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지내는 서낭제 중 일부. 이 해신제는 향나무로 깎은 남근목을 봉헌하는 유교식 동제이다. |
---|---|
mp3Cnt | 0 |
wkorname | 윤동환 |
정의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지내는 서낭제 중 일부. 이 해신제는 향나무로 깎은 남근목을 봉헌하는 유교식 동제이다. | 역사 및 유래 | 강원도 최남단에 위치한 원덕읍의 신남[마을](/topic/마을)은 원덕읍의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갈남2리에 속한다. 속지명은 ‘섭너미’인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남(薪南)’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남마을의 성황당에는 본당(本堂)과 해신당(海神堂)이 있다. 본당은 ‘큰당’, ‘할아버지당’, ‘큰서낭당’이라고 부르는데 숫서낭 또는 남서낭으로 여긴다. 할아버지당은 1600년 즈음에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엄씨 할아버지’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성황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엄숙하고 두려워하는 신이기 때문에 잘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는다. 2000년 즈음만 하더라도 성황당 근처에는 어린애들을 못 가게 하였고, 여자들도 부정을 탄다고 절대 [가지](/topic/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예부터 성황님의 영험이 대단하다고만 알고 있을 뿐 이와 관련한 특별한 [영험담](/topic/영험담)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바닷가에 위치한 ‘해신당’은 ‘해랑당’, ‘여신당’이라고 부른다. 물에 빠져죽은 처녀신을 모시는 여서낭당이다. 해신당은 어업에 종사하는 동해안 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당이다. 신남마을 해신당에 처녀신을 모시고 남근목을 봉헌하게 된 사유를 알려 주는 전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있다. 기존에 밝혀진 삼척의 설화 관련 자료를 보면 애바위 전설과 남근목 봉헌은 전혀 별개인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이 두 이야기가 합쳐져서 해신당에 남근목을 봉헌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마을에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인정받고 해신당 입구에 비석으로 남겨진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는 장래를 약속한 처녀 애랑이와 총각덕배가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애랑이가 마을에서 떨어진 바위섬으로 미역을 따러 간다 하기에 덕배가 떼배로 애랑이를 바위섬에 데려다 주고 덕배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어 해변으로 나와 보니 이미 배를 띄울 수가 없을 만큼 강한 바람과 함께 집채 같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애랑은 살려 달라고 덕배를 부르며 애원하다가 안타깝게도 파도에 쓸려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이 바다에서는 고기가 전혀 잡히질 않았으며,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의 재앙 모두가 바위를 붙잡고 애쓰다 죽은 애랑이의 원혼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뜻을 모아 애랑이가 죽은 동쪽 바위섬을 향해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여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기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마을과 어부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가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어부가 술에 취해 고기가 잡히지 않은 데 대한 화풀이로 바다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소변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다른 배들은 여전히 빈 배인데 그 어부만 만선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은 그 어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어부가 지난 저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고 조업을 나갔고, 기대한 대로 모두들 만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그동안의 재앙이 처녀 애랑이의 원한 때문이라 확실히 믿고 애바위가 보이는 산 끝자락에 애랑신을 모시고 남근을 깎아 제물과 함께 바쳐서 혼인을 못한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다. 해신당은 신남마을의 가장 안쪽 바닷가 언덕에 한 서낭산(해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몇 년 전부터 대형 남근 조각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국내외 언론에 소개됨으로써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산의 생김새는 마치 바다를 향해 불끈 일어난 남근과 같이 생겼다. 그 귀두부분에 향나무 신수(神樹)와 그앞에 당집이 서 있다. 돌출한 낮은 구릉의 끝부분을 ‘서낭댕이’라 하며, 그 아래에 돌 제단을 야트막하게 만들어 제를 지냈다. 30여 년 되었다는 ‘해신당’이라고 음각한 [현판](/topic/현판)이 향나무 중간에 걸려 있으며 나뭇가지에는 무당들이 개인적으로 복을 빌면서 걸어 둔 [복주머니](/topic/복주머니)와 삼색천이 있었다. 1986년에 삼척군은 도비(道費)를 지원받아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13㎡ 정도의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형태의 당을 해신당의 신수 앞에 지었다. 당집 안에는 용모가 단정한 분홍[치마](/topic/치마), 노랑[저고리](/topic/저고리) 차림의 여신이 화상으로 모셔져 있다. 