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빙고동부군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서울동빙고동부군당제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의 부군당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서울식의 [마을](/topic/마을)굿. 동빙고동의 부군당은 내력이 있으며, 서울지역 부군당의 전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이 부군당제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 당제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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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의 부군당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서울식의 [마을](/topic/마을)굿. 동빙고동의 부군당은 내력이 있으며, 서울지역 부군당의 전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이 부군당제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 당제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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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선
정의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의 부군당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서울식의 [마을](/topic/마을)굿. 동빙고동의 부군당은 내력이 있으며, 서울지역 부군당의 전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이 부군당제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 당제 가운데 하나이다.
정의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의 부군당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서울식의 [마을](/topic/마을)굿. 동빙고동의 부군당은 내력이 있으며, 서울지역 부군당의 전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이 부군당제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 당제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동빙고동부군당은 옛날 한강 나루터 근처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62[번지](/topic/번지)에 있다. 부군당은 100여 ㎡의 대지에 지어진 네 칸 정도의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당집이다. 근처 200m쯤 거리에 신목(神木)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부군당은 대략 400년 되었다고 한다. 달리 전하는 전설에는 구한말 시절에 애국지사가 호국정신을 기르기 위해 단군신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당시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도 한다. 예부터 오랜 내력을 지닌 부군당과 구한말 역사적 의식을 반영한 부군당이 서로 착종되어 부군당의 내력을 다양하게 한다. 하지만 역대의 문헌을 통해보면 이는 오랜 부군당의 전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풍속에 각사 안에 다들 신을 모시고 제사하는 것이 있는데 부근이라 한다. 행해온 지 이미 오래되어 능히 혁파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헌부가 먼저 지전을 불사르고 각사에 관문을 보내어 다 불사르게 하여 그 제사를 금하니 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國俗 各司內 皆設神以祀 名曰付根.行之旣久 莫有能革者. 至是 憲府先焚紙錢 傳關各司皆焚之 禁其祀 人多稱快)”라는 부군당의 내력에 대한 기록이 『중종실록(中宗實錄)』 1517년(중종 12) 8월 13일(丙辰)에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topic/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운데 ‘중국과 조선의 음사를 변증하는 이야기(華東淫祀辨證說)’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음사 가운데 지금 서울에는 각사에 신사가 있으니 이름하여 부근당이라고 하고, 이것이 와음이 되어 부군당이라고 부른다. 한 번 지내는 제사 비용이 심지어 수백 금이나 된다. 혹자가 말하기를부근은 송씨 처녀가 교접한 바라고 한다. 네 벽에 남자의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많이 매달아 놓았는데 심히 음란하고 외설스러우며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혹은 누가말하기를 부근이라고 하는 것은 [관사](/topic/관사)의 뿌리가 되는 것이며,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나무 막대기를 매다는 것은 사람의 뿌리가 음경인 것에 우의하여 음경의 막대기를 지어서 상징한다고 하였다] 지방의 고을에서도 역시 제사를 지냈다. 중종 기묘년에 각사의 부근신사를 혁파하였다.(淫祠中 今京師各司有神祠 名曰付根堂 訛呼府君堂. 一祀所費 至於累百金 或曰 付根乃宋氏姐所接 四壁多作木莖物以掛之 甚淫褻不經 [或曰 付根者 旣爲官司之根 而其懸木莖者 以寓人之根爲腎莖 故作莖物以象之] 外邑亦祀之 中宗己卯 罷各司付根神祠)”

