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면산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매년 음력 7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에 접한 면산의 [산신당](/topic/산신당)에서 연행되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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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7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에 접한 면산의 [산신당](/topic/산신당)에서 연행되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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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특징대부분의 [마을](/topic/마을)제사가 음력 정월 또는 팔월 이후에 연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제천면산산신제는 음력 7월에 연행되는 산신제로, 연행 시기상 사례가 흔치 않다.
특징대부분의 [마을](/topic/마을)제사가 음력 정월 또는 팔월 이후에 연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제천면산산신제는 음력 7월에 연행되는 산신제로, 연행 시기상 사례가 흔치 않다.
정의매년 음력 7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에 접한 면산의 [산신당](/topic/산신당)에서 연행되는 산신제.
정의매년 음력 7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에 접한 면산의 [산신당](/topic/산신당)에서 연행되는 산신제.
참고문헌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내용부산리는 제천에서 서남쪽으로 25㎞가량 떨어진 충주시와의 경계에 위치하는 [마을](/topic/마을)로, 현 행정구역상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 속한다. 몇 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져 구성되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들은 수몰되고 현재 16가구에 3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은 첩첩산중의 오지에 입지한 전형적인 [화전](/topic/화전)촌(火田村)이다.

본래 부산리는 조선시대 청풍군 수하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제천군 수하면에 속하게 되었고, 1929년 다시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0년대 초 충주댐의 담수와 더불어 독립적인 행정리를 이루던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 진목리를 부산리에 병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산리는 산신당이 위치한 면산과 접하고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면산은 며느리산․며뉘산․면의산 등으로 불리면서 이를 한자로 옮겨 부산(婦山)이 되었고, 이를 따라 마을의 행정명도 부산리가 되었다. 면산의 명칭에 대한 또 다른 설(說)에 따르면 [이성계](/topic/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고려 유신 72명 가운데 세 사람이 이곳으로 옮겨와 목숨을 구하였다 하여 면위산(免危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면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1. 제당의 구성 : 부산리의 제당은 상당·하당의 이중적 구조가 많이 나타나는 충청 지역에서 흔치 않게 상당․중당․하당의 삼중적 구조를 보여 준다. 상당에는 산신을 모신 산제당(山祭堂)이 위치하고, 그 밑 마을과 인접한 곳에는 중당인 당산(堂山)이 자리하며, 마을 입구에는 [서낭당](/topic/서낭당)[城隍堂]으로 여기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리의 산제당은 부산리 뒤편에서 서쪽으로 300∼400m가량 떨어진 면산 자락에 있다. 정면과 측면이 한 칸가량 되는 작은 크기의 목조건물 위에 [지붕](/topic/지붕)은 석면 슬레이트를 얹었다. [상량문](/topic/상량문)의 ‘단기 사이구이년(檀紀 四二九二年)’이라는 글자에서 산제당이 1959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산제당 주위에는 말채나무․백화나무․칭칭이나무․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당샘 주변으로는 푸른 이끼가 풍부하게 자라고 있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제당 내 정면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쓴 신위가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산제당 자리에는 원래 건물이 없이 제단만을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작은 선돌을 세워 당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이 선돌은 지금도 산제당 곁에 남아 있다. 선돌 옆에는 메를 짓고 청수를 올릴 때 이용되는 깊이 50㎝ 정도의 산제샘이 있다.

산제당 아래쪽으로 약 30m쯤 떨어진 작은 평지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것이 부산리의 중당인 당산나무이다. 원래 당산목은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느릅나무와 돌배나무가 서 있었으나 두 나무 모두 넘어져 없어졌다.

느릅나무가 넘어진 것은 1985년이라고 한다. 그해 [제관](/topic/제관)이 손을 다쳐 피를 보았고, 산제를 모시는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려 평상시보다 일찍 제를 지냈는데 두고 온 촛불이 사흘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아 불길한 조짐으로 여겼다고 한다. 연이어 산신제를 모신 고양주가 크게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니 그해 가을에 분 태풍으로 느릅나무가 쓰러졌다고 한다.

