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무수동국사봉

한국무속신앙사전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국사봉에 토제마(土製馬)를 [봉안](/topic/봉안)하던 제당. 조선시대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5년 5월 27일에 ‘국사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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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국사봉에 토제마(土製馬)를 [봉안](/topic/봉안)하던 제당. 조선시대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5년 5월 27일에 ‘국사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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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복
정의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국사봉에 토제마(土製馬)를 [봉안](/topic/봉안)하던 제당. 조선시대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5년 5월 27일에 ‘국사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정의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국사봉에 토제마(土製馬)를 [봉안](/topic/봉안)하던 제당. 조선시대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5년 5월 27일에 ‘국사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국사봉에 안치된 토제마는 모두 다섯 마리로 추정되지만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다. 다섯 마리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토제마는 몸통의 절반 정도가 떨어져 나갔다. 토제마는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6~7㎝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작 당시의 크기는 15㎝ 안팎으로 추정된다. 등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안장을 올렸고, 입을 벌린 모습에서 질주하는 말의 형상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토제마 한 마리는 회갈색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6~7㎝이다. 네 다리, 꼬리, 주둥이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말의 형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말 역시 안장을 지어 올린 흔적이 있으나 유실되어 [원형](/topic/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이 밖의 토제마는 부서진 말머리 세 개와 다리 네 개이다. 마두(馬頭)는 백색 또는 회색 점토로 빚었으며, 조잡한 형태로 이목구비를 표현하였다.

다섯 마리의 토제마는 [철마](/topic/철마), 옹기마, 자기마 등과 더불어 중부지방의 국[사당](/topic/사당)이나 산제당에서 종종 볼수 있는 [봉안](/topic/봉안)물이다. 즉 국사봉 토제마는 국사신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신물](/topic/신물)(神物)로서 속칭 ‘국사신말’, ‘산신령 말’, ‘서낭님 말’과 동일한 성격으로 헌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명 유래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무수동국사봉은 애당초 국사당이 자리한 성소(聖所)임이 분명하고, 조선 후기에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해마다 정기적인 국사제가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 토제마와 함께 주목되는 유물은 상평통보이다. 조선시대 때 사용된 엽전이 출토된 것은 국사제를 지낼 때 토제마를 위해 폐백으로 바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대전 덕진동 적오산성의 [말바위](/topic/말바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무쇠로 만든 말 다섯 필이 안치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평소 말바위를 지나가려면 엽전이나 동전을 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 엽전이 없으면 쇠붙이라도 던지고 가야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한다. 그런가 하면 충남 금산군 군북면 자진뱅이 뒷산에는 호환을 물리칠 목적으로 바위밑에 [쇠말](/topic/쇠말) 네 마리를 봉안, 매년 산신제를 지낼 때마다 쇠말에 술을 올리고 동전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이로 인해 지금도 쇠말 앞에는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와 같이 지난날 말이 모셔진 곳에는 엽전을 놓고 가거나 동제를 지내면서 쇠말에 엽전을 바친 사례가 종종 확인된다. 이에 따라 국사봉에서 출토된 상평통보는 조선시대 말에 대한 오랜 종교적 관념이 녹아 있는 유물의 흔적으로 보인다.
참고문헌대전시사 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2)
대전의 성곽 (대전직할시, 1993)
대전광역시 문화유적분포지도 (대전광역시, 2004)
무수동 국사봉 출토 토제마의 성격과 산신제 (강성복, 향토연구32, 충남향토연구회,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내용국사봉에 안치된 토제마는 모두 다섯 마리로 추정되지만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다. 다섯 마리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토제마는 몸통의 절반 정도가 떨어져 나갔다. 토제마는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6~7㎝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작 당시의 크기는 15㎝ 안팎으로 추정된다. 등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안장을 올렸고, 입을 벌린 모습에서 질주하는 말의 형상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토제마 한 마리는 회갈색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6~7㎝이다. 네 다리, 꼬리, 주둥이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말의 형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말 역시 안장을 지어 올린 흔적이 있으나 유실되어 [원형](/topic/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이 밖의 토제마는 부서진 말머리 세 개와 다리 네 개이다. 마두(馬頭)는 백색 또는 회색 점토로 빚었으며, 조잡한 형태로 이목구비를 표현하였다.