왼쪽 벽 모서리에는 제물로 바친 남근목 다섯 개를 한 줄로 엮어서 걸어 두었으며, 오른쪽 벽 모서리에는 향나무로 잘 깎은 남근목 다섯 개를 액자에 넣어 보여 주고있다. 제단에는 [향로](/topic/향로)와 [촛대](/topic/촛대), 과일·과자 등 제물이 놓여 있다. 최근에 불전함이 제단 왼쪽 구석에 놓였다. 전국에서 많은 무속인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 정의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지내는 서낭제 중 일부. 이 해신제는 향나무로 깎은 남근목을 봉헌하는 유교식 동제이다. | 역사 및 유래 | 강원도 최남단에 위치한 원덕읍의 신남[마을](/topic/마을)은 원덕읍의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갈남2리에 속한다. 속지명은 ‘섭너미’인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남(薪南)’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남마을의 성황당에는 본당(本堂)과 해신당(海神堂)이 있다. 본당은 ‘큰당’, ‘할아버지당’, ‘큰서낭당’이라고 부르는데 숫서낭 또는 남서낭으로 여긴다. 할아버지당은 1600년 즈음에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엄씨 할아버지’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성황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엄숙하고 두려워하는 신이기 때문에 잘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는다. 2000년 즈음만 하더라도 성황당 근처에는 어린애들을 못 가게 하였고, 여자들도 부정을 탄다고 절대 [가지](/topic/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예부터 성황님의 영험이 대단하다고만 알고 있을 뿐 이와 관련한 특별한 [영험담](/topic/영험담)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바닷가에 위치한 ‘해신당’은 ‘해랑당’, ‘여신당’이라고 부른다. 물에 빠져죽은 처녀신을 모시는 여서낭당이다. 해신당은 어업에 종사하는 동해안 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당이다. 신남마을 해신당에 처녀신을 모시고 남근목을 봉헌하게 된 사유를 알려 주는 전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있다. 기존에 밝혀진 삼척의 설화 관련 자료를 보면 애바위 전설과 남근목 봉헌은 전혀 별개인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이 두 이야기가 합쳐져서 해신당에 남근목을 봉헌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마을에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인정받고 해신당 입구에 비석으로 남겨진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는 장래를 약속한 처녀 애랑이와 총각덕배가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애랑이가 마을에서 떨어진 바위섬으로 미역을 따러 간다 하기에 덕배가 떼배로 애랑이를 바위섬에 데려다 주고 덕배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어 해변으로 나와 보니 이미 배를 띄울 수가 없을 만큼 강한 바람과 함께 집채 같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애랑은 살려 달라고 덕배를 부르며 애원하다가 안타깝게도 파도에 쓸려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이 바다에서는 고기가 전혀 잡히질 않았으며,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의 재앙 모두가 바위를 붙잡고 애쓰다 죽은 애랑이의 원혼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뜻을 모아 애랑이가 죽은 동쪽 바위섬을 향해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여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기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마을과 어부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가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어부가 술에 취해 고기가 잡히지 않은 데 대한 화풀이로 바다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소변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다른 배들은 여전히 빈 배인데 그 어부만 만선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은 그 어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어부가 지난 저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고 조업을 나갔고, 기대한 대로 모두들 만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그동안의 재앙이 처녀 애랑이의 원한 때문이라 확실히 믿고 애바위가 보이는 산 끝자락에 애랑신을 모시고 남근을 깎아 제물과 함께 바쳐서 혼인을 못한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다. 해신당은 신남마을의 가장 안쪽 바닷가 언덕에 한 서낭산(해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몇 년 전부터 대형 남근 조각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국내외 언론에 소개됨으로써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산의 생김새는 마치 바다를 향해 불끈 일어난 남근과 같이 생겼다. 그 귀두부분에 향나무 신수(神樹)와 그앞에 당집이 서 있다. 돌출한 낮은 구릉의 끝부분을 ‘서낭댕이’라 하며, 그 아래에 돌 제단을 야트막하게 만들어 제를 지냈다. 30여 년 되었다는 ‘해신당’이라고 음각한 [현판](/topic/현판)이 향나무 중간에 걸려 있으며 나뭇가지에는 무당들이 개인적으로 복을 빌면서 걸어 둔 [복주머니](/topic/복주머니)와 삼색천이 있었다. 1986년에 삼척군은 도비(道費)를 지원받아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13㎡ 정도의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형태의 당을 해신당의 신수 앞에 지었다. 