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묘

한국무속신앙사전
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묘당. 관우를 모신 전각은 현성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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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묘당. 관우를 모신 전각은 현성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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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식
정의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묘당. 관우를 모신 전각은 현성전이라고 한다.
정의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묘당. 관우를 모신 전각은 현성전이라고 한다.
참조[성제묘관우제사](/topic/성제묘관우제사)
참고문헌서울민속대관 1-민간신앙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1990)
관왕묘 제례악 연구 (송지원,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 음악학논총, 논문집간행위원회, 2000)
조선후기 무묘(武廟)의 창건과 향사(享祀)의 정치적 의미-관왕묘를 중심으로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제도, 집문당, 2003)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장장식, 민속학연구 14, 국립민속박물관, 2004)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으로-중구 방산동 성제묘의 관우제사 DVD (서울역사박물관, 2006)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현장조사 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7)
참조[성제묘관우제사](/topic/성제묘관우제사)
참고문헌서울민속대관 1-민간신앙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1990)
관왕묘 제례악 연구 (송지원,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 음악학논총, 논문집간행위원회, 2000)
조선후기 무묘(武廟)의 창건과 향사(享祀)의 정치적 의미-관왕묘를 중심으로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제도, 집문당, 2003)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장장식, 민속학연구 14, 국립민속박물관, 2004)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으로-중구 방산동 성제묘의 관우제사 DVD (서울역사박물관, 2006)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현장조사 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7)
내용성제묘는 문과 [담장](/topic/담장), 현성전(顯聖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구내가 넓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매각해 지금처럼 좁아졌다고 한다. 또 오른쪽 [협문](/topic/협문) 안에 건물이있었고 한 부부가 성제묘를 관리하면서 살았으나, 약 15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문은 북향이며, 정문과 양쪽의 협문으로 이루어진 삼문 형식이다. [지붕](/topic/지붕) 위에는 [기와](/topic/기와)를 올렸다. 삼문을 들어서면 신당인 현성전까지 연결되는 신도(神道)가 있으며, 현재는 보도블록을 깔았다. 신도의 양쪽에는 2개씩의 돌로 된 [동자상](/topic/동자상)이 있다. 이 가운데 왼쪽 뒤의 것은 상반신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이들 동자상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또 현성전 건물의 왼쪽 바깥에는 파손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중심 건물인 현성전 역시 북향으로 석단(石壇) 위에 세워져 있다. 석단의 중앙에 있는 3단의 [계단](/topic/계단)을 통해 석단에 오를 수 있다. 현성전은 정면 세 칸(3.14m), 측면 두 칸(3.35m)으로 이루어진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앞에는 네 쪽의 [분합문](/topic/분합문)을 달았다. 삼문과 현성전에 대해서는 1974년 10월에 서울시가 부분적으로 수리했다고 한다.

현성전의 정면에는 보개(寶蓋)를 얹은 닫집이 있고, 닫집 안에는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관우 부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관우는 [익선관](/topic/익선관)(翼蟬冠)을 쓰고 붉은 [곤룡포](/topic/곤룡포)를 입고 있다. 손의 한쪽은 수염을 쓰다듬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무릎 위에 올린 자세이다. 얼굴은 검은데 관우의 얼굴이 [대추](/topic/대추) 빛깔이라는 전승에 충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의 부인은 가채를 올리고 연녹색 [당의](/topic/당의)(唐衣)에 붉은색 [치마](/topic/치마)를 입고 있으며, 손은 공수(拱手)를 하고 있다.