돌배나무는 1998년에 넘어졌다. 산제당에 여자의 접근을 금하는 규율을 어긴 탓에 일어난 일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당산나무 두 그루는 1999년에 식수한 것이다.

부산리의 서낭당은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있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별도의 신체나 돌무더기는 없고 시루를 올려놓을 때 사용되는 가로 53㎝, 세로 30㎝의 돌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서낭목의 크기는 둘레 337㎝, 수고(樹高)는 10m 안팎이다. 예전에는 서낭목 맞은편에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으나 고사되었다고 한다.


2. 제의의 준비 : 부산리의 면산산신제는 매해 음력 6월 그믐날에 날을 받고 고양주와 축관을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음력 7월 초사흗날을 전후하여 날이 잡힌다.

음력 7월 초하룻날 아침이 되면 고양주는 우선 왼새끼를 꼬아 [금줄](/topic/금줄)을 준비한다. 왼새끼를 꼴 때에는 지푸라기 끝이 10㎝쯤 밖으로 삐치게 한다. 이는 잡귀나 돌림병이 금줄에 걸려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금줄의 주술적인 기능을 한층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아울러 [한지](/topic/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금줄의 중간 중간에 듬성듬성 끼운다.

고양주가 금줄을 꼬는 동안 그의 부인은 쌀 석 되 서 홉을 깨끗이 씻어서 밥을 짓고 누룩에 섞어 [조라술](/topic/조라술)을 빚는다. 조라술은 작은 항아리에 넣어 당산나무 옆에 땅을 파고 묻어 발효시킨다.

제물은 여느 마을의 동제에 비해 매우 단출한 편으로, 통돼지․백설기․[통북어](/topic/통북어)․메․조라술․밤․[대추](/topic/대추) 등을 준비한다. 요즈음 제물의 대부분은 읍내의 장터에 나가 미리 구입한다.

제물의 특징이라 한다면 상당, 중당, 하당에 올리는 제물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산제당에는 메와 청수만을 올린다. 당산에는 통돼지와 조라술․북어․밤․대추를 올리며, 하당인 서낭당에는 백설기를 올린다. 이 가운데 산제당에 올리는 메는 산제당 옆에서 직접 짓고, 조라술은 미리 당산 옆에 묻어 둔 것을 꺼내어 사용한다. 서낭당의 떡시루는 고양주의 집에서 솥에 얹어 쪄낸다.


3. 제의의 연행 : 제의 당일 아침이 되면 고양주와 축관은 면산에 올라 산제당과 당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마을 입구의 서낭당 주변도 정리해 둔다. 이때 준비해 둔 금줄을 산제당 입구, 산제당, 당산 입구, 당산나무, 마을 입구, 서낭당에 걸어 산신제가 연행될 것임을 알린다. 제당 정리를 마치고 금줄을 치고 나면 다시 고양주 집으로 내려와 하당인 서낭당에 올릴 떡시루를 솥에 올려 찐다.

떡시루가 완성되면 고양주와 축관, 마을사람 두세 명이 함께 제수로 올릴 돼지를 잡는다. 돼지는 당산에 올릴 제물이므로 당산과 마을 중간 즈음에서 준비한다. 내장을 빼 내고 털만 손질할 뿐 머리는 자르지 않는다. 당산에 올릴 때 통돼지를 그대로 올리기 때문이다.

돼지 손질이 끝나면 축관과 제관은 메를 지을 [노구솥](/topic/노구솥), 쌀, 청수그릇, 촉대(燭臺) 등을 챙겨 산제당으로 올라간다. [제상](/topic/제상)에 올릴 메는 당 옆 샘물을 길어 직접 짓는다. 메 준비가 끝나면 고양주와 축관은 [제복](/topic/제복)으로 갈아입고 산신의 신위 뒤에 걸린 한지와 [실타래](/topic/실타래)를 새 것으로 교체한 다음 메와 청수를 진설(陳設)하여 산신제를 지낼 준비를 끝낸다.