당집 안에는 용모가 단정한 분홍[치마](/topic/치마), 노랑[저고리](/topic/저고리) 차림의 여신이 화상으로 모셔져 있다. 왼쪽 벽 모서리에는 제물로 바친 남근목 다섯 개를 한 줄로 엮어서 걸어 두었으며, 오른쪽 벽 모서리에는 향나무로 잘 깎은 남근목 다섯 개를 액자에 넣어 보여 주고있다. 제단에는 [향로](/topic/향로)와 [촛대](/topic/촛대), 과일·과자 등 제물이 놓여 있다. 최근에 불전함이 제단 왼쪽 구석에 놓였다. 전국에서 많은 무속인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 Pungeoje is the term for rituals held in the coastal regions to pray for peace in the village, safety for the fishermen at sea, and a big catch. Byeolsingut and haesinje are other terms used to refer to this big catch ritual. Prayers for safety and a big catch are offered to the sea deity [[Yongwang](/topic/DragonKing)](/topic/Yongwang) (Dragon King), the procedures generally officiated by a shaman. Byeolsingut of the eastern and southern coasts; pungeoje from the island of Hwangdo off Anmyeondo on the western coast; and haesinje of Ulleung and Jeju islands are some of the most widely known big catch rituals. | 내용 | 현재 신남[마을](/topic/마을)에서의 동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시월에 지낸다. 시월의 경우에는 첫 오일, 즉 첫 번째 말띠 날에 지낸다. 죽은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기가 가장 센 말의 날로잡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12지신 중에서 말의 성기가 가장 큰 이유도 있다. 본당은 7번 국도에서 진입하는 마을 어귀의 오른편 언덕에 있다. 2000년 4월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에 타서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에 산불이 크게 났지만 당 주변의 나무들은 타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서낭님의 영험함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본당은 원래 마을의 가운데에 있었으나, 1900년 무렵에 발생한 수해로 인해 당이 떠내려가서 현재의 위치로 모셨다고 한다. 성황당 건물 오른쪽 뒤에는 ‘서낭 솔’이라 부르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예전에는 이 신성한 소나무 앞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를 올렸으나 나중에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당집 형태의 건물을 지었다. 마을 어른들에 따르면 어릴 때 성황당이 건물 형태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집 형태의 성황당에서 동제를지낸 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이곳의 나무들은 함부로 벨 수가 없고, 단지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마을 공용의 상여틀을 만들 때에만 몇 그루 벨 수 있었다. 본당은 전체가 13㎡ 남짓 되는 장방형 구조의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을 한 시멘트 건물이다. [처마](/topic/처마)를 각목 받침의 겹처마 형태로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당 주변의 양 옆과 뒤쪽으로 [돌담](/topic/돌담)을쌓고, 당집은 양 옆으로 창문을 냈다. 창문과 출입문은 모두 새시(sash)로 만들었다. 당의 내부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고 신위를 써 놓았으며, [한지](/topic/한지)가 걸려 있다. 당의 외부에는「 성황당」이라는 [편액](/topic/편액)을 내걸었고, 내부 정면에는 나무로 만든 [문갑](/topic/문갑) 형태의 제실을 만들고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쓴 [위패](/topic/위패)를 모셨다. [제관](/topic/제관)은 당주 한 명과 제관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마을 주민이 많은 때에는 정확하게 여섯 명을 뽑았으나 주민 감소로 제관과 당주를 겸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다섯 명의제관 가운데 당주를 포함한 세명은 본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으로 간다. 제관은 제일(祭日) 열흘 정도 앞두고 정한다. 제관을 선정할 때 주관은 이장이 하지만 보통 한문을 잘 알고 책력 등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선정한다. 미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살펴서 괜찮은 주민을 몇 명 선정해 두면, 이장은 그 사람들에게 “금년에 제관으로 나간다”고 암시해 준다. 과거에는 제관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제관의 소임을 다해야 했지만 요즘에는 [생업](/topic/생업) 등의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제관을 선정하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미리 제외시키지만 마을에서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최우선자가 제관을 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차순위자에게 부탁한다. 젊은 사람이나 집안의 여성이 월경을 하는 경우에는 제관이나 당수가 될 수 없다. 미혼자와 독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제관 후보에서 배제한다. 금기가 심한 때에는 가족 중에 월경 있는자를 성황제 기간에 친척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과거에 비해 매우 약해진 상태이다. 