두 [가지](/topic/가지) 기록을 통해 본다면 이 전통은 일거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역사적 변천 속에서 시대적 현상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빙고동부군당에 모셔진 신상 또는 신의 형상을 그린 그림인 화분을 보면 이 부군당의 성격을 일부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각사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혁파와 서울 변두리 지역의 부군당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헌 기록에서 지목하고 있는 곳은 한양의 중심지 관청에 해당하는 것이며, 다른 곳의 부군당까지 동시에 혁파의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른 지역에서 부군당에 성기를 봉납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이 예외적인 반증이다. 예를 들어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과 강화도 교동의 에서 이러한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각사의 혁파와 상관없이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으며, 문헌에 기록된 사실과 이러한 대목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은 1945년에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신의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초상화에는 이 부군당의 신상을 그리던 화승의 붓이 화폭에서 움직이지 않아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한 뒤에야 붓이 움직여서 현재의 신상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하는 [영험담](/topic/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현재 동빙고동부군당은 윗말 부군당과 아랫말 부군당이 함께 있다. 윗말 부군당은 동빙고동의 변전소 근처에 있었으나 [마을](/topic/마을) 개발로 당이 철거되었다. 현재 윗말 부군당은 아랫말 부군당의 한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본당 내에 있는 [현판](/topic/현판)의 기록에 따르면 부군당에서 섬기는 신은 1391년쯤부터 있은 수호신이자 한강 연안의 방어신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의 안녕과 질서를 수호하고 이에 기원하는 부군당임을 명시하였다. 이 마을 17번지와 현 장소인 62번지에 건립하고 시조왕 등의 [영정](/topic/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만신을 불러 부군당굿을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단의 왼쪽부터 별상, 삼불제석, 단군왕검, 구능, 마부, 산신앙, 이초관으로 아랫말의 무신도가 일곱 장 모셔져 있다. 한편 윗말 부군당에는 삼신제석, 단군왕비, 단군왕검 등 네 장의 무신도가 걸려 있다. 당의 건물 전면 벽 위쪽에는 「府君堂修理及增築費寄附芳名記」와 「府君堂肖像替成 및 修理費收捻方名記」라는 현판이한 개씩 걸려 있다.

단군왕검과 단군왕비를 [봉안](/topic/봉안)한 이유가 독특해 보이지만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전개 양상을 보면 이러한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부군당신의 역사적 인물형상화나 부군당신의전환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있다. 이 신격의 출현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단군숭배의 신앙화이다. 이와 관련하여『[무당내력](/topic/무당내력)(巫黨來歷)』과 같은 문헌의서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문에 “요임금 시대 상원 상갑자 시월 삼일에 신인이 태백산([백두산](/topic/백두산) 또는 [묘향산](/topic/묘향산)이라고 한다)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하니 이가 단군이다. 이에신교를 배설하여 장자 부루(扶婁)에게 가르쳤다. 부루는 어질고 복이 많았다. 인민이 그를 존경하고 신임하여 후일 터를 골라 단을 쌓고 토기에 벼 곡식을 담아 풀을 엮어 가려 놓았다. 이를 가리켜 ‘[부루단지](/topic/부루단지)’ 또는 ‘업줏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에 새 곡식으로 [시루떡](/topic/시루떡), 술, 과실을 올려 치성으로 기도하였다(上元甲子 (唐堯時) 十月三日 神人降于太白山(白頭山 或云妙香山) 檀木下 是爲檀君 乃設神敎而敎之 長子扶婁賢而多福故 人民尊信 後日擇地等壇 土器盛禾穀 編草掩之 稱曰 扶婁壇地 業主嘉利 每歲十月 新穀旣登以甑餠酒果致誠祈禱)”고 한 점이 단군왕검 봉안의 이해에준거를 제공한다. 윗말과 아랫말에서 부군당신으로 단군왕검과 왕비를 동시에 섬기는 것은 일정한 준거가 있으며 생산력의 주체를 단군으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는 본래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사흘 동안 부군당굿을 하고, 음력 삼월 보름날에 간단하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만신의 부군당굿과 [제관](/topic/제관)의 유교식 제례가 합쳐진 점에서 전형적인 서울의 마을굿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음력 삼월 보름날에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부군당제를 대신한다.

부군당굿의 일반적인 전개 양상은 대동 마을의 추렴굿인 [유가돌기](/topic/유가돌기)를 하고, 이어서 부군당굿·군웅굿·[성주굿](/topic/성주굿)을 성대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부군당신과 마을의 [화주](/topic/화주)들, 말명 등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놀이와 노래가 행해지는 특징이 있다. 부군당굿의 핵심적인 면모는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노는 [대감놀이](/topic/대감놀이)에서 찾을 수 있다.

동빙고동 경로당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은 제를 올리기 약 사흘 전부터 제물을 장만한다. 제일 당일 아침 일찍 부군당을 열고 당에 올라가 세배를 한 다음 화주가 무당을 이끌고 유가를 돈다. 이때 은행나무에 가서 치성을 드리며 돈을 찬조받기도 한다.

부군당굿이 오후 4~5시쯤 끝나면 저녁 제사를 올렸다. 제사는 먼저 윗말 부군당에서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재배-[첨작](/topic/첨작)-재배 순으로 지낸 뒤 아랫말 부군당으로 옮겨 분향-헌작-재배-첨작-재배 순으로 진행하였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올려 주고, 제관들과 부군당을 찾은 사람들 위주로 [음복](/topic/음복)을 하였다. 그리고 제물을 봉송 또는 [반기](/topic/반기)하였다.