산신제의 제차는 매우 간결하다. 초에 불을 밝힌 뒤 [분향](/topic/분향)을 하고 재배한다. 곧이어 [독축](/topic/독축)(讀祝)이 이어지고 독축 후 재배한다. 재배 뒤에는 메를 몇 숟가락 떠서 함께 진설된 청수에 만다. 이는 유식(儒式) 제사에서 [헌다](/topic/헌다)(獻茶)와 같은 의미이다. [축문](/topic/축문)을 살라 소지를 올리고 재배하면 산신제의 모든 제차가 끝난다.

산신제가 끝나면 고양주와 축관은 다시 고양주의 집으로 내려와 당산제에 쓸 제물을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당산으로 오른다. 당산제의 제물로는 통돼지, 북어, 밤, 대추를 올린다. 이때 묻어 둔 조라술을 꺼내 사용한다.

당산제의 순서는 미리 당산목에 감아 둔 금줄에다 접은 한지를 거는 것으로 시작하여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재배․[헌작](/topic/헌작)으로 이어지며, 제상에 진설한 북어에 실타래를 감아 당산목에 거는 것으로 간단히 끝나게 된다. [철상](/topic/철상)을 하면서는 헌작한 조라술을 당산 주변에 골고루 뿌리며, 남아 있는 조라술로 간단히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다시 고양주 집으로 내려온 고양주와 축관은 오전에 마련해 둔 떡시루를 지게에 지고 하당인 서낭당으로 향한다. 서낭당에 도착한 고양주는 미리 둘러 둔 금줄에다 한지를 접어 걸고 시루를 진설한다. 시루 안에는 청수그릇을 얹고 그 안에 청수를 붓는다. 서낭제의 제차는 초에 불을 밝히고 분향한 다음 재배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난다.

대다수의 동제가 음력 정월과 시월 이후, 특히 정월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해 음력 칠월에 연행되는 부산리의 산제는 흔치 않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 자료를 찾아보면 부산리와 인접한 장선리와 제천시 청풍면․한수면, 충주시 산척면․동량면 등에도 음력 칠월 동제가 연행된다는 보고가 있어 이러한 관행이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거론된 칠월 동제 연행 지역이 대부분 산촌이며 화전민이 입지한 지역이어서 지난날 화전촌 지역의 보편적인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와 더불어 화전촌의 주된 [농업](/topic/농업) 생산물인 [고추](/topic/고추), [감자](/topic/감자), [옥수수](/topic/옥수수) 등의 [수확](/topic/수확)기도 이때와 겹쳐 있어 생산물의 수확과 음력 칠월 동제의 연관성도 생각할 만하다.
참고문헌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내용부산리는 제천에서 서남쪽으로 25㎞가량 떨어진 충주시와의 경계에 위치하는 [마을](/topic/마을)로, 현 행정구역상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 속한다. 몇 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져 구성되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들은 수몰되고 현재 16가구에 3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은 첩첩산중의 오지에 입지한 전형적인 [화전](/topic/화전)촌(火田村)이다.

본래 부산리는 조선시대 청풍군 수하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제천군 수하면에 속하게 되었고, 1929년 다시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0년대 초 충주댐의 담수와 더불어 독립적인 행정리를 이루던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 진목리를 부산리에 병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산리는 산신당이 위치한 면산과 접하고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면산은 며느리산․며뉘산․면의산 등으로 불리면서 이를 한자로 옮겨 부산(婦山)이 되었고, 이를 따라 마을의 행정명도 부산리가 되었다. 면산의 명칭에 대한 또 다른 설(說)에 따르면 [이성계](/topic/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고려 유신 72명 가운데 세 사람이 이곳으로 옮겨와 목숨을 구하였다 하여 면위산(免危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면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1. 제당의 구성 : 부산리의 제당은 상당·하당의 이중적 구조가 많이 나타나는 충청 지역에서 흔치 않게 상당․중당․하당의 삼중적 구조를 보여 준다. 상당에는 산신을 모신 산제당(山祭堂)이 위치하고, 그 밑 마을과 인접한 곳에는 중당인 당산(堂山)이 자리하며, 마을 입구에는 [서낭당](/topic/서낭당)[城隍堂]으로 여기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리의 산제당은 부산리 뒤편에서 서쪽으로 300∼400m가량 떨어진 면산 자락에 있다. 정면과 측면이 한 칸가량 되는 작은 크기의 목조건물 위에 [지붕](/topic/지붕)은 석면 슬레이트를 얹었다. [상량문](/topic/상량문)의 ‘단기 사이구이년(檀紀 四二九二年)’이라는 글자에서 산제당이 1959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산제당 주위에는 말채나무․백화나무․칭칭이나무․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당샘 주변으로는 푸른 이끼가 풍부하게 자라고 있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제당 내 정면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쓴 신위가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산제당 자리에는 원래 건물이 없이 제단만을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작은 선돌을 세워 당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이 선돌은 지금도 산제당 곁에 남아 있다. 선돌 옆에는 메를 짓고 청수를 올릴 때 이용되는 깊이 50㎝ 정도의 산제샘이 있다.

