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장촌마을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홍성군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topic/마을) 북동쪽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 ‘산제당’에서 마을의 액운과 흉년을 막고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빌기 위해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는 산신제.
definition
홍성군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topic/마을) 북동쪽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 ‘산제당’에서 마을의 액운과 흉년을 막고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빌기 위해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는 산신제.
mp3Cnt
0
wkorname
이관호
정의홍성군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topic/마을) 북동쪽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 ‘산제당’에서 마을의 액운과 흉년을 막고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빌기 위해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는 산신제.
정의홍성군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topic/마을) 북동쪽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 ‘산제당’에서 마을의 액운과 흉년을 막고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빌기 위해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는 산신제.
내용장촌의 산신제는 원래 정월 초사흗날부터 사흘 동안 제를 지냈다. 요즈음엔 하루를 잡아 세 시간 정도 제를 지낸다. 제당은 [마을](/topic/마을)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에 있다. 산제당이라 불리는 장촌산제당은 원래 바위가 대상이었으나 언제부턴가 현재와 같은 당집 형태의 산제당을 지어 그 안에다 산신도를 모시고 해마다 정성껏 산신을 모시고 있다. 또한 산제당으로부터 약 20m 아래에 있는 용왕샘에서는 용왕에게 드리는 [용왕제](/topic/용왕제)(용신제라고도 함)를 지낸다. 산제당에서 모시는 대상 신은 남성신인 산신령으로 호랑이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산신이라 부른다. 용왕제에서는 용왕을 대상 신으로 한다. 한편 마을 어귀에는 돌무더기, 서낭댕이(질마재) 고개에는 돌부처가 각각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 지금도 산신제를 지낼 때 이곳에서도 제를 함께 지내고 있다.

[제관](/topic/제관)(祭官)은 [대동회](/topic/대동회)의에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20세 이후의 깨끗하고 정갈한 남자로 정하며 늦어도 음력 섣달그믐까지는 선출해야 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제관 집에는 [대문](/topic/대문) 앞에 [황토](/topic/황토) 흙을 뿌리고 용(龍)그림이 그려져 있는 [용기](/topic/용기)(龍旗)를 세워 둔다. 축관은 제관 가운데 한 사람이 한다. 제관은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샘제](/topic/샘제)를 지내야 한다. 제의에는 남자만이 참여할 수 있으며, 제관과 축관 이외에도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으로 네댓 명이 소지를 올리기 위해 참여한다.

제비(祭費)는 걸립으로 충당한다. 1990년경만 하더라도 풍물을 치면서 정월 초하룻날부터 초이튿날까지 걸립을 하였다. 걸립은 가구별로 2만~3만 원을 형편에 맞게 성의껏 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5만 원 정도를 내기도 한다. 요즈음엔 [가축](/topic/가축)이 놀랄까 봐 풍물을 치지 않고 조용히 걸립을 한다. 제의에 소요된 경비는 약 40만 원이다. 이것으로 밤, [대추](/topic/대추), 곶감, 백설기(한 말 석 되 서 홉), 청수, 초, 두부탕 등을 준비한다. 이때 각각의 제물은 모두 다섯 벌씩 준비한다. 제물 구입은 약 8㎞ 떨어진 광천 장에서 한다. 새벽 일찍 [삿갓](/topic/삿갓)을 쓰고 산길로 간다. 제기는 예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상사발’이라 불리는 제기를 사용하며 산제당에 보관한다.

우선 제물은 제관이 준비한다. 통벼를 산신제 당일 [절구](/topic/절구)로 찧어서 떡과 메를 짓고 두부를 만든다. 이때 제물 준비자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외출을 금해야 한다. 특히 피를 보아서도 안 되며 싸움을 해서도 안 된다.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일주일 뒤 인(寅, 범)날로 새로 날을 잡아 제를 지낸다.