유가식 제례는 일반적인 제사의 전개 과정과 대체로 유사하다. 예전에는 부군당굿과 유가식 제사를 모두 지냈으나 오늘날에는 유가식 제사만 지낸다. 예전에 활발하게 진행된두 가지 복합 형태의 의례가 소멸하고 유가식 제례만 이어지는 것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갈등이 개입하고, 서로 경제적인 이익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갈라서게 되고, 굿과 제사가 서로 분리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이 점에서 시속의 변화를 절감하게 되고 장차 이러한 분리 된다.
역사동빙고동부군당은 옛날 한강 나루터 근처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62[번지](/topic/번지)에 있다. 부군당은 100여 ㎡의 대지에 지어진 네 칸 정도의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당집이다. 근처 200m쯤 거리에 신목(神木)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부군당은 대략 400년 되었다고 한다. 달리 전하는 전설에는 구한말 시절에 애국지사가 호국정신을 기르기 위해 단군신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당시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도 한다. 예부터 오랜 내력을 지닌 부군당과 구한말 역사적 의식을 반영한 부군당이 서로 착종되어 부군당의 내력을 다양하게 한다. 하지만 역대의 문헌을 통해보면 이는 오랜 부군당의 전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풍속에 각사 안에 다들 신을 모시고 제사하는 것이 있는데 부근이라 한다. 행해온 지 이미 오래되어 능히 혁파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헌부가 먼저 지전을 불사르고 각사에 관문을 보내어 다 불사르게 하여 그 제사를 금하니 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國俗 各司內 皆設神以祀 名曰付根.行之旣久 莫有能革者. 至是 憲府先焚紙錢 傳關各司皆焚之 禁其祀 人多稱快)”라는 부군당의 내력에 대한 기록이 『중종실록(中宗實錄)』 1517년(중종 12) 8월 13일(丙辰)에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topic/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운데 ‘중국과 조선의 음사를 변증하는 이야기(華東淫祀辨證說)’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음사 가운데 지금 서울에는 각사에 신사가 있으니 이름하여 부근당이라고 하고, 이것이 와음이 되어 부군당이라고 부른다. 한 번 지내는 제사 비용이 심지어 수백 금이나 된다. 혹자가 말하기를부근은 송씨 처녀가 교접한 바라고 한다. 네 벽에 남자의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많이 매달아 놓았는데 심히 음란하고 외설스러우며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혹은 누가말하기를 부근이라고 하는 것은 [관사](/topic/관사)의 뿌리가 되는 것이며,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나무 막대기를 매다는 것은 사람의 뿌리가 음경인 것에 우의하여 음경의 막대기를 지어서 상징한다고 하였다] 지방의 고을에서도 역시 제사를 지냈다. 중종 기묘년에 각사의 부근신사를 혁파하였다.(淫祠中 今京師各司有神祠 名曰付根堂 訛呼府君堂. 一祀所費 至於累百金 或曰 付根乃宋氏姐所接 四壁多作木莖物以掛之 甚淫褻不經 [或曰 付根者 旣爲官司之根 而其懸木莖者 以寓人之根爲腎莖 故作莖物以象之] 外邑亦祀之 中宗己卯 罷各司付根神祠)”

두 [가지](/topic/가지) 기록을 통해 본다면 이 전통은 일거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역사적 변천 속에서 시대적 현상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빙고동부군당에 모셔진 신상 또는 신의 형상을 그린 그림인 화분을 보면 이 부군당의 성격을 일부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각사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혁파와 서울 변두리 지역의 부군당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헌 기록에서 지목하고 있는 곳은 한양의 중심지 관청에 해당하는 것이며, 다른 곳의 부군당까지 동시에 혁파의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른 지역에서 부군당에 성기를 봉납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이 예외적인 반증이다. 예를 들어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과 강화도 교동의 에서 이러한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각사의 혁파와 상관없이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으며, 문헌에 기록된 사실과 이러한 대목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은 1945년에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신의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초상화에는 이 부군당의 신상을 그리던 화승의 붓이 화폭에서 움직이지 않아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한 뒤에야 붓이 움직여서 현재의 신상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하는 [영험담](/topic/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현재 동빙고동부군당은 윗말 부군당과 아랫말 부군당이 함께 있다. 윗말 부군당은 동빙고동의 변전소 근처에 있었으나 [마을](/topic/마을) 개발로 당이 철거되었다. 현재 윗말 부군당은 아랫말 부군당의 한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본당 내에 있는 [현판](/topic/현판)의 기록에 따르면 부군당에서 섬기는 신은 1391년쯤부터 있은 수호신이자 한강 연안의 방어신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의 안녕과 질서를 수호하고 이에 기원하는 부군당임을 명시하였다. 이 마을 17번지와 현 장소인 62번지에 건립하고 시조왕 등의 [영정](/topic/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만신을 불러 부군당굿을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단의 왼쪽부터 별상, 삼불제석, 단군왕검, 구능, 마부, 산신앙, 이초관으로 아랫말의 무신도가 일곱 장 모셔져 있다. 한편 윗말 부군당에는 삼신제석, 단군왕비, 단군왕검 등 네 장의 무신도가 걸려 있다. 당의 건물 전면 벽 위쪽에는 「府君堂修理及增築費寄附芳名記」와 「府君堂肖像替成 및 修理費收捻方名記」라는 현판이한 개씩 걸려 있다.