산제당 아래쪽으로 약 30m쯤 떨어진 작은 평지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것이 부산리의 중당인 당산나무이다. 원래 당산목은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느릅나무와 돌배나무가 서 있었으나 두 나무 모두 넘어져 없어졌다.

느릅나무가 넘어진 것은 1985년이라고 한다. 그해 [제관](/topic/제관)이 손을 다쳐 피를 보았고, 산제를 모시는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려 평상시보다 일찍 제를 지냈는데 두고 온 촛불이 사흘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아 불길한 조짐으로 여겼다고 한다. 연이어 산신제를 모신 고양주가 크게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니 그해 가을에 분 태풍으로 느릅나무가 쓰러졌다고 한다.

돌배나무는 1998년에 넘어졌다. 산제당에 여자의 접근을 금하는 규율을 어긴 탓에 일어난 일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당산나무 두 그루는 1999년에 식수한 것이다.

부산리의 서낭당은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있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별도의 신체나 돌무더기는 없고 시루를 올려놓을 때 사용되는 가로 53㎝, 세로 30㎝의 돌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서낭목의 크기는 둘레 337㎝, 수고(樹高)는 10m 안팎이다. 예전에는 서낭목 맞은편에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으나 고사되었다고 한다.


2. 제의의 준비 : 부산리의 면산산신제는 매해 음력 6월 그믐날에 날을 받고 고양주와 축관을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음력 7월 초사흗날을 전후하여 날이 잡힌다.

음력 7월 초하룻날 아침이 되면 고양주는 우선 왼새끼를 꼬아 [금줄](/topic/금줄)을 준비한다. 왼새끼를 꼴 때에는 지푸라기 끝이 10㎝쯤 밖으로 삐치게 한다. 이는 잡귀나 돌림병이 금줄에 걸려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금줄의 주술적인 기능을 한층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아울러 [한지](/topic/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금줄의 중간 중간에 듬성듬성 끼운다.

고양주가 금줄을 꼬는 동안 그의 부인은 쌀 석 되 서 홉을 깨끗이 씻어서 밥을 짓고 누룩에 섞어 [조라술](/topic/조라술)을 빚는다. 조라술은 작은 항아리에 넣어 당산나무 옆에 땅을 파고 묻어 발효시킨다.

제물은 여느 마을의 동제에 비해 매우 단출한 편으로, 통돼지․백설기․[통북어](/topic/통북어)․메․조라술․밤․[대추](/topic/대추) 등을 준비한다. 요즈음 제물의 대부분은 읍내의 장터에 나가 미리 구입한다.

제물의 특징이라 한다면 상당, 중당, 하당에 올리는 제물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산제당에는 메와 청수만을 올린다. 당산에는 통돼지와 조라술․북어․밤․대추를 올리며, 하당인 서낭당에는 백설기를 올린다. 이 가운데 산제당에 올리는 메는 산제당 옆에서 직접 짓고, 조라술은 미리 당산 옆에 묻어 둔 것을 꺼내어 사용한다. 서낭당의 떡시루는 고양주의 집에서 솥에 얹어 쪄낸다.


