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고려시대에 온역(瘟疫)을 일으키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 또는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 즉 다섯 계절의 전염병신을 물리치기 위한 국가제사. 각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유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을 제당에 [합사](/topic/합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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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온역(瘟疫)을 일으키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 또는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 즉 다섯 계절의 전염병신을 물리치기 위한 국가제사. 각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유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을 제당에 [합사](/topic/합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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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정의고려시대에 온역(瘟疫)을 일으키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 또는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 즉 다섯 계절의 전염병신을 물리치기 위한 국가제사. 각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유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을 제당에 [합사](/topic/합사)하기도 하였다.
정의고려시대에 온역(瘟疫)을 일으키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 또는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 즉 다섯 계절의 전염병신을 물리치기 위한 국가제사. 각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유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을 제당에 [합사](/topic/합사)하기도 하였다.
내용전염병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없던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전염병 중에서 전염성이 강한 온질(瘟疾)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고려 숙종과 예종대에 온질이 유행하자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오온신제(五瘟神祭)를 지냈다. 신종대에도 제를 지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전염병 치료법으로 크게 유행했다고 할 수 있다.

오온신제는 민간 차원의 제사라기보다 국가 차원의 제사이다. 도교(道敎)의 초제(醮祭)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고, 무속의례로 보기도 한다. 그 성격이 무엇이든 전근대사회에서 전염병은 악질(惡疾)이라 불렀다. 전염병은 바람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적당한 약물치료법을 찾기가 어려운 질병으로 취급되었기에 종교적 방법이 동원되곤 했다. 오온신제 역시 이러한 전염병 대처방법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탓으로 여겼기에 귀신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방법이 치유법으로 사용되곤 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며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저주와 엽승을 알 따름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전염병뿐만 아니라 모든 질병에도 종교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전염병은 오늘날까지 원인이 분명하지 않고, 피해가 커서 대처법이 다양하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꾸준히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전염병에 대한 종교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 예로 여역지신(癘疫之神)이라 하여 전염병과 온갖 질병을 예방하는 신령으로 여기기도 한다. 비록 오온신제라고는 칭하지 않지만 전염병과 몹쓸 질병에 대한 제사는 이러한 영향 속에 있다.

온역은 역질(疫疾)의 하나로, 고려 중기에 크게 유행했다. 고려 중기에는 10년에 한 번씩 전염병이 돌고, 해골이 길거리에 굴러다닐 정도로 전염병의 피해가 컸다. 국가 차원에서 이 전염병을 진압하기 위해 1100년(숙종 5)부터 1203년(신종 6)까지 오온신제, 온제(瘟祭)를 지냈다. 명칭은 다르지만 이 두 제사 모두 온역(瘟疫)이 돌때에 지냈다. 오온신을 중국에서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을 포함하여 다섯 계절의 전염병 신령을 지칭하기도 한다. 오온신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서 오온신제가 거행된 듯하다.

오온신제는 고려의 국도를 포함하여 지방의 행정단위인 5부(五部)에서 각기 거행되었다. 1100년(숙종 5) 6월에 5부에서 오온신제를 거행했고, 1101년(숙종 6) 2월에는 5부에서 온신제를 지냈다. 숙종 6년 3월에는 오온신제를 지냈고, 1109년(예종 4)에 5부에서 온신제를 지냈다. 1203년(신종 6)에는 군중(軍中)에 대역(大疫)이 돌자 칠귀(七鬼)와 오온신에게 치제했다. 이처럼 오온신제, 온신제는 국중보다 지방 행정단위인 5부에서 거행되는 사례와 관련이 깊다. 5부에서 일제히 오온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5부는 고려의 전국을 대표하는 곳으로, 전염병이 발발한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치료법을 사용했다. 전염병을 치료하던 종교적 방법인 도교의 초제, 도부신초제(道符神醮祭), 불교의 [경행](/topic/경행)(徑行), 반야법석(般若法席), 소룡도장(召龍道場) 등이 5부에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오온신제는 지방 단위에서 행해졌다. 이는 오온신제가 다섯 방위의 신령에게 지내는 제사인 동시에 지방 5부에서 행해진 지방형 전염병 치료방법이었다고 하겠다. 전염병이 발병한 경우에만 거행되었기 때문에 시행 시기는 정기적이지 않다.

오온신제는 다른 전염병 치유법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적 치유책인 여제(厲祭)로 대체된다. 여제는 전염병을 유발하는 15위의 [무주고혼](/topic/무주고혼)(無主孤魂)에게 지내는 유교식 제사이다. 이것은 조선 건국 후 불교식 의례의 유교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체된 의례이다. 1400년(정종 2)에 처음으로 여제단(厲祭壇)을 각 주현(州縣)에 설치했다. 사직단제, 성황제와 더불어 여제도 고을의 수령이 주관하는 제사인 관행제(官行祭)로 치러졌다.