제관이 선정된 이후부터 제관과 당주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고 꼭 해야 할 일만 한다. [금줄](/topic/금줄)은 본당과 해신당, 당주 집에 치는데, 통상 5~10일 전에 치며 더 일찍 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본당 옆에서 가져온 붉은 [황토](/topic/황토)를 함께 뿌린다. 그러나 2006년에 제물 준비를 마을회관에서 하면서부터 본당과 해신당, 마을회관에 금줄을 치고 있다. 금줄은제관과 당주가 마을회관에서 모여서 왼새끼에 한지를 끼워서 만든다. 제관은 금줄을 치기 전에 본당과 해신당을 깨끗이 대청소한다. 제관과 당주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 까다로운 금기를 지켜야 한다. 즉, 집 밖 외출을 금하고, 부정한 것들을 보거나 만지지 말아야 하고, 마을에 초상이 나도 참석하지 않는다.이 기간 동안은 마을 주민들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특히 여자들은 정초부터 제사가 끝나는 날까지 나들이를 삼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런 금기가 완화되었다. 당주 집에서 하던 제물 마련은 2006년 무렵 마을회관으로 옮겼다. 제물 장보기는 주로 삼척중앙시장이나 북평 장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제사 5~6일 전에 장을 보지만 요즘에는 개인적인 생업 문제로 전날에 간다. 금기가 많이 약해졌지만 최대한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일찍 출발한다. 이때 제물은 가장 좋은 것으로 구입하며,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부르는 대로 지불하며, 젊은 상인은 부인에게 몸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파는 집을 피한다. 상인들 역시 제물을 장만하러 장에 왔음을 알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지 않고 좋은 물건을 준다고 한다. 제물은 어물(대구·명태·문어·열기·가자미등)과 과일([대추](/topic/대추)·밤·곶감·[사과](/topic/사과)·배 등), 탕에 쓰이는 콩나물·무, 명태나 대구포, 김이다. 나물로 쓸 고사리, 도라지 등은 따로 산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초, 향, [창호지](/topic/창호지) 다섯 장 불천지(소지종이)를 충분히 산다. 제주(祭酒)는 고사 이틀 전에 임원 버스정류장 앞의 임원양조장에 특별주문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장보는 날에 막걸리를 넉넉히 사서 준비해 둔다. 요즘에는 소지·양초 등 제사용품은 불교사, 과일은 농협마트, 쇠고기는 단골처를 정하지 않고 그날 장보러 간제관들이 끌리는 집으로 가서 각각 사온다. 과거에는 소를 잡아서 제수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1960년쯤의 일이다. 장을 봐 온 제물은 당주 집에서 준비할 때에는 당주 집에 보관했지만 부인회로 이전되고부터 마을회관에 보관한다. 요즘에는 음식을 만들 때 머리에 수건을 써서 위생에 최선을 기하지만 과거에는 동백기름을 발라서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간은 대충 싱겁게 맞추는데 절대 맛보지 않고, 간장과 소금만 쓴다. 국은 콩나물을 넣어 끓이고 편은 백설기이다. 탕은 삼탕으로 어탕, 육탕, 소탕을 준비하면, 어탕에는 어물에서 나오는 몸통과 명태를 쓰고, 육탕은 쇠고기와 무, 소탕은 무만을 각각 넣어 끓인다. 어물은 한 접시에 쌓아 담아서 올리며, 문어는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따로 접시에 담는다. 나물은 고사리, 콩나물, 도라지, [미나리](/topic/미나리) 등을 한 접시에 동그랗게 모아서 담는다. 쇠고기산적과 두부, 유과 등도 올린다. 과거에 비해 제물 수가 많이 늘어난 편이다. 제기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는 목기가 있다. 마을회관에서는 당주댁 혼자서 제물을 준비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시작해도 손이 바쁘다. 저녁식사 후 제관들은 준비된 제물을 정리하고, 밤 11시가 되면 [새옹](/topic/새옹)메 두 그릇을 짓기 시작한다. 제물에서는 향나무로 만든 남근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관들은 제사 전날 오후 마을회관에 모여 대략 3단계로 역할을 분담하여 남근목을 만든다. 남근목 만들기는 원목의 모서리 다듬기-큰 윤곽 손질-음경 부분 조각-귀두 가공-몸통 가공-마[무리](/topic/무리)의 순으로 한다. 남근은 길이 22~23㎝, 굵기는 3.5~4㎝, 귀두 길이는 4.5~5.5㎝ 크기로 2005년 정월 제사 때 다섯 개를 제작하였다. 나무에 따라 길이나 굵기에 약간의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지금은 고사한 해신당 주변에 있던 향나무를 길이 20㎝정도로 잘라둔 재료를 사용하고있어 매년 비슷한 크기로 제작한다. 완성한 남근목은 귀두 부분을 보통 오른쪽을 향하게 하여 새끼줄에 끼워서 벽에 걸어 둔다. 제비는 마을공동기금과 개인적인 기부금, 해신당 안에 만들어 놓은 부조금으로 충당한다. 제비는 주로 제수 및 용품 구입, 목욕비 및 제관 활동비, 당주댁 수고비 등으로 지출된다. 제관과 당주에게 주는 수고비는 과거에는 없었다가 최근에 제관은 5만 원, 당주댁은 6~7만 원 정도 준다. 제비의 지출 내용과 비용은 기록하여 보관한다. 제의는 본당부터 행한다. 본래 제관들은 본당에서 제를 지낸 뒤 해신당에 가서 제사를 올렸지만, 지금은 제관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본당, 두 명은 해신당으로 나누어서 제의를 진행한다.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제관들은 밤 12시가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본당과 해신당으로 출발한다. 이때 각 당으로 가는 제관 가운데 가장 젊은 제관이 [지게](/topic/지게)에 제물을 지고 당까지한 번도 쉬지 않고 가야 한다. 이때문에 제관을 선정할 때 제물을 지고 갈 두 명은 젊은 사람으로 선출해야 하는데, 주민들의 노령화로쉽지 않은 실정이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외부인의 참가를 엄격히 통제하며 분위기는 엄숙한 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제사 때마다 언론사의 취재진과 학자들이 모여들어 분위기가 산만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은 이를 부정을 탄다고 우려하여 그 후로는 이들의 참가를 막고 예전처럼 제관들만 제사를 올린다. 