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죽림리석장승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죽림리 공작[마을](/topic/마을) 573[번지](/topic/번지)의 한 쌍의 돌장승. 1979년 12월 27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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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죽림리 공작[마을](/topic/마을) 573[번지](/topic/번지)의 한 쌍의 돌장승. 1979년 12월 27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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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죽림리 공작[마을](/topic/마을) 573[번지](/topic/번지)의 한 쌍의 돌장승. 1979년 12월 27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죽림리 공작[마을](/topic/마을) 573[번지](/topic/번지)의 한 쌍의 돌장승. 1979년 12월 27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죽림리석장승은 본래 다른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두 개의 장승이 나란히 서 있다. 남성을 상징하는 장승인 ‘[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은 [마을](/topic/마을)의 비탈진 언덕에 거의 상반신까지 묻혀있던 것을 1984년에 캐내어 현재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은 이 장승을 특별한 신앙 대상으로 여겼으나 당산제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이 장승에 소홀해졌다고 한다.

죽림리석장승이 언제 어떤 연유로 제작되어 이 지역에 세워졌는지는 현재로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공작마을의 지형이 역적이 될 인물이 나올 형국이어서 이를 막기 위해이 장승을 세웠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건너편인 정읍시 영원면 주촌리의 거미를 먹고 사는 공작형(孔雀形)의 [명당](/topic/명당)혈(明堂血)이어서 누구든지 이 명당혈에묘를 쓰면 왕이 되고자 흑심을 품게 되어 나라에 역적이 된다. 이에 따라 명당혈의 기를 죽이고 그 터를 없애기 위해 공작새의 밥통에 해당하는 현재의 위치에 장승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죽림리석장승의 조각 기법과 전체적인 조각 양식을 통해 제작시기를 17세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부안을 비롯해 전북지방의 여러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석장승이 17세기 말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목장승이 많이 건립되었으나 이 시기에 돌로 만들어진 장승이 많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목장승은 쉽게 부식되기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가 필요하지만 석장승은 한 번 세우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석장승은 목장승을 제작하여 세우는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 [농업](/topic/농업) 생산력 증가에 따라 어느 정도 경제력을 축적하였기에 죽림리를 비롯한 전북지방의 여러 지역의 주민들이 마을에 석장승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죽림리석장승이 전해 오는 백산면은 원래 고부군의 땅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4년에 고부군을 폐군시키고 그곳의 백산(白山), 거마(巨麻), 덕림(德林) 세개 면을 부안군에 편입시켜 백산면이라고 하였다. 백산이라는 이름은 용계리(龍溪里)의 서북쪽 뒤에 있는 해발 47m 높이의 ‘백산’에서 따온 것이다. 백산은 흰 화강석 바위가 많아서 산의 모습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부르게 된 명칭이다.

마을 주민들이 죽림리석장승을 장승, 장성이란 명칭 이외에 달리 부르는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죽림리석장승은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죽림리석장승은 이 지역에 전해 오는 유래담과 장승의 본래 기능을 통해 볼 때 마을의 평안을 위해 세운 수호신격이 아니라 [풍수](/topic/풍수)지리설과 연관하여 나쁜 기운을 막아 내기 위해 건립된장승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석장승의 몸에 새겨진 ‘금귀(禁鬼)’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마을로 귀신[鬼]이 들어오는 것을 막[禁]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죽림리석장승은 본래 다른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두 개의 장승이 나란히 서 있다. 남성을 상징하는 장승인 ‘[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은 [마을](/topic/마을)의 비탈진 언덕에 거의 상반신까지 묻혀있던 것을 1984년에 캐내어 현재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은 이 장승을 특별한 신앙 대상으로 여겼으나 당산제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이 장승에 소홀해졌다고 한다.

죽림리석장승이 언제 어떤 연유로 제작되어 이 지역에 세워졌는지는 현재로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공작마을의 지형이 역적이 될 인물이 나올 형국이어서 이를 막기 위해이 장승을 세웠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건너편인 정읍시 영원면 주촌리의 거미를 먹고 사는 공작형(孔雀形)의 [명당](/topic/명당)혈(明堂血)이어서 누구든지 이 명당혈에묘를 쓰면 왕이 되고자 흑심을 품게 되어 나라에 역적이 된다. 이에 따라 명당혈의 기를 죽이고 그 터를 없애기 위해 공작새의 밥통에 해당하는 현재의 위치에 장승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죽림리석장승의 조각 기법과 전체적인 조각 양식을 통해 제작시기를 17세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부안을 비롯해 전북지방의 여러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석장승이 17세기 말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목장승이 많이 건립되었으나 이 시기에 돌로 만들어진 장승이 많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목장승은 쉽게 부식되기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가 필요하지만 석장승은 한 번 세우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석장승은 목장승을 제작하여 세우는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 [농업](/topic/농업) 생산력 증가에 따라 어느 정도 경제력을 축적하였기에 죽림리를 비롯한 전북지방의 여러 지역의 주민들이 마을에 석장승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죽림리석장승이 전해 오는 백산면은 원래 고부군의 땅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4년에 고부군을 폐군시키고 그곳의 백산(白山), 거마(巨麻), 덕림(德林) 세개 면을 부안군에 편입시켜 백산면이라고 하였다. 백산이라는 이름은 용계리(龍溪里)의 서북쪽 뒤에 있는 해발 47m 높이의 ‘백산’에서 따온 것이다. 백산은 흰 화강석 바위가 많아서 산의 모습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부르게 된 명칭이다.

