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깊은구지도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1동, 일명 ‘깊은구지’에서 서력 기원 기준으로 매 홀수 연도에 개최되는 동제. ‘깊은구지’는 지금의 심곡본1동 605[번지](/topic/번지)(7통2반) 일대로, 예전에는 심곡9리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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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1동, 일명 ‘깊은구지’에서 서력 기원 기준으로 매 홀수 연도에 개최되는 동제. ‘깊은구지’는 지금의 심곡본1동 605[번지](/topic/번지)(7통2반) 일대로, 예전에는 심곡9리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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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영
정의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1동, 일명 ‘깊은구지’에서 서력 기원 기준으로 매 홀수 연도에 개최되는 동제. ‘깊은구지’는 지금의 심곡본1동 605[번지](/topic/번지)(7통2반) 일대로, 예전에는 심곡9리에 해당하였다.
정의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1동, 일명 ‘깊은구지’에서 서력 기원 기준으로 매 홀수 연도에 개최되는 동제. ‘깊은구지’는 지금의 심곡본1동 605[번지](/topic/번지)(7통2반) 일대로, 예전에는 심곡9리에 해당하였다.
내용격년마다 서기로 홀수 해 음력 시월에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마을번영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축제는 마을의 안녕·번영·평안과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번창을 빌며, 주민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한 마을 화합 잔치이다. 이러한 축제는 전통적 도당굿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의례절차는 ‘깊은구지도당제 추진위원회’가 맡아서 주관한다. 2003년부터 부천시에서 도당제 보조금을 지급받아 공식적인 지역 축제로 거행되고 있다. 부천 주민의 무병장수기원, 주민들의 화합과 친목 도모, 지역공동체 의식 고취, 정신적 결속과 지역문화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다.

축제의 명칭은 심곡동(深谷洞)의 옛 이름인 ‘깊은구지’에서 가져왔다. 주요 행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산신에게 올리는 ‘산신제’를 시작으로 거행된다. 이어서 윗고목나무로 이동해 고목에 ‘목신제’를 올린다. 오전 11시부터 [만장](/topic/만장)과 깃대를 들고 ‘시가행진’을하며, 낮 12시부터는 아랫고목나무에 모여 ‘대동제’를 거행한다. 이후 음식을 함께 나누며 풍물을 놀면서 저녁 늦게까지 ‘동네잔치’가 계속된다. 제의에 참여하는 인원은 600명 정도이다.

원래 도당굿을 하던 당집은 현재 심곡본1동 626[번지](/topic/번지)에 있었으나 1975년쯤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도당굿을 행하기 전에 까만 죽나무와 참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동쪽과 남쪽에 세워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현재는 도당굿을 하기 전에 마을 어귀에 갓 벤 소나무로 깎은 장승을 세우고 깨끗한 [황토](/topic/황토) 흙을 양쪽에 놓는다. 마을의 당산나무로는 원래 “할아버지 나무, 할머니 나무, 손자 나무”로 불리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손자 나무만 남아 있다.

할아버지 나무는 심곡본1동 604번지 일대의 마을 어귀에 있었으나 화재와 벼락으로 인해 지금은 몰골만이 남아 있다. 이 할아버지 나무는 옛날에 소사 지역을 측량할 때 기준점이었으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 나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topic/일화)가 전해져 온다. 김 아무개가 주택을 지으려고 어떤 청년을 시켜 땅 속으로 난 이나무의 우람한 [가지](/topic/가지)를 잘랐다고 한다. 그 뒤 가지를 자른 그 청년이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할머니 나무는 현재 심곡본1동 623번지 일대 정명 고등학교 초입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도로를 내기 위하여 잘렸다.

