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왕

한국무속신앙사전
나주 금성산의 산신. 여기서 ‘대왕’은 임금이 아니라 ‘신(神)’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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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산의 산신. 여기서 ‘대왕’은 임금이 아니라 ‘신(神)’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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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정의나주 금성산의 산신. 여기서 ‘대왕’은 임금이 아니라 ‘신(神)’을 가리킨다.
내용금성산신(錦城山神)이 금성대왕으로 칭해지는 것을 자료를 통해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이다. 『고려사(高麗史)』 권 106 열전(列傳) 19 심양(沈諹, 생몰년 미상)전에 보면, 장성현(長城縣)의 어떤 여자가 금성대왕이 자신에게 내려 “네가 금성신당의 무당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이리라” 하여 두려워 따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이 여자가 현인(縣人) 공윤구(孔允九)와 통하여 신의 말을 내어 “내가 장차 중국에 가려는데 반드시 공윤구를 데려 갈 것이다” 하니 나주의 관리가 말을 내 주었고, 하루는 역리(驛吏)가 도병마사에게 “금성대왕이 옵니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이 자료를 미루어 보아 이미 13세기 이전에 나주의 금성산신이 금성대왕으로 칭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금성산신은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고려사』 권 105 열전 18 정가신(鄭可臣)전에 보면, 나주(羅州) 사람이 정가신에게 “금성산신이 무(巫)에 내려서 ‘진도(珍島)와 탐라(耽羅) 정벌(征伐)에 있어 실로 내가 힘을 많이 썼는데 장사(將士)에게는 상(賞)을 주고 나에게는 녹(祿)을 주지 않음이 어찌된 일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封)하라’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 말에 혹한 정가신이 왕에게 간(諫)하여 정녕공으로 봉(封)하고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石)을 거두어 해마다 금성산의 사(祠)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금성산은 국가가 제사하는 산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금성산은 태조 2년(1393)에 호국백(護國伯)으로 봉해졌으며, 태종 14년(1414)에는 소사(小祀)에 편제되었다. 금성산에는 하나의 신당이 아니라 상실사(上室祠)ㆍ중실사(中室祠)ㆍ하실사(下室祠), 국제사(國祭祠), 예조당(禰祖堂) 등 5개의 신당이 있었다.

그러나 금성산 신당은 처음부터 무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음사(淫祀)로 비판받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5 나주목(羅州牧) 사묘조(祠廟條)를 보면, “매일 밤 기생 4명이 [사당](/topic/사당) 안에 윤번(輪番)으로 숙직했으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 이를 금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97권, 9년(1478) 10월 13일조를 보면, “딸을 시집보내는 자는 그 처녀를 데리고 먼저 [금성당](/topic/금성당)(錦城堂)에 머물면서 ‘산신(山神)에게 시집간 뒤에야 시집간다’고 아뢴다 하니 이러한 폐풍(弊風)을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타난다. 또한 이 기록에 의하면, 나주 금성산에 친히 제사하지 아니하면 그해에 반드시 질병이 있다 하여 추수한 뒤에 도내 백성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모두 가서 제사하였는데 늙은이는 이끌고 어린이는 끌려가면서 길을 메웠다고 한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금성대왕으로 상징되는 나주 금성산이 국가의 치제 대상이면서 아울러 지역 주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成宗實錄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 무속 (이능화, 서영대 역주, 창비, 2008)
한국대왕신앙의 역사와 현장 (신종원, 일지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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