다섯 마리의 토제마는 [철마](/topic/철마), 옹기마, 자기마 등과 더불어 중부지방의 국[사당](/topic/사당)이나 산제당에서 종종 볼수 있는 [봉안](/topic/봉안)물이다. 즉 국사봉 토제마는 국사신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신물](/topic/신물)(神物)로서 속칭 ‘국사신말’, ‘산신령 말’, ‘서낭님 말’과 동일한 성격으로 헌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명 유래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무수동국사봉은 애당초 국사당이 자리한 성소(聖所)임이 분명하고, 조선 후기에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해마다 정기적인 국사제가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 토제마와 함께 주목되는 유물은 상평통보이다. 조선시대 때 사용된 엽전이 출토된 것은 국사제를 지낼 때 토제마를 위해 폐백으로 바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대전 덕진동 적오산성의 [말바위](/topic/말바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무쇠로 만든 말 다섯 필이 안치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평소 말바위를 지나가려면 엽전이나 동전을 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 엽전이 없으면 쇠붙이라도 던지고 가야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한다. 그런가 하면 충남 금산군 군북면 자진뱅이 뒷산에는 호환을 물리칠 목적으로 바위밑에 [쇠말](/topic/쇠말) 네 마리를 봉안, 매년 산신제를 지낼 때마다 쇠말에 술을 올리고 동전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이로 인해 지금도 쇠말 앞에는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와 같이 지난날 말이 모셔진 곳에는 엽전을 놓고 가거나 동제를 지내면서 쇠말에 엽전을 바친 사례가 종종 확인된다. 이에 따라 국사봉에서 출토된 상평통보는 조선시대 말에 대한 오랜 종교적 관념이 녹아 있는 유물의 흔적으로 보인다.
참고문헌대전시사 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2)
대전의 성곽 (대전직할시, 1993)
대전광역시 문화유적분포지도 (대전광역시, 2004)
무수동 국사봉 출토 토제마의 성격과 산신제 (강성복, 향토연구32, 충남향토연구회,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역사무수동국사봉 유적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이곳에서 출토된 토제마, 상평통보, 자기편 등이다. 특히 자기류는 시대를 달리하는 청자편, 분청사기편, 백자편이 두루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 국사봉 유적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곧 국[사당](/topic/사당)으로 기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수동의 역사가 고려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설득력을 더해 준다. 더욱이 국사제는 고려시대 산신신앙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성립된 이래 민간에서 널리 성행한 의례였다. 그러나 불교적색채가 짙은 국사제는 조선시대에 점차 산신제에 흡수되거나 제의 명칭이 산신제로 바뀌면서 20세기 이전에 대부분 소멸되었다. 18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온 무수동 국사당은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제사 유적이다.
역사무수동국사봉 유적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이곳에서 출토된 토제마, 상평통보, 자기편 등이다. 특히 자기류는 시대를 달리하는 청자편, 분청사기편, 백자편이 두루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 국사봉 유적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곧 국[사당](/topic/사당)으로 기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수동의 역사가 고려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설득력을 더해 준다. 더욱이 국사제는 고려시대 산신신앙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성립된 이래 민간에서 널리 성행한 의례였다. 그러나 불교적색채가 짙은 국사제는 조선시대에 점차 산신제에 흡수되거나 제의 명칭이 산신제로 바뀌면서 20세기 이전에 대부분 소멸되었다. 18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온 무수동 국사당은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제사 유적이다.
형태국사봉은 무수동 배나무골 뒤편에 위치한 해발 245m의 봉우리이다. 그 정상부에는 당집 형태의 국[사당](/topic/사당)이 존재했으나 오래전에 소실되어 상세한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유적 주변에는 원형이 거의 붕괴된 석축 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축은 국사당을 두른 [돌담](/topic/돌담)으로 추정되며, 국사봉 정상부에 둘레 20m, 높이 1m 안팎의 방형으로 쌓았다. 또한 무너진 돌 틈 사이에서 불에 검게 탄 와편이 수습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집은 와가(瓦家)였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동안 국사봉 유적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나 보루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부서진 토제마와 제기(祭器)로 사용된 자기편 등이 출토됨으로써 [마을](/topic/마을)신앙과 관련된 국사당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국사봉은 옛날에 ‘국사(國師)’라는 도승이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사방의 지세를 내려다보니 형국이 무척 좋아서 춤을 춘 자리 라고 전한다. 이 때문에 봉우리의 이름도 국사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사봉을 신성시하는 관념은 1950년대 전후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혹독한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국사봉으로 올라가서 그 상봉에 땔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지피며 비가 내리기를 청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형태국사봉은 무수동 배나무골 뒤편에 위치한 해발 245m의 봉우리이다. 그 정상부에는 당집 형태의 국[사당](/topic/사당)이 존재했으나 오래전에 소실되어 상세한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유적 주변에는 원형이 거의 붕괴된 석축 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축은 국사당을 두른 [돌담](/topic/돌담)으로 추정되며, 국사봉 정상부에 둘레 20m, 높이 1m 안팎의 방형으로 쌓았다. 또한 무너진 돌 틈 사이에서 불에 검게 탄 와편이 수습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집은 와가(瓦家)였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동안 국사봉 유적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나 보루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부서진 토제마와 제기(祭器)로 사용된 자기편 등이 출토됨으로써 [마을](/topic/마을)신앙과 관련된 국사당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국사봉은 옛날에 ‘국사(國師)’라는 도승이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사방의 지세를 내려다보니 형국이 무척 좋아서 춤을 춘 자리 라고 전한다. 이 때문에 봉우리의 이름도 국사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사봉을 신성시하는 관념은 1950년대 전후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혹독한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국사봉으로 올라가서 그 상봉에 땔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지피며 비가 내리기를 청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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