단군왕검과 단군왕비를 [봉안](/topic/봉안)한 이유가 독특해 보이지만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전개 양상을 보면 이러한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부군당신의 역사적 인물형상화나 부군당신의전환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있다. 이 신격의 출현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단군숭배의 신앙화이다. 이와 관련하여『[무당내력](/topic/무당내력)(巫黨來歷)』과 같은 문헌의서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문에 “요임금 시대 상원 상갑자 시월 삼일에 신인이 태백산([백두산](/topic/백두산) 또는 [묘향산](/topic/묘향산)이라고 한다)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하니 이가 단군이다. 이에신교를 배설하여 장자 부루(扶婁)에게 가르쳤다. 부루는 어질고 복이 많았다. 인민이 그를 존경하고 신임하여 후일 터를 골라 단을 쌓고 토기에 벼 곡식을 담아 풀을 엮어 가려 놓았다. 이를 가리켜 ‘[부루단지](/topic/부루단지)’ 또는 ‘업줏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에 새 곡식으로 [시루떡](/topic/시루떡), 술, 과실을 올려 치성으로 기도하였다(上元甲子 (唐堯時) 十月三日 神人降于太白山(白頭山 或云妙香山) 檀木下 是爲檀君 乃設神敎而敎之 長子扶婁賢而多福故 人民尊信 後日擇地等壇 土器盛禾穀 編草掩之 稱曰 扶婁壇地 業主嘉利 每歲十月 新穀旣登以甑餠酒果致誠祈禱)”고 한 점이 단군왕검 봉안의 이해에준거를 제공한다. 윗말과 아랫말에서 부군당신으로 단군왕검과 왕비를 동시에 섬기는 것은 일정한 준거가 있으며 생산력의 주체를 단군으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는 본래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사흘 동안 부군당굿을 하고, 음력 삼월 보름날에 간단하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만신의 부군당굿과 [제관](/topic/제관)의 유교식 제례가 합쳐진 점에서 전형적인 서울의 마을굿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음력 삼월 보름날에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부군당제를 대신한다.

부군당굿의 일반적인 전개 양상은 대동 마을의 추렴굿인 [유가돌기](/topic/유가돌기)를 하고, 이어서 부군당굿·군웅굿·[성주굿](/topic/성주굿)을 성대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부군당신과 마을의 [화주](/topic/화주)들, 말명 등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놀이와 노래가 행해지는 특징이 있다. 부군당굿의 핵심적인 면모는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노는 [대감놀이](/topic/대감놀이)에서 찾을 수 있다.

동빙고동 경로당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은 제를 올리기 약 사흘 전부터 제물을 장만한다. 제일 당일 아침 일찍 부군당을 열고 당에 올라가 세배를 한 다음 화주가 무당을 이끌고 유가를 돈다. 이때 은행나무에 가서 치성을 드리며 돈을 찬조받기도 한다.

부군당굿이 오후 4~5시쯤 끝나면 저녁 제사를 올렸다. 제사는 먼저 윗말 부군당에서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재배-[첨작](/topic/첨작)-재배 순으로 지낸 뒤 아랫말 부군당으로 옮겨 분향-헌작-재배-첨작-재배 순으로 진행하였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올려 주고, 제관들과 부군당을 찾은 사람들 위주로 [음복](/topic/음복)을 하였다. 그리고 제물을 봉송 또는 [반기](/topic/반기)하였다.