부정에 대한 [일화](/topic/일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대 이 마을에 사는 박○두가 제관으로 선출된 적이 있다. 그해에는 정월 초사흗날에 제를 지냈다. 그러나 제를 잘못 지내 같은 마을 주민 전○진 집에서 기르는 송아지만큼 큰 개를 호랑이가 물어 죽였다. 이 때문에 보름 뒤에 산신제를 다시 지냈다. 또 제를 지내고 나서 떡시루를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떡시루가 땅에 나뒹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떡시루는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것들이 모두 산신령의 조화라고 믿었다.

제관이 선출된 뒤 정초에 제관과 집주(음식 장만하는 집) 집 오른쪽 대문에다 용기를 걸어 두고 대문간에 황토를 뿌린다. 제 당일이 되면 제물을 준비한다. 백설기는 한 말 석 되 서 홉을 시루 하나에 찐다. 제물은 모두 집에서 준비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제물을 진 사람이 맨 앞에 올라가고 그 뒤를 제관과 축관이 따라 올라간다.

산에 올라가면 먼저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용왕제는 산제당 아래에 있는 용왕샘에서 지낸다. 우선 용왕샘 안에는 짚을 열 십(十) 자로 깔고 그 위에 동․서․남․북․중앙 등 오방으로 김밥 다섯 개를 놓고 가운데에는 불린 미역을 놓는다. 그런 다음 그 앞에 [불밝이쌀](/topic/불밝이쌀)을 놓는다. 불밝이쌀은 쌀 한 되 서 홉을 종지에다 받쳐 놓고 발심지를 꽂은 다음 촛불을 밝힌다. 용왕샘 둑 앞에는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로는 북어포, 미역, 김, 메 열두 그릇 등을 준비한다. 제물이 진설되면 제관이 사배(四拜)를 하고 대동축을 [독축](/topic/독축)(讀祝)한다. 이 대동축은 용왕축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왕축(龍王祝)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 初三日(癸丑)
長村 一同 敢昭告于 龍王前에 祝願하옵기를 今年에도 雨順風調하야 농작물이 豐登하고 家禽이 足하오며 四方으로 들어오는 卑災橫禍를 막아주시고 出征軍人으로 하여금 勝戰鼓를 올리고 平和를 노래하며 한 사람도 變故 없이 돌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祝願하옵고 卑薄한 精誠으로 發願하오니 感應하소서

독축이 끝나면 [전지](/topic/전지)(全紙) 한 장으로 대동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동서남북으로 다니는 우리 자손들 자동차 사고 없게 해 주고, 군인 간 사람들 무사하게 해 주고, 동네 농사 잘 되고 질병 없게 해 주고, 가축도 무사하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이것으로 용왕제는 끝이 난다. 다음으로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제관 전체가 사배를 한다. 엎드려 사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산신축을 독축한다. 독축(讀祝)이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대동소지를 먼저 올린 다음 가정마다 개인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재(滓)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대동종이 [고깔](/topic/고깔)을 쓴다. 개인소지는 산제 봉성록(奉誠錄)을 미리 작성하여 일일이 식구 수대로 올린다. 그 뒤 제관 네 명 모두 연이어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제관들은 다시 사배를 한다. 그런 다음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철상](/topic/철상)(撤床)을 한다. 철상을 한 제물은 마을회관으로 들고 내려와 다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마을신앙 홍성장촌마을산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935_t_.jpg)