여제는 여단(厲壇)이라는 제단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간혹 여제당(厲祭堂)이라 하여 당집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전남 진도와 강원도의 일부 [마을](/topic/마을)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내용전염병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없던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전염병 중에서 전염성이 강한 온질(瘟疾)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고려 숙종과 예종대에 온질이 유행하자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오온신제(五瘟神祭)를 지냈다. 신종대에도 제를 지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전염병 치료법으로 크게 유행했다고 할 수 있다.

오온신제는 민간 차원의 제사라기보다 국가 차원의 제사이다. 도교(道敎)의 초제(醮祭)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고, 무속의례로 보기도 한다. 그 성격이 무엇이든 전근대사회에서 전염병은 악질(惡疾)이라 불렀다. 전염병은 바람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적당한 약물치료법을 찾기가 어려운 질병으로 취급되었기에 종교적 방법이 동원되곤 했다. 오온신제 역시 이러한 전염병 대처방법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탓으로 여겼기에 귀신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방법이 치유법으로 사용되곤 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며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저주와 엽승을 알 따름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전염병뿐만 아니라 모든 질병에도 종교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전염병은 오늘날까지 원인이 분명하지 않고, 피해가 커서 대처법이 다양하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꾸준히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전염병에 대한 종교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 예로 여역지신(癘疫之神)이라 하여 전염병과 온갖 질병을 예방하는 신령으로 여기기도 한다. 비록 오온신제라고는 칭하지 않지만 전염병과 몹쓸 질병에 대한 제사는 이러한 영향 속에 있다.

온역은 역질(疫疾)의 하나로, 고려 중기에 크게 유행했다. 고려 중기에는 10년에 한 번씩 전염병이 돌고, 해골이 길거리에 굴러다닐 정도로 전염병의 피해가 컸다. 국가 차원에서 이 전염병을 진압하기 위해 1100년(숙종 5)부터 1203년(신종 6)까지 오온신제, 온제(瘟祭)를 지냈다. 명칭은 다르지만 이 두 제사 모두 온역(瘟疫)이 돌때에 지냈다. 오온신을 중국에서는 다섯 방위의 전염병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계절과 한 해의 중심을 포함하여 다섯 계절의 전염병 신령을 지칭하기도 한다. 오온신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서 오온신제가 거행된 듯하다.

오온신제는 고려의 국도를 포함하여 지방의 행정단위인 5부(五部)에서 각기 거행되었다. 1100년(숙종 5) 6월에 5부에서 오온신제를 거행했고, 1101년(숙종 6) 2월에는 5부에서 온신제를 지냈다. 숙종 6년 3월에는 오온신제를 지냈고, 1109년(예종 4)에 5부에서 온신제를 지냈다. 1203년(신종 6)에는 군중(軍中)에 대역(大疫)이 돌자 칠귀(七鬼)와 오온신에게 치제했다. 이처럼 오온신제, 온신제는 국중보다 지방 행정단위인 5부에서 거행되는 사례와 관련이 깊다. 5부에서 일제히 오온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5부는 고려의 전국을 대표하는 곳으로, 전염병이 발발한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치료법을 사용했다. 전염병을 치료하던 종교적 방법인 도교의 초제, 도부신초제(道符神醮祭), 불교의 [경행](/topic/경행)(徑行), 반야법석(般若法席), 소룡도장(召龍道場) 등이 5부에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오온신제는 지방 단위에서 행해졌다. 이는 오온신제가 다섯 방위의 신령에게 지내는 제사인 동시에 지방 5부에서 행해진 지방형 전염병 치료방법이었다고 하겠다. 전염병이 발병한 경우에만 거행되었기 때문에 시행 시기는 정기적이지 않다.

오온신제는 다른 전염병 치유법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적 치유책인 여제(厲祭)로 대체된다. 여제는 전염병을 유발하는 15위의 [무주고혼](/topic/무주고혼)(無主孤魂)에게 지내는 유교식 제사이다. 이것은 조선 건국 후 불교식 의례의 유교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체된 의례이다. 1400년(정종 2)에 처음으로 여제단(厲祭壇)을 각 주현(州縣)에 설치했다. 사직단제, 성황제와 더불어 여제도 고을의 수령이 주관하는 제사인 관행제(官行祭)로 치러졌다.

여제는 여단(厲壇)이라는 제단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간혹 여제당(厲祭堂)이라 하여 당집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전남 진도와 강원도의 일부 [마을](/topic/마을)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지역사례진도의 교동리에서는 1920년대 초반까지 여제가 거행되었다. 여제단은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을 얹은 단칸집으로 사방에 [돌담](/topic/돌담)이 둘러져 있었다. 이 제사는 교동리가 주관하고 이 밖에 서외리, 북상리, 사정리, 송현리 등이 참여했다. 제사는 일년에 두 번,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시월에 지냈다.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거리제](/topic/거리제)를 모신 뒤 4개 [마을](/topic/마을)에서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이 제물을 갖추어 여제단으로 향한다. 이때 주민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울리고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우~”하는 함성을 지르며 귀신을 몰아 여제단까지 함께 간다. 귀신을 몰아 여제단에 이르면 함성이 절정에 이른다. 제관들은 여제단 앞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치제한다. 제사를 마친 후에 한 사람이 “무자귀(無子鬼)”라고 외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일제히 “무자귀”하며 엎드려 절을 하고 이내 여제단 문을 닫는다. 이는 진도에 떠도는 귀신을 가둔 것이라고 한다. 여제단은 ‘귀신을 잡아 가둔 감옥’이라고 한다.