3. 제의의 연행 : 제의 당일 아침이 되면 고양주와 축관은 면산에 올라 산제당과 당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마을 입구의 서낭당 주변도 정리해 둔다. 이때 준비해 둔 금줄을 산제당 입구, 산제당, 당산 입구, 당산나무, 마을 입구, 서낭당에 걸어 산신제가 연행될 것임을 알린다. 제당 정리를 마치고 금줄을 치고 나면 다시 고양주 집으로 내려와 하당인 서낭당에 올릴 떡시루를 솥에 올려 찐다.

떡시루가 완성되면 고양주와 축관, 마을사람 두세 명이 함께 제수로 올릴 돼지를 잡는다. 돼지는 당산에 올릴 제물이므로 당산과 마을 중간 즈음에서 준비한다. 내장을 빼 내고 털만 손질할 뿐 머리는 자르지 않는다. 당산에 올릴 때 통돼지를 그대로 올리기 때문이다.

돼지 손질이 끝나면 축관과 제관은 메를 지을 [노구솥](/topic/노구솥), 쌀, 청수그릇, 촉대(燭臺) 등을 챙겨 산제당으로 올라간다. [제상](/topic/제상)에 올릴 메는 당 옆 샘물을 길어 직접 짓는다. 메 준비가 끝나면 고양주와 축관은 [제복](/topic/제복)으로 갈아입고 산신의 신위 뒤에 걸린 한지와 [실타래](/topic/실타래)를 새 것으로 교체한 다음 메와 청수를 진설(陳設)하여 산신제를 지낼 준비를 끝낸다.

산신제의 제차는 매우 간결하다. 초에 불을 밝힌 뒤 [분향](/topic/분향)을 하고 재배한다. 곧이어 [독축](/topic/독축)(讀祝)이 이어지고 독축 후 재배한다. 재배 뒤에는 메를 몇 숟가락 떠서 함께 진설된 청수에 만다. 이는 유식(儒式) 제사에서 [헌다](/topic/헌다)(獻茶)와 같은 의미이다. [축문](/topic/축문)을 살라 소지를 올리고 재배하면 산신제의 모든 제차가 끝난다.

산신제가 끝나면 고양주와 축관은 다시 고양주의 집으로 내려와 당산제에 쓸 제물을 [지게](/topic/지게)에 지고 당산으로 오른다. 당산제의 제물로는 통돼지, 북어, 밤, 대추를 올린다. 이때 묻어 둔 조라술을 꺼내 사용한다.

당산제의 순서는 미리 당산목에 감아 둔 금줄에다 접은 한지를 거는 것으로 시작하여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재배․[헌작](/topic/헌작)으로 이어지며, 제상에 진설한 북어에 실타래를 감아 당산목에 거는 것으로 간단히 끝나게 된다. [철상](/topic/철상)을 하면서는 헌작한 조라술을 당산 주변에 골고루 뿌리며, 남아 있는 조라술로 간단히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다시 고양주 집으로 내려온 고양주와 축관은 오전에 마련해 둔 떡시루를 지게에 지고 하당인 서낭당으로 향한다. 서낭당에 도착한 고양주는 미리 둘러 둔 금줄에다 한지를 접어 걸고 시루를 진설한다. 시루 안에는 청수그릇을 얹고 그 안에 청수를 붓는다. 서낭제의 제차는 초에 불을 밝히고 분향한 다음 재배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난다.

대다수의 동제가 음력 정월과 시월 이후, 특히 정월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해 음력 칠월에 연행되는 부산리의 산제는 흔치 않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 자료를 찾아보면 부산리와 인접한 장선리와 제천시 청풍면․한수면, 충주시 산척면․동량면 등에도 음력 칠월 동제가 연행된다는 보고가 있어 이러한 관행이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거론된 칠월 동제 연행 지역이 대부분 산촌이며 화전민이 입지한 지역이어서 지난날 화전촌 지역의 보편적인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와 더불어 화전촌의 주된 [농업](/topic/농업) 생산물인 [고추](/topic/고추), [감자](/topic/감자), [옥수수](/topic/옥수수) 등의 [수확](/topic/수확)기도 이때와 겹쳐 있어 생산물의 수확과 음력 칠월 동제의 연관성도 생각할 만하다.
中宗實錄
정음사한국의 무조흥윤1983
한국무속학회서울굿의 다양성과 구조김헌선2006
창비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무속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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