이튿날인 초나흗날 아침 9시쯤 마을회관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결산을 한다. 이 때 가장 먼저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소지가 잘 올라갔는지 여부를 제관들에게 묻는다. 이어 10시쯤에 제물을 나누어 먹고 결산한 다음 용기를 내린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와 풍물을 울린다. 이때 풍물을 울리는 동시에 용기(龍旗)를 내린다. 이어 대동회의를 소집하여 산제 비용과 동네 일 년 예산 등을 결산하고 마을잔치를 연다.
참고문헌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내용장촌의 산신제는 원래 정월 초사흗날부터 사흘 동안 제를 지냈다. 요즈음엔 하루를 잡아 세 시간 정도 제를 지낸다. 제당은 [마을](/topic/마을)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기암산 중턱에 있다. 산제당이라 불리는 장촌산제당은 원래 바위가 대상이었으나 언제부턴가 현재와 같은 당집 형태의 산제당을 지어 그 안에다 산신도를 모시고 해마다 정성껏 산신을 모시고 있다. 또한 산제당으로부터 약 20m 아래에 있는 용왕샘에서는 용왕에게 드리는 [용왕제](/topic/용왕제)(용신제라고도 함)를 지낸다. 산제당에서 모시는 대상 신은 남성신인 산신령으로 호랑이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산신이라 부른다. 용왕제에서는 용왕을 대상 신으로 한다. 한편 마을 어귀에는 돌무더기, 서낭댕이(질마재) 고개에는 돌부처가 각각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 지금도 산신제를 지낼 때 이곳에서도 제를 함께 지내고 있다.

[제관](/topic/제관)(祭官)은 [대동회](/topic/대동회)의에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20세 이후의 깨끗하고 정갈한 남자로 정하며 늦어도 음력 섣달그믐까지는 선출해야 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제관 집에는 [대문](/topic/대문) 앞에 [황토](/topic/황토) 흙을 뿌리고 용(龍)그림이 그려져 있는 [용기](/topic/용기)(龍旗)를 세워 둔다. 축관은 제관 가운데 한 사람이 한다. 제관은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샘제](/topic/샘제)를 지내야 한다. 제의에는 남자만이 참여할 수 있으며, 제관과 축관 이외에도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으로 네댓 명이 소지를 올리기 위해 참여한다.

제비(祭費)는 걸립으로 충당한다. 1990년경만 하더라도 풍물을 치면서 정월 초하룻날부터 초이튿날까지 걸립을 하였다. 걸립은 가구별로 2만~3만 원을 형편에 맞게 성의껏 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5만 원 정도를 내기도 한다. 요즈음엔 [가축](/topic/가축)이 놀랄까 봐 풍물을 치지 않고 조용히 걸립을 한다. 제의에 소요된 경비는 약 40만 원이다. 이것으로 밤, [대추](/topic/대추), 곶감, 백설기(한 말 석 되 서 홉), 청수, 초, 두부탕 등을 준비한다. 이때 각각의 제물은 모두 다섯 벌씩 준비한다. 제물 구입은 약 8㎞ 떨어진 광천 장에서 한다. 새벽 일찍 [삿갓](/topic/삿갓)을 쓰고 산길로 간다. 제기는 예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상사발’이라 불리는 제기를 사용하며 산제당에 보관한다.

우선 제물은 제관이 준비한다. 통벼를 산신제 당일 [절구](/topic/절구)로 찧어서 떡과 메를 짓고 두부를 만든다. 이때 제물 준비자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외출을 금해야 한다. 특히 피를 보아서도 안 되며 싸움을 해서도 안 된다.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일주일 뒤 인(寅, 범)날로 새로 날을 잡아 제를 지낸다.

부정에 대한 [일화](/topic/일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대 이 마을에 사는 박○두가 제관으로 선출된 적이 있다. 그해에는 정월 초사흗날에 제를 지냈다. 그러나 제를 잘못 지내 같은 마을 주민 전○진 집에서 기르는 송아지만큼 큰 개를 호랑이가 물어 죽였다. 이 때문에 보름 뒤에 산신제를 다시 지냈다. 또 제를 지내고 나서 떡시루를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떡시루가 땅에 나뒹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떡시루는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것들이 모두 산신령의 조화라고 믿었다.

제관이 선출된 뒤 정초에 제관과 집주(음식 장만하는 집) 집 오른쪽 대문에다 용기를 걸어 두고 대문간에 황토를 뿌린다. 제 당일이 되면 제물을 준비한다. 백설기는 한 말 석 되 서 홉을 시루 하나에 찐다. 제물은 모두 집에서 준비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제물을 진 사람이 맨 앞에 올라가고 그 뒤를 제관과 축관이 따라 올라간다.

