 접근을 막는다는 뜻이다.
마을회관으로 제의 장소를 옮긴 뒤에는 제의과정에서 변화가 생겼다. 우선 세 개의 상을 [마루](/topic/마루)에 놓은 다음 그 위에 축문이 쓰인 야트막한 [병풍](/topic/병풍)을 쳐놓고 상 위에 제물을 진설한다. 이때 성황축이 쓰인 병풍을 정면에 모시고,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토지신 축문이 쓰인 병풍, 오른쪽에 여역신 축문이 쓰인 병풍을 놓는다. 제관이 모이고 밤이 어두워지면 제의를 시작하며, 절차는 홀기대로 진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제관들이 일차적으로 마을회관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일부 음식은 촌수(촌장)에게 싸 보내고, 나머지 음식은 제관들이 나누어 갖고 간다.

8. 제의비용 : 마을에서는 마을 소유 땅이 있어 이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에게 임차료를 받는다. 또 마을 소유의 산이 하나 있었으나 이것을 매각하여 마을기금으로 만들었다. 임차금과 기금의 이자로써 고청제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사](/topic/이사) 온 사람이 주민으로서 마을의 재산상 모든 권리와 의무를 함께하려면 입참금을 마을에 지불하여야 한다. 입참금은 예전에는 의무적으로 막걸리 한 말과 쌀 한 말이었고, 1980년 4월 1일 동해시로 편입된 뒤부터는 입회비 20만 원을 내야 진정한 주민의 자격을 주고 있다.

9. 전설 : 봉정마을 제당이 있는 곳은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이란 말이 전해지며, 실제로 제당이 있는 산을 넘으면 호현리가 있다.
내용1. 제의 일시 : 고청제는 언젠가 [마을](/topic/마을)에서 부정이 발생하여 한 해 제사를 건너뛴 적이 있었지만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0시에 지낸다.

2. 당집과 당목 : 제당은 마을 건너편인 마을 앞산자락에 위치하며,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더욱이 도랑을 건너 올라가야 한다. 제당 주위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여러 그루 둘러져 있고, 그 앞에 땅을 우묵하게 파놓아 제단을 만들고 돌로 담을 야트막하게 쳐 놓았다. 이와 같이 이곳의 제당은 당집이 아닌 자연 상태이지만 [서낭당](/topic/서낭당)이라고 부른다. 고청제는 이곳에서 행하는 제의를 말하며 서낭제라고도 한다.
본래 서낭당이 있는 곳 토지는 마을 소유였지만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토지정리를 할 때 개인 소유가 됐다. 1993년 마을회관을 신축한 다음 서낭제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지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당으로 가는 길이 험하기도 하지만 겨울에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라도 오면 올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제의 과정에 필요한 불을 놓기 위해서는 나무도 한 짐 필요하였다. 나무를 준비하는 일은 마을의 대소사에서 잔일을 담당하던 소사의 몫이었지만 소사가 없어진 뒤에는 제의를 주로 담당하는 노인들이 직접 [장작](/topic/장작)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힘겨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본래의 제당은 그대로 둔 채 제의의 편의를 위해서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그래서 고청제당 주위의[잡초](/topic/잡초)를 베어내는 일은 지금도 추석 전에 매년 행하고 있다.

3. 신위 : 고청제단에다 중앙에 성황지신, 좌우로 토지지신과 여역지신의 지방을 종이에 써 붙이고 지낸다.