현성전의 왼쪽 벽에 4점, 오른쪽 벽에 3점의 화본들이 걸려 있다. 왼쪽 벽의 안쪽으로부터 첫 번째는 [고깔](/topic/고깔)에 [장삼](/topic/장삼)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승려의 [좌상](/topic/좌상)이다. 관우가 처음으로 현성(顯聖)했다는 옥천대사(玉泉大師)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무관 복장을 한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관우를 협시(脇侍)하고 있는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다. 세 번째는 익선관을 쓰고 구름무늬가 있는 황금색 옷을 입고 의자에 앉은 상이다. 한 손으로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으며 다른 한 손은 책을 들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가 세워져 있다.『 삼국지』의 배송지(裴松之) 주에 인용된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관우는『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좋아했다고 하며,『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청룡언월도이다. 네 번째는 창을 들고 서 있는 무인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오른쪽 벽의 맨 안쪽 그림은 퇴색이 심하여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민속대관』에서는 활을 든 승려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 말을 끄는 마부 두 명, 깃발을 든 장수 한 명이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 또 말과 마부 한 명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의 순서 가운데 특히 왼쪽 벽의 순서는 『서울민속대관』과 다르다. 즉 『서울민속대관』에서는 관우상과 두 명의 무인상이 바뀌었다. 그것은 이들 그림이 탈부착이 쉬운 액자형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성전에는 이 밖에도 두 점의 화본이 있었다. 이것은 현성전 내에 걸려 있지는 않았지만 관리인 최석순에 따르면 최근에 어떤 미술학도가 연습 삼아 그려서 기증한 것이라고한다. 한 점은 관우부부상, 다른 한 점은 관우가 관평과 주창을 거느린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현성전 내부에는 보관하는 서적들이 있는데 그 목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5권 완질
『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4권
『관성제군훈상주(關聖帝君訓像註)』 2권
『영첨(靈籤)』 3권
『명성경(明聖經)』 2종 3책
『부우제군약언보전(孚佑帝君藥言寶典)』 제3권
『삼성보전(三聖寶典)』 1책
『시경독본』 1책
『시경독본(始經讀本)』 1책
『옥력지보초(玉曆至寶鈔)』 1책
『홀기(笏記)』 1책
『금강반야바라밀경정해(金剛般若婆羅密經正解)』 1책

이것을 『서울민속대관』의 해당 내용과 비교하면 그간 일부 서적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이들 서적의 보관 상태는 극히 허술하다. 대책이 없는 한 서적의 분실은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소장하고 있는 무구로는 창 두 점, [삼지창](/topic/삼지창) 두 점(길이 94㎝), 용머리 장식 한 점, 일산 두 점, 총채 같은 것 한 점이 있다.

성제묘의 보존 상태는 극히 열악한 편이다. 현성전 실내에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으며, 전적이나 무구(巫具)들은 거의 방치된 상태이다. 건물과 전적 등의 보존을 위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더불어 성제묘에 보관된 옛 홀기와 현행의 홀기에 대한 비교를 통해 제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용성제묘는 문과 [담장](/topic/담장), 현성전(顯聖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구내가 넓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매각해 지금처럼 좁아졌다고 한다. 또 오른쪽 [협문](/topic/협문) 안에 건물이있었고 한 부부가 성제묘를 관리하면서 살았으나, 약 15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문은 북향이며, 정문과 양쪽의 협문으로 이루어진 삼문 형식이다. [지붕](/topic/지붕) 위에는 [기와](/topic/기와)를 올렸다. 삼문을 들어서면 신당인 현성전까지 연결되는 신도(神道)가 있으며, 현재는 보도블록을 깔았다. 신도의 양쪽에는 2개씩의 돌로 된 [동자상](/topic/동자상)이 있다. 이 가운데 왼쪽 뒤의 것은 상반신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이들 동자상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또 현성전 건물의 왼쪽 바깥에는 파손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중심 건물인 현성전 역시 북향으로 석단(石壇) 위에 세워져 있다. 석단의 중앙에 있는 3단의 [계단](/topic/계단)을 통해 석단에 오를 수 있다. 현성전은 정면 세 칸(3.14m), 측면 두 칸(3.35m)으로 이루어진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앞에는 네 쪽의 [분합문](/topic/분합문)을 달았다. 삼문과 현성전에 대해서는 1974년 10월에 서울시가 부분적으로 수리했다고 한다.

현성전의 정면에는 보개(寶蓋)를 얹은 닫집이 있고, 닫집 안에는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관우 부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관우는 [익선관](/topic/익선관)(翼蟬冠)을 쓰고 붉은 [곤룡포](/topic/곤룡포)를 입고 있다. 손의 한쪽은 수염을 쓰다듬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무릎 위에 올린 자세이다. 얼굴은 검은데 관우의 얼굴이 [대추](/topic/대추) 빛깔이라는 전승에 충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의 부인은 가채를 올리고 연녹색 [당의](/topic/당의)(唐衣)에 붉은색 [치마](/topic/치마)를 입고 있으며, 손은 공수(拱手)를 하고 있다.