마을 주민들이 죽림리석장승을 장승, 장성이란 명칭 이외에 달리 부르는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죽림리석장승은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죽림리석장승은 이 지역에 전해 오는 유래담과 장승의 본래 기능을 통해 볼 때 마을의 평안을 위해 세운 수호신격이 아니라 [풍수](/topic/풍수)지리설과 연관하여 나쁜 기운을 막아 내기 위해 건립된장승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석장승의 몸에 새겨진 ‘금귀(禁鬼)’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마을로 귀신[鬼]이 들어오는 것을 막[禁]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한 쌍으로 구성된 죽림리석장승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각각 남성과 여성을 상징한다. 이 두 석 장승의 크기는 조금 차이가 있다. 남자를 상징하는‘[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上元禁鬼周將軍)’은 높이 109㎝, 폭 42㎝, 두께 29㎝이다. 여자를 상징하는 ‘하원금귀당장군(下元禁鬼唐將軍)’은 높이 93㎝, 폭 46㎝, 두께 28㎝이다. 이 두 석장승은 모두 머리에 [고깔](/topic/고깔)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성을 상징하는 석장승은 남성을 상징하는 석장승보다 더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형태한 쌍으로 구성된 죽림리석장승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각각 남성과 여성을 상징한다. 이 두 석 장승의 크기는 조금 차이가 있다. 남자를 상징하는‘[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上元禁鬼周將軍)’은 높이 109㎝, 폭 42㎝, 두께 29㎝이다. 여자를 상징하는 ‘하원금귀당장군(下元禁鬼唐將軍)’은 높이 93㎝, 폭 46㎝, 두께 28㎝이다. 이 두 석장승은 모두 머리에 [고깔](/topic/고깔)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성을 상징하는 석장승은 남성을 상징하는 석장승보다 더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지역사례죽림리석장승과 유사한 형태의 장승은 전라도를 비롯해 경상도 등지의 남부지방 집중 분포되어 있다. 전북지방에는 부안을 비롯해 고창, 남원, 익산 지역에 석장승이 남아 있다.

특히 죽림리와 인접해 있는 부안의 서문안당산, 동문안당산에서도 죽림리와 유사한 형태의 석장승 한쌍이 [마을](/topic/마을)의 당산 신체 일부로 전해 온다. 한편 죽림리 지역의 석장승에는‘[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上元禁鬼周將軍)’·‘하원금귀당장군(下元禁鬼唐將軍)’, 동문안당산과 서문안당산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각각 보인다. 죽림리석장승과 부안 읍내 동·서문안 당산의 신체인 석장승의 명문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죽림리석 장승이 동·서문[안석](/topic/안석)장승에 비해 기능과 역할이좀 더 구체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고 새겨진 장승과도 기능과 역할이 분명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림리와 부안 동·서문안당산에 보이는 이들 석장승이 ‘周(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마을의 사방을 지키는 개념의 신체인 반면에 ‘天下大將軍’·‘地下大將軍’이라고 새겨진장승은 마을의 이정표 내지 마을 어귀에 쌓여 있는 성황당 옆에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죽림리석장승은 마을의 사방을 지켜 주면서 특히 외부의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마을지킴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한국민족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부안의 땅이름 연구 (김형주, 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2001)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전북학연구총서 2 (박호원,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지역사례죽림리석장승과 유사한 형태의 장승은 전라도를 비롯해 경상도 등지의 남부지방 집중 분포되어 있다. 전북지방에는 부안을 비롯해 고창, 남원, 익산 지역에 석장승이 남아 있다.

특히 죽림리와 인접해 있는 부안의 서문안당산, 동문안당산에서도 죽림리와 유사한 형태의 석장승 한쌍이 [마을](/topic/마을)의 당산 신체 일부로 전해 온다. 한편 죽림리 지역의 석장승에는‘[상원](/topic/상원)금귀주[장군](/topic/장군)(上元禁鬼周將軍)’·‘하원금귀당장군(下元禁鬼唐將軍)’, 동문안당산과 서문안당산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각각 보인다. 죽림리석장승과 부안 읍내 동·서문안 당산의 신체인 석장승의 명문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죽림리석 장승이 동·서문[안석](/topic/안석)장승에 비해 기능과 역할이좀 더 구체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고 새겨진 장승과도 기능과 역할이 분명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림리와 부안 동·서문안당산에 보이는 이들 석장승이 ‘周(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마을의 사방을 지키는 개념의 신체인 반면에 ‘天下大將軍’·‘地下大將軍’이라고 새겨진장승은 마을의 이정표 내지 마을 어귀에 쌓여 있는 성황당 옆에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죽림리석장승은 마을의 사방을 지켜 주면서 특히 외부의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마을지킴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한국민족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부안의 땅이름 연구 (김형주, 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2001)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전북학연구총서 2 (박호원,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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