“지킴이”라고도 불리는 ‘손자 나무’는 현재 심곡본1동 638-3번지 일대에 서 있다. 이 손자 나무는 ‘경기도 지정보호수 제180호’로 지정되어 심곡본1동 주민센터에서 철책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42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고(樹高) 25m에 둘레는 7.8m이다. 깊은구지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마을의 발전과 안녕을담당해 온 수호목이다.
참고문헌부천문화원 향토문화자료 담당자 임영미 면담 (2010년 5월 14일, 부천문화원 수석연구위원 한도훈 면담, 2010년 5월 20일)
- (부천시 심곡본1동 주민자치센터 사회진흥·문화시민 담당자 박정아 면담, 2010년 5월 25일)
- (깊은구지도당제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영철 면담, 2010년 5월 29일)
- (디지털부천문화대전, bucheon.grandculture.net)
朝鮮地誌資料 (조선총독부, 1911)
부천시사 (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
내용격년마다 서기로 홀수 해 음력 시월에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마을번영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축제는 마을의 안녕·번영·평안과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번창을 빌며, 주민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한 마을 화합 잔치이다. 이러한 축제는 전통적 도당굿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의례절차는 ‘깊은구지도당제 추진위원회’가 맡아서 주관한다. 2003년부터 부천시에서 도당제 보조금을 지급받아 공식적인 지역 축제로 거행되고 있다. 부천 주민의 무병장수기원, 주민들의 화합과 친목 도모, 지역공동체 의식 고취, 정신적 결속과 지역문화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다.

축제의 명칭은 심곡동(深谷洞)의 옛 이름인 ‘깊은구지’에서 가져왔다. 주요 행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산신에게 올리는 ‘산신제’를 시작으로 거행된다. 이어서 윗고목나무로 이동해 고목에 ‘목신제’를 올린다. 오전 11시부터 [만장](/topic/만장)과 깃대를 들고 ‘시가행진’을하며, 낮 12시부터는 아랫고목나무에 모여 ‘대동제’를 거행한다. 이후 음식을 함께 나누며 풍물을 놀면서 저녁 늦게까지 ‘동네잔치’가 계속된다. 제의에 참여하는 인원은 600명 정도이다.

원래 도당굿을 하던 당집은 현재 심곡본1동 626[번지](/topic/번지)에 있었으나 1975년쯤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도당굿을 행하기 전에 까만 죽나무와 참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동쪽과 남쪽에 세워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현재는 도당굿을 하기 전에 마을 어귀에 갓 벤 소나무로 깎은 장승을 세우고 깨끗한 [황토](/topic/황토) 흙을 양쪽에 놓는다. 마을의 당산나무로는 원래 “할아버지 나무, 할머니 나무, 손자 나무”로 불리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손자 나무만 남아 있다.

할아버지 나무는 심곡본1동 604번지 일대의 마을 어귀에 있었으나 화재와 벼락으로 인해 지금은 몰골만이 남아 있다. 이 할아버지 나무는 옛날에 소사 지역을 측량할 때 기준점이었으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 나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topic/일화)가 전해져 온다. 김 아무개가 주택을 지으려고 어떤 청년을 시켜 땅 속으로 난 이나무의 우람한 [가지](/topic/가지)를 잘랐다고 한다. 그 뒤 가지를 자른 그 청년이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할머니 나무는 현재 심곡본1동 623번지 일대 정명 고등학교 초입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도로를 내기 위하여 잘렸다.