우선 본당의 제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당에 도착하면 제관들은 부정을 치기 위해 짚불을 타넘고 들어간 다음 제단에 한지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한지를 펴기 전에 한지와 실을 정면 벽에 걸어두며, 이 한지는‘복지’라고 한다. 이후 신위가 모셔진 작은 [벽장](/topic/벽장)문을 열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을 진설하는 방법은 [기제사](/topic/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신앙 삼척신남마을해신제 1](/upload/img/20170106/20170106142711_t_.jpg) 제물을 진설하면 [초헌](/topic/초헌)관은 촛불을 밝힌 다음 일배하고 잔을 한 잔 받아서 모사에 붓는다. 다시 잔을 받아서 [헌작](/topic/헌작)하고 젓가락을 세 번 가볍게 단에다 두드리고 나서 제단에 올려놓고 합동 재배한다. 이후 제관들은 무릎을 꿇고, 축관은 축을 읽는다. [독축](/topic/독축)이 끝나면 합동 재배한다. 이어서 [아헌](/topic/아헌)관은 헌작하고 메그릇 뚜껑을 열어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가볍게 세 번 두드려 정렬한 후 재배한다. 이후 [종헌](/topic/종헌)관이 헌작하고 재배한다. 다음으로 초헌관이 메그릇 뚜껑에 술을 부어 세 번 정도로 나누어 제단 위에 있는 잔에 [첨작](/topic/첨작)한 다음 혼자 재배한다. 재배가 끝나면 서낭이 [흠향](/topic/흠향)할 시간적인 여유를 두기 위해 잠시 동안 제관 모두가 바닥에 꿇어 조용히 있다가 제관 전체가 반배한다. 이후 메그릇 뚜껑을 완전히 덮고 수저 등을 새롭게 정렬하고 나서 제관 전체가 재배한다. 재배 후 메를 한지 세 조각에 한 술씩 담아서 본당의 입구 왼쪽 아래 바닥에 [가지](/topic/가지)런하게 두고, 잔을 한잔 올린 다음 아헌관이 재배한다. 이것은 서낭을 각별히 모시는 수부신을 위한 것이다. 다음에 고[수레](/topic/수레)용 음식 일부를 떼어내 그릇에 담아 본당 외부로 나와서 잡귀들에게 [헌식](/topic/헌식)한다. 헌식 후 일단 제물을 [철상](/topic/철상)하고 나서 성황소지를 먼저 올린다. 이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소지를 제관들이 나누어서 축원을 하면서 소지를 올리고 나서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해신당도 본당 제관들이 출발할 때 함께 나간다. 해신당 입구 금줄을 친 아래에 짚을 태우고 제관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서 부정을 없앤다. 해신당에 들어서면 한지를 펴기 전에 준비한 남근목을 제당 왼쪽 벽에 걸어 둔다. 제단 위에는 촛불과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다. 이후에는 해신당 바닥에 자리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마을신앙 삼척신남마을해신제 2](/upload/img/20170106/20170106142743_t_.jpg) 해신당은 제관 두 명이 가기 때문에 한 사람이 초헌과 종헌을 겸해야 한다. 먼저 잔에 술을 조금 따르고, 이것을 [향로](/topic/향로)에 다시 부은 다음 제관이 다시 잔을 채워 제단 위에 헌작한다. 그 후 메에 숟가락을 꽂고 초헌이 재배하면 뒤를 이어 다른 제관이 헌작하고 재배한다. 채국을 물리고 메그릇 뚜껑을 덮고 나서 다시 반배하면, 이어서 제관이 함께 재배한다. 그러고 나서 첨잔하고 다시 재배한다. 해신당에서는 [축문](/topic/축문)을 읽지 않는다. 잡귀에게 먹이기 위한 고수레로 음식을 조금씩 떼어 그릇에 담는다. 해신당 앞 왼쪽 바닷가에서 “잡귀야 잘 받아먹어라”고 하면서 헌식한 뒤 잔에 담긴 술을 세 번 나누어 헌신(獻神)한다. [촛대](/topic/촛대) 두 대를 내려놓으면 제관 두 명이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소지를 올린다. 이는 본당에서 마을 전체 주민들을 위한 소지를 올리기 때문에 해신당에서는 어업과 관련된 주민만 소지를 올리기 위함이다. 개별 소지가 끝난 뒤 제물을 정리한다. 이후 용왕에게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헌식한다. 해신당에서 제의 소요시간은 약 20분 걸리고, 마치면 제물을 담아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새벽 2시 정도가 되면 제관들은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topic/음복)을 하며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3시쯤에 귀가한다. 본래 마을의 남자 주민 대부분이 음복에 참여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관들만 음복한다. 주민들은 오전 11시쯤에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을 행하고 결산회의를 한다. 정월 제사 때 올린 것에 대한 경과보고와 결산, 향후 추진 방향 등을 논의하는 것이 주목적이며,마을의 제반 문제 등에 대하여도 의견도 나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마을총회는 아니어서 구체적인 마을 전체의 결산이나 현안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날을 택하여 행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마을잔치라 할 만큼 모든 주민이 참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 내용 | 현재 신남[마을](/topic/마을)에서의 동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시월에 지낸다. 시월의 경우에는 첫 오일, 즉 첫 번째 말띠 날에 지낸다. 죽은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기가 가장 센 말의 날로잡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12지신 중에서 말의 성기가 가장 큰 이유도 있다. 본당은 7번 국도에서 진입하는 마을 어귀의 오른편 언덕에 있다. 2000년 4월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에 타서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에 산불이 크게 났지만 당 주변의 나무들은 타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서낭님의 영험함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본당은 원래 마을의 가운데에 있었으나, 1900년 무렵에 발생한 수해로 인해 당이 떠내려가서 현재의 위치로 모셨다고 한다. 