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당

한국무속신앙사전
수성당
계양할미로 불리는 여신을 모시는 당. 계양할미는 8명의 딸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인근의 어장과 바다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당신(堂神)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산 35-17[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1974년 9월 27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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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할미로 불리는 여신을 모시는 당. 계양할미는 8명의 딸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인근의 어장과 바다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당신(堂神)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산 35-17[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1974년 9월 27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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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계양할미로 불리는 여신을 모시는 당. 계양할미는 8명의 딸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인근의 어장과 바다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당신(堂神)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산 35-17[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1974년 9월 27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수성당이 [자리](/topic/자리)하고 있는 죽막동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나무와 관련성이 많은 지역이다. 죽막동은 반월리의 서북쪽 수성당 옆 해변 [마을](/topic/마을)로, 과거에는 대막골이라 불렸다. 마을 뒤에 대밭이 있어 죽전(竹箭:시누대 화실)을 [저장](/topic/저장)한 막사(幕舍)의 마을이란 뜻으로 대막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성당의 또 다른 명칭으로 [대마](/topic/대마)골이 있다. 이는 수성당 옆 여울굴에서 [철마](/topic/철마)가 나왔다는 이 마을의 전설에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양할미는 키가 크고 뛰어난 영험성이 있다. 특히 키가 커서 [나막신](/topic/나막신)을 신고 [칠산바다](/topic/칠산바다)를 걸어다니며 물결이 센 곳을 잠재우고 항해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오늘날 수성당 안에는 무신도가 세 장 걸려 있다. 할머니 무신도를 중심으로 하여 입구 좌우측에 칼을 차고 무서운 자세를 하고 있는 관운장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당집 안에는 [장군](/topic/장군)이 그려진 무신도도 있었다고 한다.

항해자들과 관련된 수성당이 어느 시기부터 민속신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근래까지도 이 지역을 오고가던 어선, 특히 조기어업을 목적으로 칠산 어장을 찾는 어선들이 수성당 앞을 지날 때면 갑판에 조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는 사례를 보면 삼국시대의 이러한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속신앙으로서의 수성당과 관련된 제의는 해마다 정월 14일 밤에 지냈다. 죽막동 주민들은 이날 지내는 제의를 당산제라 한다.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제의는 반드시 이날 밤에 지냈다고 한다. 과거에는 무당이 참여하여 제의를 주관했으며, 마을회의를 통해 선정된 [제관](/topic/제관)이 제물을 준비했다. 수성당 제의에 사용되는 제물에는 떡, 백설기, 돼지머리, 과일, 술 등이다. 술은 직접 마을에서 준비해 놓은 것을 썼다고 한다. 제의 비용은 마을에서 모아 놓은 기금을 사용하였으나 지신밟기 등을 통해 걷어들인 마을자금으로도 제의 비용으로 섰다. 제의는 매우 엄격하게 치러졌다. 물론 제의 전과 후에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풍물을 치며 놀기도 하지만 제의를 지내는 동안은 정숙했다. 제의를 지낼 때는 수성당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축도 하고 소지도 올렸다. 제의가 끝나면 당집 주변에 약간의 음식을 뿌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학술조사보고서 제1집, 1994)
부안 죽막동 수성당의 고고민속학적 고찰 (표인주, 비교민속학 15, 비교민속학회, 1998)
부안죽막동유적주변지역지표조사보고서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학술조사보고서 제15집, 2008)
역사수성당의 역사는 삼국시대에까지 올려 잡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수성당은 오늘날과 같은 [마을](/topic/마을)굿 형태가 아니라 항해하던 사람들이 항해하기 전에 제사를 지내던 제의공간이었다. 오래전부터 서해 해로(海路)의 주요 길목인 이곳을 지나가던 항해자와 상인들이 수성당에 들러 [제물](/topic/제물)을 차려놓고 제의를 지낸 것으로 보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조사 과정에서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의식(儀式) 용구와 신격에 바치는 공헌물 등이 발굴되었다.

당집의 개축에 관한 기록은 국립전주박물관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수성당의 상량(上樑)에 쓰인 ‘승정기원후사갑자조선순조4년, 1804년 6월’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철종 원년(1850) 이전부터 당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고종 원년(1864)에 3차 및 1940년에 4차로 중건되었다. 이후 1973년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근래에 보수되었다.
형태수성당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북으로는 동진강 어귀에 접하고, 남으로는 줄포만을 끼고 있으며, 서로는 위도와 위도에 속한 상·하왕등도를 바라보고 있다. 예전에 부르던 명칭은 구랑사(九嫏祠)였으나 어느날 수성당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해안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수성당의 건물 구조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된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지붕](/topic/지붕)은 최근에 보수하면서 다시 [기와](/topic/기와)를 덮었다. 망와는 정면에 운용문, 측면과 뒷면에 귀면문으로 각각 표현하였다. [기단](/topic/기단)은 지형상 낮은 정면에 자연석을 2, 3단으로 쌓고 높은 뒷면에는 상대적을 1단으로 쌓았다. [초석](/topic/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조선무속의 현지연구최길성1987
서울대학교 출판부한국무속과 연희이두현1996
제8회 동양음악학국제학술회의경기도당굿의 굿춤이애주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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