“지킴이”라고도 불리는 ‘손자 나무’는 현재 심곡본1동 638-3번지 일대에 서 있다. 이 손자 나무는 ‘경기도 지정보호수 제180호’로 지정되어 심곡본1동 주민센터에서 철책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42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고(樹高) 25m에 둘레는 7.8m이다. 깊은구지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마을의 발전과 안녕을담당해 온 수호목이다.
참고문헌부천문화원 향토문화자료 담당자 임영미 면담 (2010년 5월 14일, 부천문화원 수석연구위원 한도훈 면담, 2010년 5월 20일)
- (부천시 심곡본1동 주민자치센터 사회진흥·문화시민 담당자 박정아 면담, 2010년 5월 25일)
- (깊은구지도당제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영철 면담, 2010년 5월 29일)
- (디지털부천문화대전, bucheon.grandculture.net)
朝鮮地誌資料 (조선총독부, 1911)
부천시사 (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
역사‘깊은구지[深谷]도당제’는 그 기원이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현재 행정구역 명칭 상으로는 심곡(深谷)본1동에 해당된다. 이곳은 옛날 마니골(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곳은 토양이 척박하고 토질이 나빠 조, 콩, [메밀](/topic/메밀) 등을 주로 심었다고 한다. 이 길에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 ‘손자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현재 도당굿을 지낼 때 대상이 되는 나무로, ‘손자 나무’에 해당한다. 이 지역 일대가 골이 깊고 나무가 울창하여 [마을](/topic/마을) 이름이 ‘깊은구지’라고 붙여진 것으로,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심곡동은 부천군이 탄생하기 이전까지는 계속하여 부평에 속해 발전해 왔다. 부평도호부, 이후 부평군 때에는 ‘석천면’ 또는 ‘돌내면’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냇물 돌아드는 곳’을 이르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천(石川)이 되었다. 원래는 회천(回川)으로 표기해야 맞다. 이 지역이 바로 심곡리 지역이었고,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소사역이 설치된 곳이다. 1914년에 부천군이 신설되어 계남면 심곡리가 되었다. 계남면이라는 명칭은 부평의 주산(主山)인 ‘계양산 남쪽에 있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계남면이 소사면, 소사읍으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소속된 지역도 명칭이 바뀌었다. 1973년에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자 시(市) 조례 제85호에 의하여 심곡 2·4·5·8·9리 일원이 심곡1동, 심곡1·3·6·7리 일원이 심곡2동으로 각각 편제되었다.

1983년 9월 1일 시 조례 제546호에 의한 동 관할구역 변경으로 심곡2동에서 17개 통이 심곡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1년에는 심곡1동에서 심곡본동이 분동되고, 심곡본동은 심곡본2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다시 심곡본동으로 불리고 있다. 심곡1동은 심곡본1동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6년 10월 말 현재 심곡본동에는 7,517가구에 2만 2,028명, 심곡본1동에는 7,430가구에 2만 1,910명이 각각 살고 있다. 소사구 심곡본동과 심곡본1동은 모두 합쳐 1.7㎢이다.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깊은 골짜기(깊은구지)와 높은 고개들을 형성하고 있는 부천의 주산을 ‘성주산(聖柱山)’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렀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1년에 발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화오현산(華梧峴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동과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 200m이며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성주산으로표기되어 있다.성주산이라고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 소사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日王)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짐작된다. 성주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고 한다. 도시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소가 앉아 있는 형세를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가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 있는 형태이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大谷山]’으로 불렀다.

성주산 줄기를 따라 남녘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세 군데가 있다. 이 고개들은 하나같이 부천에서 시흥시와 인천시를 잇는 구실을 하고 있다. 가장 동쪽에 있는 부천시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을 잇는 고개를 ‘[여우고개](/topic/여우고개)’라 한다. 그다음 고개가 ‘하우고개’, 인천과 접해 있는 고개를 ‘마니고개’라 한다. ‘마니’는‘머리’라는 뜻이므로 마니고개를 머리고개라고 할 수 있다.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如牛)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如牛]하여 여우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에서 변화된것으로 보아 여윈 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이 고개를 한자로 호현(狐峴)이라고 한다. 이는 이곳이 나무가 많고 후미진 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하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하우고개라 부르게 된 데에는 산의 형태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topic/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의 세 [가지](/topic/가지)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 이 산이 와우산이기 때문에 이 산을 넘는 고개 이름도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와우→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나오는 ‘하우하우’하는 거친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고개에는 예부터 행인들을 강탈하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아래에 모여 떼지어 고개를 넘었다. 언제 어디서 도둑떼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조선지지자료』에서 이 고개를 ‘화오고개’로 표기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산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산과 고개가 높고 골이 깊은 지역이던 ‘깊은구지’마을에서는 추수가 끝나는 음력 시월 초순 무렵에 격년으로 당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날고기[生肉]와 선지 일곱 그릇을 제물로 바쳤다. 제물로 날고기와 선지를 바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아무개 성을 가진 조상 중에 하나가 성주산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호랑이는 머리 유골만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 뒤로 호랑이에게 바치는 제물이란 의미로 생육과 선지를 당제의 [제상](/topic/제상)에 올렸다고 한다.
역사‘깊은구지[深谷]도당제’는 그 기원이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현재 행정구역 명칭 상으로는 심곡(深谷)본1동에 해당된다. 이곳은 옛날 마니골(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곳은 토양이 척박하고 토질이 나빠 조, 콩, [메밀](/topic/메밀) 등을 주로 심었다고 한다. 이 길에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 ‘손자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현재 도당굿을 지낼 때 대상이 되는 나무로, ‘손자 나무’에 해당한다. 이 지역 일대가 골이 깊고 나무가 울창하여 [마을](/topic/마을) 이름이 ‘깊은구지’라고 붙여진 것으로,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심곡동은 부천군이 탄생하기 이전까지는 계속하여 부평에 속해 발전해 왔다. 부평도호부, 이후 부평군 때에는 ‘석천면’ 또는 ‘돌내면’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냇물 돌아드는 곳’을 이르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천(石川)이 되었다. 원래는 회천(回川)으로 표기해야 맞다. 이 지역이 바로 심곡리 지역이었고,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소사역이 설치된 곳이다. 1914년에 부천군이 신설되어 계남면 심곡리가 되었다. 계남면이라는 명칭은 부평의 주산(主山)인 ‘계양산 남쪽에 있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계남면이 소사면, 소사읍으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소속된 지역도 명칭이 바뀌었다. 1973년에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자 시(市) 조례 제85호에 의하여 심곡 2·4·5·8·9리 일원이 심곡1동, 심곡1·3·6·7리 일원이 심곡2동으로 각각 편제되었다.