4. [축문](/topic/축문)과 홀기 : 마을에는 ‘숭정후삼신해사월하한(崇禎後三辛亥四月下澣)’(숭정은 중국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연호로 1628~1644년에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세 번째 신해년이므로 1791년이 된다. 하한은 하순을 말하며 21~30일이다)이라는 축문이 전승되고 있다. 이 축문은 대구1리의 축문과 몇 글자만 다르고 거의 동일하다. 축문은 성황신축, 토지신축, 여역신축 등 3종류로 되어 있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 및 제집사의 선정은 섣달 보름쯤에 한다. 제관은 생기를 보아 선정하고, 생기만 좋다면 매년 선정될 수 있다. 제관 및 제집사를 선정할 때에는 고청제의 전통을 전승하고자 마을의 젊은이들도 참여하게 해 제의가 중단되지 않도록 교육을 시킨다. 제관을 선정하면 봉정마을 통장 이름으로 발부한 [망지](/topic/망지)를 전달해 준다. 망지(望紙)는 누구를 무슨 제관(혹은 제집사)으로 임명하였음을 알린다는 내용을 적은 종이이다. 제물을 장만하는 집은 ‘제소(齊所)’ 또는 ‘제소댁(齊所宅)’이라 한다. 제소댁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목록에 따라서 제물을 장만한다. 본래 제소댁은 따로 선정하였지만 근래에는 통장이 제소댁을 맡도록 하였고, 제물을 사러 갈 때에는 두 명 이상의 주민이 함께 간다. 또한 야외 고청제당에서 제향할 때에는 제관 및 제집사들이 모두 참여해 함께 음식을 장만하였는데, 이 전통은 제의를 마을회관에서 행하게 된 다음에도 전승되고 있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근신하면서 문 밖 출입을 삼간다.

6. 제물 : 제물은 원래 떡과 메를 제외하고는 모두 생것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메는 마을과 제당 사이의 논 가운데 위치한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밤중에 떠와서 짓는데, 세 그릇을 준비한다. 메를 짓는 그릇은 새우([새옹](/topic/새옹))이지만 새우가 없을 때에는 냄비를 사용한다. 백설기는 분량을 시루당 쌀 한 되 정도로 해서 3시루를 준비한다. 제소댁은 백설기를 준비할 때 [한지](/topic/한지)를 입에 물어서 입김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topic/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여 만든다. 나물은 [미나리](/topic/미나리)와 무를 사용하는데, 생것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미나리도다발째로 올리고, 무도 통째로 올린다. 과일은 [삼실과](/topic/삼실과)([대추](/topic/대추), 밤, 곶감)이고, 포는 대구포를 사용한다. 어물은 참가자미를 주둥이와 꼬리 부분을 손질하지 않고 비늘도 치지 않은 채로 신위당 세 마리씩 올린다. 쇠고기도 신위당 한 근 총 세 근을 날 것으로 사용한다. 제주(祭酒)는 10여 년 전에는 직접 제소 집에서 담근 청주를 사용했으나 오늘날에는 청주를 구입해서 쓴다. 수탉은 세 마리를 구입하여 부정을 치고 난 뒤에 털을 뽑고 손질을 하여 [제상](/topic/제상)에 올린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기와 [제복](/topic/제복)은 2008년에 장만하였는데, 관모와 [촛대](/topic/촛대)·[향로](/topic/향로)·술잔·제복 등을 전부 장만하였다.
를 보면 신위를 기준으로 좌4변(籩) 우4두(豆)라 하여 발이 달리지 않은 그릇은 왼편으로 네 개 놓고, 발이 달린 그릇은 오른편으로 네 개 놓는다. 좌4변에는 어포/대조(魚脯/大棗), 건시(乾柹), 율황(栗黃), 청저(菁菹), 근저(芹菹), 구저(韮菹) 등 실제로는 네 그릇 이상을 놓는다. 우4두에는 녹염(鹿鹽), 어염(魚鹽), 생(牲), 형염(形鹽) 등을 놓는다. 녹염은 소금에 절인 사슴고기, 어염은 소금에 절인 물고기, 형염은 모양을 낸 소금이다. 중앙에 떡을 놓고, 그 다음에 폐백지를 담은 [소쿠리](/topic/소쿠리)를 놓고, 그 다음에 술 석 잔을 놓는다.