현성전의 왼쪽 벽에 4점, 오른쪽 벽에 3점의 화본들이 걸려 있다. 왼쪽 벽의 안쪽으로부터 첫 번째는 [고깔](/topic/고깔)에 [장삼](/topic/장삼)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승려의 [좌상](/topic/좌상)이다. 관우가 처음으로 현성(顯聖)했다는 옥천대사(玉泉大師)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무관 복장을 한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관우를 협시(脇侍)하고 있는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다. 세 번째는 익선관을 쓰고 구름무늬가 있는 황금색 옷을 입고 의자에 앉은 상이다. 한 손으로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으며 다른 한 손은 책을 들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가 세워져 있다.『 삼국지』의 배송지(裴松之) 주에 인용된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관우는『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좋아했다고 하며,『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청룡언월도이다. 네 번째는 창을 들고 서 있는 무인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오른쪽 벽의 맨 안쪽 그림은 퇴색이 심하여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민속대관』에서는 활을 든 승려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 말을 끄는 마부 두 명, 깃발을 든 장수 한 명이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 또 말과 마부 한 명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의 순서 가운데 특히 왼쪽 벽의 순서는 『서울민속대관』과 다르다. 즉 『서울민속대관』에서는 관우상과 두 명의 무인상이 바뀌었다. 그것은 이들 그림이 탈부착이 쉬운 액자형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성전에는 이 밖에도 두 점의 화본이 있었다. 이것은 현성전 내에 걸려 있지는 않았지만 관리인 최석순에 따르면 최근에 어떤 미술학도가 연습 삼아 그려서 기증한 것이라고한다. 한 점은 관우부부상, 다른 한 점은 관우가 관평과 주창을 거느린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현성전 내부에는 보관하는 서적들이 있는데 그 목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5권 완질
『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4권
『관성제군훈상주(關聖帝君訓像註)』 2권
『영첨(靈籤)』 3권
『명성경(明聖經)』 2종 3책
『부우제군약언보전(孚佑帝君藥言寶典)』 제3권
『삼성보전(三聖寶典)』 1책
『시경독본』 1책
『시경독본(始經讀本)』 1책
『옥력지보초(玉曆至寶鈔)』 1책
『홀기(笏記)』 1책
『금강반야바라밀경정해(金剛般若婆羅密經正解)』 1책

이것을 『서울민속대관』의 해당 내용과 비교하면 그간 일부 서적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이들 서적의 보관 상태는 극히 허술하다. 대책이 없는 한 서적의 분실은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소장하고 있는 무구로는 창 두 점, [삼지창](/topic/삼지창) 두 점(길이 94㎝), 용머리 장식 한 점, 일산 두 점, 총채 같은 것 한 점이 있다.

성제묘의 보존 상태는 극히 열악한 편이다. 현성전 실내에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으며, 전적이나 무구(巫具)들은 거의 방치된 상태이다. 건물과 전적 등의 보존을 위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더불어 성제묘에 보관된 옛 홀기와 현행의 홀기에 대한 비교를 통해 제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방산동의 성제묘가 언제 건립되고 언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는지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성제묘 안내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표현이다. 그런데 성제묘에 대한 기록은 고종 때 간행된『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나『 명성경(明聖經)』등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성제묘 역시 관우신앙이 성행하던 조선 고종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와는 달리 염초청에서 관성제군을 부군으로 모시며 지내던 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제가 염초청의 부군으로 모셔진 흔적은 현재 성제묘 제사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현 성제묘 제사의 대상인 관우부부는 ‘현한수정후관우부군(顯漢壽亭候關羽府君)’과 ‘현혜숙인송씨(顯惠淑人宋氏)’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성제묘의 제사가 조선시대 부군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방산동 성제묘의 관우제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기보다 방산동 일대에 있던 군 관련 기관과 거기에 소속된 군인과 관리들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제묘의 안내판에는 방산동의 성제묘를 남묘나 동묘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이 같은 내용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현 방산동 성제묘와 조선시대 염초청 부군당의 성제청 간의 관련성은 좀 더 탐구해야 한다.
역사방산동의 성제묘가 언제 건립되고 언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는지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성제묘 안내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표현이다. 그런데 성제묘에 대한 기록은 고종 때 간행된『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나『 명성경(明聖經)』등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성제묘 역시 관우신앙이 성행하던 조선 고종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와는 달리 염초청에서 관성제군을 부군으로 모시며 지내던 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제가 염초청의 부군으로 모셔진 흔적은 현재 성제묘 제사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현 성제묘 제사의 대상인 관우부부는 ‘현한수정후관우부군(顯漢壽亭候關羽府君)’과 ‘현혜숙인송씨(顯惠淑人宋氏)’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성제묘의 제사가 조선시대 부군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방산동 성제묘의 관우제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기보다 방산동 일대에 있던 군 관련 기관과 거기에 소속된 군인과 관리들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제묘의 안내판에는 방산동의 성제묘를 남묘나 동묘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이 같은 내용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현 방산동 성제묘와 조선시대 염초청 부군당의 성제청 간의 관련성은 좀 더 탐구해야 한다.
한국무속학회황해도 굿에 쓰이는 종이 신화와 신구의 종류, 형식, 상징성 고찰양종승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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