1983년 9월 1일 시 조례 제546호에 의한 동 관할구역 변경으로 심곡2동에서 17개 통이 심곡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1년에는 심곡1동에서 심곡본동이 분동되고, 심곡본동은 심곡본2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다시 심곡본동으로 불리고 있다. 심곡1동은 심곡본1동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6년 10월 말 현재 심곡본동에는 7,517가구에 2만 2,028명, 심곡본1동에는 7,430가구에 2만 1,910명이 각각 살고 있다. 소사구 심곡본동과 심곡본1동은 모두 합쳐 1.7㎢이다.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깊은 골짜기(깊은구지)와 높은 고개들을 형성하고 있는 부천의 주산을 ‘성주산(聖柱山)’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렀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1년에 발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화오현산(華梧峴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동과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 200m이며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성주산으로표기되어 있다.성주산이라고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 소사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日王)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짐작된다. 성주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고 한다. 도시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소가 앉아 있는 형세를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가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 있는 형태이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大谷山]’으로 불렀다.

성주산 줄기를 따라 남녘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세 군데가 있다. 이 고개들은 하나같이 부천에서 시흥시와 인천시를 잇는 구실을 하고 있다. 가장 동쪽에 있는 부천시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을 잇는 고개를 ‘[여우고개](/topic/여우고개)’라 한다. 그다음 고개가 ‘하우고개’, 인천과 접해 있는 고개를 ‘마니고개’라 한다. ‘마니’는‘머리’라는 뜻이므로 마니고개를 머리고개라고 할 수 있다.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如牛)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如牛]하여 여우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에서 변화된것으로 보아 여윈 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이 고개를 한자로 호현(狐峴)이라고 한다. 이는 이곳이 나무가 많고 후미진 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하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하우고개라 부르게 된 데에는 산의 형태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topic/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의 세 [가지](/topic/가지)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 이 산이 와우산이기 때문에 이 산을 넘는 고개 이름도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와우→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나오는 ‘하우하우’하는 거친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고개에는 예부터 행인들을 강탈하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아래에 모여 떼지어 고개를 넘었다. 언제 어디서 도둑떼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조선지지자료』에서 이 고개를 ‘화오고개’로 표기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산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산과 고개가 높고 골이 깊은 지역이던 ‘깊은구지’마을에서는 추수가 끝나는 음력 시월 초순 무렵에 격년으로 당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날고기[生肉]와 선지 일곱 그릇을 제물로 바쳤다. 제물로 날고기와 선지를 바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아무개 성을 가진 조상 중에 하나가 성주산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호랑이는 머리 유골만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 뒤로 호랑이에게 바치는 제물이란 의미로 생육과 선지를 당제의 [제상](/topic/제상)에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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