유가식 제례는 일반적인 제사의 전개 과정과 대체로 유사하다. 예전에는 부군당굿과 유가식 제사를 모두 지냈으나 오늘날에는 유가식 제사만 지낸다. 예전에 활발하게 진행된두 가지 복합 형태의 의례가 소멸하고 유가식 제례만 이어지는 것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갈등이 개입하고, 서로 경제적인 이익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갈라서게 되고, 굿과 제사가 서로 분리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이 점에서 시속의 변화를 절감하게 되고 장차 이러한 분리 된다.
의의동빙고동부군당제는 세 [가지](/topic/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동빙고동부군당제의 면모가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마을](/topic/마을)굿의 일반적인 의미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마을굿은 대체로 기본적인 유형들과 이 유형들이 뒤섞인 복합적인 유형이 구현되는 특성을 보인다. 유교식 제사,[농악](/topic/농악)대굿, 무당식 굿이 기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복합형은 이 기본 유형들이 뒤섞여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게 된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이 가운데 무당식의 부군당굿과 [제관](/topic/제관)들의 제례가 합쳐진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복합을 통해 우리나라 마을굿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부군당굿을 먼저 하고 제관들의 제사를 나중에 하는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는 점도 이 부군당제의 의의에 해당한다.

둘째는 동빙고동부군당제의 부군당제로서의 특징을 규명할 수 있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부군당의 일반적인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반적인 조합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성격의 인물과 함께 [만신](/topic/만신)이 섬기는 인물의 성격이 결합된 점은 가장 특별하다. 단군왕검과 왕비, 일반적인 마을신이 아닌 무속에서 섬기는 신이 서로 병렬되어있다. 이러한 부군당제의 일반적인 신격 구성과 특성을 공유하는 점에서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일반적인 면모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우리는 부군당제의 일반적 성격을 공유함으로써 동빙고동부군당제가 특징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셋째는 동빙고동부군당제만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한 특징 가운데 주목할 만한것은 바로 부군당이 윗말과 아랫말로 구분되고, 윗말과 아랫말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단군왕검이 부인과 함께 위와 아래의 당에 모두 모셔져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 동빙고동부군당제에서 무당이 먼저 굿을하고, 저녁 무렵에 제관이 제례를 지낸다고 하는 점은 이 부군당제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면모이다.
참고문헌한국의 향토신앙 (장주근, 을유문화사, 1998)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 (이능화 저, 서영대 역, 창작과비평사, 2009)
서울영상민속지-한강변의 [마을](/topic/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8, 기록영화)
의의동빙고동부군당제는 세 [가지](/topic/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동빙고동부군당제의 면모가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마을](/topic/마을)굿의 일반적인 의미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마을굿은 대체로 기본적인 유형들과 이 유형들이 뒤섞인 복합적인 유형이 구현되는 특성을 보인다. 유교식 제사,[농악](/topic/농악)대굿, 무당식 굿이 기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복합형은 이 기본 유형들이 뒤섞여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게 된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이 가운데 무당식의 부군당굿과 [제관](/topic/제관)들의 제례가 합쳐진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복합을 통해 우리나라 마을굿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부군당굿을 먼저 하고 제관들의 제사를 나중에 하는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는 점도 이 부군당제의 의의에 해당한다.

둘째는 동빙고동부군당제의 부군당제로서의 특징을 규명할 수 있다. 동빙고동부군당제는 부군당의 일반적인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반적인 조합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성격의 인물과 함께 [만신](/topic/만신)이 섬기는 인물의 성격이 결합된 점은 가장 특별하다. 단군왕검과 왕비, 일반적인 마을신이 아닌 무속에서 섬기는 신이 서로 병렬되어있다. 이러한 부군당제의 일반적인 신격 구성과 특성을 공유하는 점에서 동빙고동부군당제는 일반적인 면모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우리는 부군당제의 일반적 성격을 공유함으로써 동빙고동부군당제가 특징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셋째는 동빙고동부군당제만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한 특징 가운데 주목할 만한것은 바로 부군당이 윗말과 아랫말로 구분되고, 윗말과 아랫말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단군왕검이 부인과 함께 위와 아래의 당에 모두 모셔져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 동빙고동부군당제에서 무당이 먼저 굿을하고, 저녁 무렵에 제관이 제례를 지낸다고 하는 점은 이 부군당제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면모이다.
참고문헌한국의 향토신앙 (장주근, 을유문화사, 1998)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 (이능화 저, 서영대 역, 창작과비평사, 2009)
서울영상민속지-한강변의 [마을](/topic/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8, 기록영화)
문화재관리국남해안별신굿 종합조사보고서1996
국립문화재연구소남해안별신굿하효길1998
도서출판 民俗苑한국의 굿하효길 외2002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경상도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무속의 물질문화 연구최진아2009
동빙고동 부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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