강원도 삼척시 일원에서는 여역지신을 모시고 질병 예방과 치유를 위해 마을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를 ‘서낭제’ 또는 ‘거리제’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서낭당](/topic/서낭당)에는 성황지신, 사직지신(또는 토지지신), 여역지신의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었다. 조선시대에 수령이 주관하던 관행제의 대상 신격들로, 관행제가 민간화 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삼척 지역에서는 보편적이다. 이러한 마을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주변 마을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낭당은 하천의 자연[제방](/topic/제방) 앞이나 고갯마루의 경계에 설치한다. 여역지신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전염병뿐만 아니라 소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에도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조선 후기에 전염병 발생 빈도가 높아지면서 특별한 방법이 없던 전염병 예방책, 방어책으로 여역지신이 마을신앙의 신령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의 발생 원인이 귀신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는 상식이 확산되었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서는 이러한 까닭에 1990년대 후반에 6위(位)의 [서낭신](/topic/서낭신) 중 여역지신을 제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질병에 대한 대처가 달라[지게](/topic/지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없앤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전염병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질병에 대한 대처법으로 시작된 오온신제는 여제, 여역지신에 대한 서낭제 등으로 명칭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효과적인 치유책이자 예방책으로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참고문헌중국의 신령 (G. 푸르너저, 조흥윤 역, 1984)
진도의 여제고 (나경수, 전남의 민속연구, 민속원, 1994)
고려시대 전염병과 치병의례 (이정숙, 이화사학연구 34, 이화사학연구소, 2007)
高麗史, 東國李相國集,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topic/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지역사례진도의 교동리에서는 1920년대 초반까지 여제가 거행되었다. 여제단은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을 얹은 단칸집으로 사방에 [돌담](/topic/돌담)이 둘러져 있었다. 이 제사는 교동리가 주관하고 이 밖에 서외리, 북상리, 사정리, 송현리 등이 참여했다. 제사는 일년에 두 번,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시월에 지냈다.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거리제](/topic/거리제)를 모신 뒤 4개 [마을](/topic/마을)에서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이 제물을 갖추어 여제단으로 향한다. 이때 주민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울리고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우~”하는 함성을 지르며 귀신을 몰아 여제단까지 함께 간다. 귀신을 몰아 여제단에 이르면 함성이 절정에 이른다. 제관들은 여제단 앞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치제한다. 제사를 마친 후에 한 사람이 “무자귀(無子鬼)”라고 외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일제히 “무자귀”하며 엎드려 절을 하고 이내 여제단 문을 닫는다. 이는 진도에 떠도는 귀신을 가둔 것이라고 한다. 여제단은 ‘귀신을 잡아 가둔 감옥’이라고 한다.

강원도 삼척시 일원에서는 여역지신을 모시고 질병 예방과 치유를 위해 마을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를 ‘서낭제’ 또는 ‘거리제’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서낭당](/topic/서낭당)에는 성황지신, 사직지신(또는 토지지신), 여역지신의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었다. 조선시대에 수령이 주관하던 관행제의 대상 신격들로, 관행제가 민간화 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삼척 지역에서는 보편적이다. 이러한 마을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주변 마을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낭당은 하천의 자연[제방](/topic/제방) 앞이나 고갯마루의 경계에 설치한다. 여역지신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전염병뿐만 아니라 소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에도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조선 후기에 전염병 발생 빈도가 높아지면서 특별한 방법이 없던 전염병 예방책, 방어책으로 여역지신이 마을신앙의 신령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의 발생 원인이 귀신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는 상식이 확산되었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서는 이러한 까닭에 1990년대 후반에 6위(位)의 [서낭신](/topic/서낭신) 중 여역지신을 제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질병에 대한 대처가 달라[지게](/topic/지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없앤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전염병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질병에 대한 대처법으로 시작된 오온신제는 여제, 여역지신에 대한 서낭제 등으로 명칭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효과적인 치유책이자 예방책으로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참고문헌중국의 신령 (G. 푸르너저, 조흥윤 역, 1984)
진도의 여제고 (나경수, 전남의 민속연구, 민속원, 1994)
고려시대 전염병과 치병의례 (이정숙, 이화사학연구 34, 이화사학연구소, 2007)
高麗史, 東國李相國集,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topic/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충남편1973
선출판사민간주술료법과 그 형태 유형김형주1996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부여지방의 단잡기오문선1997
공주문화원소라실장승제심우성 외1998
국립민속박물관개인의 피부병에 대한 마을공동체의 치병 의례 - 충남 부여의 ‘단(丹)잡기’를 중심으로이필영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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