성황당 건물 오른쪽 뒤에는 ‘서낭 솔’이라 부르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예전에는 이 신성한 소나무 앞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를 올렸으나 나중에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당집 형태의 건물을 지었다. 마을 어른들에 따르면 어릴 때 성황당이 건물 형태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집 형태의 성황당에서 동제를지낸 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이곳의 나무들은 함부로 벨 수가 없고, 단지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마을 공용의 상여틀을 만들 때에만 몇 그루 벨 수 있었다. 본당은 전체가 13㎡ 남짓 되는 장방형 구조의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을 한 시멘트 건물이다. [처마](/topic/처마)를 각목 받침의 겹처마 형태로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당 주변의 양 옆과 뒤쪽으로 [돌담](/topic/돌담)을쌓고, 당집은 양 옆으로 창문을 냈다. 창문과 출입문은 모두 새시(sash)로 만들었다. 당의 내부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고 신위를 써 놓았으며, [한지](/topic/한지)가 걸려 있다. 당의 외부에는「 성황당」이라는 [편액](/topic/편액)을 내걸었고, 내부 정면에는 나무로 만든 [문갑](/topic/문갑) 형태의 제실을 만들고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쓴 [위패](/topic/위패)를 모셨다. [제관](/topic/제관)은 당주 한 명과 제관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마을 주민이 많은 때에는 정확하게 여섯 명을 뽑았으나 주민 감소로 제관과 당주를 겸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다섯 명의제관 가운데 당주를 포함한 세명은 본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으로 간다. 제관은 제일(祭日) 열흘 정도 앞두고 정한다. 제관을 선정할 때 주관은 이장이 하지만 보통 한문을 잘 알고 책력 등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선정한다. 미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살펴서 괜찮은 주민을 몇 명 선정해 두면, 이장은 그 사람들에게 “금년에 제관으로 나간다”고 암시해 준다. 과거에는 제관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제관의 소임을 다해야 했지만 요즘에는 [생업](/topic/생업) 등의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제관을 선정하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미리 제외시키지만 마을에서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최우선자가 제관을 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차순위자에게 부탁한다. 젊은 사람이나 집안의 여성이 월경을 하는 경우에는 제관이나 당수가 될 수 없다. 미혼자와 독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제관 후보에서 배제한다. 금기가 심한 때에는 가족 중에 월경 있는자를 성황제 기간에 친척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과거에 비해 매우 약해진 상태이다. 제관이 선정된 이후부터 제관과 당주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고 꼭 해야 할 일만 한다. [금줄](/topic/금줄)은 본당과 해신당, 당주 집에 치는데, 통상 5~10일 전에 치며 더 일찍 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본당 옆에서 가져온 붉은 [황토](/topic/황토)를 함께 뿌린다. 그러나 2006년에 제물 준비를 마을회관에서 하면서부터 본당과 해신당, 마을회관에 금줄을 치고 있다. 금줄은제관과 당주가 마을회관에서 모여서 왼새끼에 한지를 끼워서 만든다. 제관은 금줄을 치기 전에 본당과 해신당을 깨끗이 대청소한다. 제관과 당주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 까다로운 금기를 지켜야 한다. 즉, 집 밖 외출을 금하고, 부정한 것들을 보거나 만지지 말아야 하고, 마을에 초상이 나도 참석하지 않는다.이 기간 동안은 마을 주민들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특히 여자들은 정초부터 제사가 끝나는 날까지 나들이를 삼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런 금기가 완화되었다. 당주 집에서 하던 제물 마련은 2006년 무렵 마을회관으로 옮겼다. 제물 장보기는 주로 삼척중앙시장이나 북평 장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제사 5~6일 전에 장을 보지만 요즘에는 개인적인 생업 문제로 전날에 간다. 금기가 많이 약해졌지만 최대한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일찍 출발한다. 이때 제물은 가장 좋은 것으로 구입하며,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부르는 대로 지불하며, 젊은 상인은 부인에게 몸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파는 집을 피한다. 상인들 역시 제물을 장만하러 장에 왔음을 알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지 않고 좋은 물건을 준다고 한다. 제물은 어물(대구·명태·문어·열기·가자미등)과 과일([대추](/topic/대추)·밤·곶감·[사과](/topic/사과)·배 등), 탕에 쓰이는 콩나물·무, 명태나 대구포, 김이다. 나물로 쓸 고사리, 도라지 등은 따로 산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초, 향, [창호지](/topic/창호지) 다섯 장 불천지(소지종이)를 충분히 산다. 제주(祭酒)는 고사 이틀 전에 임원 버스정류장 앞의 임원양조장에 특별주문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장보는 날에 막걸리를 넉넉히 사서 준비해 둔다. 요즘에는 소지·양초 등 제사용품은 불교사, 과일은 농협마트, 쇠고기는 단골처를 정하지 않고 그날 장보러 간제관들이 끌리는 집으로 가서 각각 사온다. 