7. 제의절차 : 고청제는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서 마을총회를 열어 주관한다. 제관은 제삿날이 다가오면 보름 전에 제당에 먼저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주위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린 다음 제관 및제집사 집에도 모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둔다. 그러나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긴 다음부터는 금줄을 하지 않는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고, 그 사이에 [솔가지](/topic/솔가지)와 한지를 끼워 넣어 만들었다. 황토를 뿌리는 것은 [마당](/topic/마당) 주위에 몇 덩이를 놓아두는 정도이며, 이것은 금줄처럼 부정한 이의 접근을 막는다는 뜻이다. 주민들은 제삿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장작을 준비해서 제당으로 날랐다. 이 장작은 제의를 준비하고 행할 때 제당에 불을 피워 놓고 제물을 장만했고, 추위도 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관과 집사들은 제의를 행하기 위해서 제당에 올라간 뒤 오후 4~5시쯤에 수탉 세 마리의 목을 베어서 제당(지금은 마을회관) 주위에 피를 뿌려 부정을 가신다. 이는 잡신의 접근을 막는다는 뜻이다.
마을회관으로 제의 장소를 옮긴 뒤에는 제의과정에서 변화가 생겼다. 우선 세 개의 상을 [마루](/topic/마루)에 놓은 다음 그 위에 축문이 쓰인 야트막한 [병풍](/topic/병풍)을 쳐놓고 상 위에 제물을 진설한다. 이때 성황축이 쓰인 병풍을 정면에 모시고,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토지신 축문이 쓰인 병풍, 오른쪽에 여역신 축문이 쓰인 병풍을 놓는다. 제관이 모이고 밤이 어두워지면 제의를 시작하며, 절차는 홀기대로 진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제관들이 일차적으로 마을회관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일부 음식은 촌수(촌장)에게 싸 보내고, 나머지 음식은 제관들이 나누어 갖고 간다.

8. 제의비용 : 마을에서는 마을 소유 땅이 있어 이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에게 임차료를 받는다. 또 마을 소유의 산이 하나 있었으나 이것을 매각하여 마을기금으로 만들었다. 임차금과 기금의 이자로써 고청제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사](/topic/이사) 온 사람이 주민으로서 마을의 재산상 모든 권리와 의무를 함께하려면 입참금을 마을에 지불하여야 한다. 입참금은 예전에는 의무적으로 막걸리 한 말과 쌀 한 말이었고, 1980년 4월 1일 동해시로 편입된 뒤부터는 입회비 20만 원을 내야 진정한 주민의 자격을 주고 있다.

9. 전설 : 봉정마을 제당이 있는 곳은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이란 말이 전해지며, 실제로 제당이 있는 산을 넘으면 호현리가 있다.
역사단봉동은 고려말 조선초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topic/마을)로 오늘날 봉정, 단실, 벽오 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단실(丹室)과 봉정(鳳亭)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 ‘단봉동’이라 하였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행정동은 북평동이지만 법정동으로는 단봉동에 속한다. 단봉동 세 마을은 각기 별도의 마을제의를 전승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봉정마을의 제의를 고청제라 한다. 마을에 전하는 문헌에 따르면 봉정마을의 제의는 수백 년간 지속된 것이다.
역사단봉동은 고려말 조선초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topic/마을)로 오늘날 봉정, 단실, 벽오 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단실(丹室)과 봉정(鳳亭)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 ‘단봉동’이라 하였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행정동은 북평동이지만 법정동으로는 단봉동에 속한다. 단봉동 세 마을은 각기 별도의 마을제의를 전승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봉정마을의 제의를 고청제라 한다. 마을에 전하는 문헌에 따르면 봉정마을의 제의는 수백 년간 지속된 것이다.
의의이 [마을](/topic/마을)의 제의는 ‘고 청제(告 淸祭)’였다. [고청제](/topic/고청제)라고 붙여 쓰지 않고 띄어쓰기를 해 놓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고청제의 어원을 연구할 때 도움이 될 듯하다.
참고문헌동해시서낭제 (이한길, 민속원, 2010)
의의이 [마을](/topic/마을)의 제의는 ‘고 청제(告 淸祭)’였다. [고청제](/topic/고청제)라고 붙여 쓰지 않고 띄어쓰기를 해 놓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고청제의 어원을 연구할 때 도움이 될 듯하다.
참고문헌동해시서낭제 (이한길, 민속원, 2010)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