산에 올라가면 먼저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용왕제는 산제당 아래에 있는 용왕샘에서 지낸다. 우선 용왕샘 안에는 짚을 열 십(十) 자로 깔고 그 위에 동․서․남․북․중앙 등 오방으로 김밥 다섯 개를 놓고 가운데에는 불린 미역을 놓는다. 그런 다음 그 앞에 [불밝이쌀](/topic/불밝이쌀)을 놓는다. 불밝이쌀은 쌀 한 되 서 홉을 종지에다 받쳐 놓고 발심지를 꽂은 다음 촛불을 밝힌다. 용왕샘 둑 앞에는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로는 북어포, 미역, 김, 메 열두 그릇 등을 준비한다. 제물이 진설되면 제관이 사배(四拜)를 하고 대동축을 [독축](/topic/독축)(讀祝)한다. 이 대동축은 용왕축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왕축(龍王祝)
維歲次 (壬午)正月(辛亥)朔 初三日(癸丑)
長村 一同 敢昭告于 龍王前에 祝願하옵기를 今年에도 雨順風調하야 농작물이 豐登하고 家禽이 足하오며 四方으로 들어오는 卑災橫禍를 막아주시고 出征軍人으로 하여금 勝戰鼓를 올리고 平和를 노래하며 한 사람도 變故 없이 돌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祝願하옵고 卑薄한 精誠으로 發願하오니 感應하소서

독축이 끝나면 [전지](/topic/전지)(全紙) 한 장으로 대동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동서남북으로 다니는 우리 자손들 자동차 사고 없게 해 주고, 군인 간 사람들 무사하게 해 주고, 동네 농사 잘 되고 질병 없게 해 주고, 가축도 무사하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이것으로 용왕제는 끝이 난다. 다음으로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제관 전체가 사배를 한다. 엎드려 사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산신축을 독축한다. 독축(讀祝)이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대동소지를 먼저 올린 다음 가정마다 개인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재(滓)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대동종이 [고깔](/topic/고깔)을 쓴다. 개인소지는 산제 봉성록(奉誠錄)을 미리 작성하여 일일이 식구 수대로 올린다. 그 뒤 제관 네 명 모두 연이어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제관들은 다시 사배를 한다. 그런 다음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철상](/topic/철상)(撤床)을 한다. 철상을 한 제물은 마을회관으로 들고 내려와 다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마을신앙 홍성장촌마을산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935_t_.jpg)

이튿날인 초나흗날 아침 9시쯤 마을회관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결산을 한다. 이 때 가장 먼저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소지가 잘 올라갔는지 여부를 제관들에게 묻는다. 이어 10시쯤에 제물을 나누어 먹고 결산한 다음 용기를 내린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와 풍물을 울린다. 이때 풍물을 울리는 동시에 용기(龍旗)를 내린다. 이어 대동회의를 소집하여 산제 비용과 동네 일 년 예산 등을 결산하고 마을잔치를 연다.
참고문헌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유래‘산신제’ 또는 ‘산제’라고 불리는 장촌의 산신제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마을](/topic/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그 유래를 유추할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은하면 유송리 사람이 아들이 없어 장촌산제당이 있는 곳에서 2~3년 동안 산신제를 지낸 뒤 아들을 얻었다. 그 이후부터 이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이 마을에 창궐함으로써 산신제를 지내자 전염병이 없어져 그 이후부터 산신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시작된 장촌마을의 산신제는 그 정성으로 인해 6․25전쟁 당시에도 이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유래‘산신제’ 또는 ‘산제’라고 불리는 장촌의 산신제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마을](/topic/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그 유래를 유추할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은하면 유송리 사람이 아들이 없어 장촌산제당이 있는 곳에서 2~3년 동안 산신제를 지낸 뒤 아들을 얻었다. 그 이후부터 이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이 마을에 창궐함으로써 산신제를 지내자 전염병이 없어져 그 이후부터 산신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시작된 장촌마을의 산신제는 그 정성으로 인해 6․25전쟁 당시에도 이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