과거에는 소를 잡아서 제수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1960년쯤의 일이다. 장을 봐 온 제물은 당주 집에서 준비할 때에는 당주 집에 보관했지만 부인회로 이전되고부터 마을회관에 보관한다. 요즘에는 음식을 만들 때 머리에 수건을 써서 위생에 최선을 기하지만 과거에는 동백기름을 발라서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간은 대충 싱겁게 맞추는데 절대 맛보지 않고, 간장과 소금만 쓴다. 국은 콩나물을 넣어 끓이고 편은 백설기이다. 탕은 삼탕으로 어탕, 육탕, 소탕을 준비하면, 어탕에는 어물에서 나오는 몸통과 명태를 쓰고, 육탕은 쇠고기와 무, 소탕은 무만을 각각 넣어 끓인다. 어물은 한 접시에 쌓아 담아서 올리며, 문어는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따로 접시에 담는다. 나물은 고사리, 콩나물, 도라지, [미나리](/topic/미나리) 등을 한 접시에 동그랗게 모아서 담는다. 쇠고기산적과 두부, 유과 등도 올린다. 과거에 비해 제물 수가 많이 늘어난 편이다. 제기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는 목기가 있다. 마을회관에서는 당주댁 혼자서 제물을 준비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시작해도 손이 바쁘다. 저녁식사 후 제관들은 준비된 제물을 정리하고, 밤 11시가 되면 [새옹](/topic/새옹)메 두 그릇을 짓기 시작한다. 제물에서는 향나무로 만든 남근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관들은 제사 전날 오후 마을회관에 모여 대략 3단계로 역할을 분담하여 남근목을 만든다. 남근목 만들기는 원목의 모서리 다듬기-큰 윤곽 손질-음경 부분 조각-귀두 가공-몸통 가공-마[무리](/topic/무리)의 순으로 한다. 남근은 길이 22~23㎝, 굵기는 3.5~4㎝, 귀두 길이는 4.5~5.5㎝ 크기로 2005년 정월 제사 때 다섯 개를 제작하였다. 나무에 따라 길이나 굵기에 약간의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지금은 고사한 해신당 주변에 있던 향나무를 길이 20㎝정도로 잘라둔 재료를 사용하고있어 매년 비슷한 크기로 제작한다. 완성한 남근목은 귀두 부분을 보통 오른쪽을 향하게 하여 새끼줄에 끼워서 벽에 걸어 둔다. 제비는 마을공동기금과 개인적인 기부금, 해신당 안에 만들어 놓은 부조금으로 충당한다. 제비는 주로 제수 및 용품 구입, 목욕비 및 제관 활동비, 당주댁 수고비 등으로 지출된다. 제관과 당주에게 주는 수고비는 과거에는 없었다가 최근에 제관은 5만 원, 당주댁은 6~7만 원 정도 준다. 제비의 지출 내용과 비용은 기록하여 보관한다. 제의는 본당부터 행한다. 본래 제관들은 본당에서 제를 지낸 뒤 해신당에 가서 제사를 올렸지만, 지금은 제관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본당, 두 명은 해신당으로 나누어서 제의를 진행한다.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제관들은 밤 12시가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본당과 해신당으로 출발한다. 이때 각 당으로 가는 제관 가운데 가장 젊은 제관이 [지게](/topic/지게)에 제물을 지고 당까지한 번도 쉬지 않고 가야 한다. 이때문에 제관을 선정할 때 제물을 지고 갈 두 명은 젊은 사람으로 선출해야 하는데, 주민들의 노령화로쉽지 않은 실정이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외부인의 참가를 엄격히 통제하며 분위기는 엄숙한 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제사 때마다 언론사의 취재진과 학자들이 모여들어 분위기가 산만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은 이를 부정을 탄다고 우려하여 그 후로는 이들의 참가를 막고 예전처럼 제관들만 제사를 올린다. 우선 본당의 제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당에 도착하면 제관들은 부정을 치기 위해 짚불을 타넘고 들어간 다음 제단에 한지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한지를 펴기 전에 한지와 실을 정면 벽에 걸어두며, 이 한지는‘복지’라고 한다. 이후 신위가 모셔진 작은 [벽장](/topic/벽장)문을 열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을 진설하는 방법은 [기제사](/topic/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신앙 삼척신남마을해신제 1](/upload/img/20170106/20170106142711_t_.jpg) 제물을 진설하면 [초헌](/topic/초헌)관은 촛불을 밝힌 다음 일배하고 잔을 한 잔 받아서 모사에 붓는다. 다시 잔을 받아서 [헌작](/topic/헌작)하고 젓가락을 세 번 가볍게 단에다 두드리고 나서 제단에 올려놓고 합동 재배한다. 이후 제관들은 무릎을 꿇고, 축관은 축을 읽는다. [독축](/topic/독축)이 끝나면 합동 재배한다. 이어서 [아헌](/topic/아헌)관은 헌작하고 메그릇 뚜껑을 열어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가볍게 세 번 두드려 정렬한 후 재배한다. 이후 [종헌](/topic/종헌)관이 헌작하고 재배한다. 다음으로 초헌관이 메그릇 뚜껑에 술을 부어 세 번 정도로 나누어 제단 위에 있는 잔에 [첨작](/topic/첨작)한 다음 혼자 재배한다. 재배가 끝나면 서낭이 [흠향](/topic/흠향)할 시간적인 여유를 두기 위해 잠시 동안 제관 모두가 바닥에 꿇어 조용히 있다가 제관 전체가 반배한다. 이후 메그릇 뚜껑을 완전히 덮고 수저 등을 새롭게 정렬하고 나서 제관 전체가 재배한다. 재배 후 메를 한지 세 조각에 한 술씩 담아서 본당의 입구 왼쪽 아래 바닥에 [가지](/topic/가지)런하게 두고, 잔을 한잔 올린 다음 아헌관이 재배한다. 이것은 서낭을 각별히 모시는 수부신을 위한 것이다. 다음에 고[수레](/topic/수레)용 음식 일부를 떼어내 그릇에 담아 본당 외부로 나와서 잡귀들에게 [헌식](/topic/헌식)한다. 헌식 후 일단 제물을 [철상](/topic/철상)하고 나서 성황소지를 먼저 올린다. 이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소지를 제관들이 나누어서 축원을 하면서 소지를 올리고 나서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해신당도 본당 제관들이 출발할 때 함께 나간다. 해신당 입구 금줄을 친 아래에 짚을 태우고 제관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서 부정을 없앤다. 해신당에 들어서면 한지를 펴기 전에 준비한 남근목을 제당 왼쪽 벽에 걸어 둔다. 제단 위에는 촛불과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다. 이후에는 해신당 바닥에 자리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마을신앙 삼척신남마을해신제 2](/upload/img/20170106/20170106142743_t_.jpg) 해신당은 제관 두 명이 가기 때문에 한 사람이 초헌과 종헌을 겸해야 한다. 먼저 잔에 술을 조금 따르고, 이것을 [향로](/topic/향로)에 다시 부은 다음 제관이 다시 잔을 채워 제단 위에 헌작한다. 그 후 메에 숟가락을 꽂고 초헌이 재배하면 뒤를 이어 다른 제관이 헌작하고 재배한다. 채국을 물리고 메그릇 뚜껑을 덮고 나서 다시 반배하면, 이어서 제관이 함께 재배한다. 그러고 나서 첨잔하고 다시 재배한다. 해신당에서는 [축문](/topic/축문)을 읽지 않는다. 잡귀에게 먹이기 위한 고수레로 음식을 조금씩 떼어 그릇에 담는다. 해신당 앞 왼쪽 바닷가에서 “잡귀야 잘 받아먹어라”고 하면서 헌식한 뒤 잔에 담긴 술을 세 번 나누어 헌신(獻神)한다. [촛대](/topic/촛대) 두 대를 내려놓으면 제관 두 명이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소지를 올린다. 이는 본당에서 마을 전체 주민들을 위한 소지를 올리기 때문에 해신당에서는 어업과 관련된 주민만 소지를 올리기 위함이다. 개별 소지가 끝난 뒤 제물을 정리한다. 이후 용왕에게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헌식한다. 해신당에서 제의 소요시간은 약 20분 걸리고, 마치면 제물을 담아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새벽 2시 정도가 되면 제관들은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topic/음복)을 하며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3시쯤에 귀가한다. 본래 마을의 남자 주민 대부분이 음복에 참여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관들만 음복한다. 주민들은 오전 11시쯤에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을 행하고 결산회의를 한다. 정월 제사 때 올린 것에 대한 경과보고와 결산, 향후 추진 방향 등을 논의하는 것이 주목적이며,마을의 제반 문제 등에 대하여도 의견도 나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마을총회는 아니어서 구체적인 마을 전체의 결산이나 현안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날을 택하여 행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마을잔치라 할 만큼 모든 주민이 참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 지역사례 | 나무로 깎아 만든 모형 남근을 신에게 바치는 사례는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망개[마을](/topic/마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2리 등에서 남근목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는 곳은 고성군 망개마을과 삼척시 신남마을뿐이다. | 참고문헌 | 성기신앙 연구 (김태곤, 한국종교 1,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71) 성기신앙의 형태와 성격 (장장식, 한국민속학 27, 한국민속학회, 1995) 민간신앙으로본 성 (장장식, 한국의 민속과 성, 지식산업사, 1997) 강원도 해안지방의 성기신앙의 형성과 전승적 특징 (김종대, 국제아세아민속학 2, 국제아세아민속학회, 1998) 한국 성신앙연구 (이종철,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한국의 성신앙 (김종대, 인디북, 2004) 삼척지역의 [마을](/topic/마을)공동체신앙과 성 (김도현, 강원민속학 19, 강원도민속학회, 2005) 성기숭배 민속과 예술의 현장 (김태수, 민속원, 2005) 현지조사 (2003년 11월 5일, 2005년 2월 3일, 2008년7월 6일, 2010년 6월 24일) | Pungeoje is the term for rituals held in the coastal regions to pray for peace in the village, safety for the fishermen at sea, and a big catch. Byeolsingut and haesinje are other terms used to refer to this big catch ritual. Prayers for safety and a big catch are offered to the sea deity [[Yongwang](/topic/DragonKing)](/topic/Yongwang) (Dragon King), the procedures generally officiated by a shaman. Byeolsingut of the eastern and southern coasts; pungeoje from the island of Hwangdo off Anmyeondo on the western coast; and haesinje of Ulleung and Jeju islands are some of the most widely known big catch rituals. | 지역사례 | 나무로 깎아 만든 모형 남근을 신에게 바치는 사례는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망개[마을](/topic/마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2리 등에서 남근목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는 곳은 고성군 망개마을과 삼척시 신남마을뿐이다. | 참고문헌 | 성기신앙 연구 (김태곤, 한국종교 1,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71) 성기신앙의 형태와 성격 (장장식, 한국민속학 27, 한국민속학회, 1995) 민간신앙으로본 성 (장장식, 한국의 민속과 성, 지식산업사, 1997) 강원도 해안지방의 성기신앙의 형성과 전승적 특징 (김종대, 국제아세아민속학 2, 국제아세아민속학회, 1998) 한국 성신앙연구 (이종철,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한국의 성신앙 (김종대, 인디북, 2004) 삼척지역의 [마을](/topic/마을)공동체신앙과 성 (김도현, 강원민속학 19, 강원도민속학회, 2005) 성기숭배 민속과 예술의 현장 (김태수, 민속원, 2005) 현지조사 (2003년 11월 5일, 2005년 2월 3일, 2008년7월 6일, 2010년 6월 24일) |
---|
한국무속학회 | 제주도 굿의 무구 ‘기메’에 대한 고찰 | 강소전 | 2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