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수영할매당

한국무속신앙사전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할매를 모신 신당. 민간신앙의 대상 신인 할머니의 신위를 모셨는데, 송씨할매당, 수영고당(姑堂), 산정머리할매당, 수영성내수호신당, 성주신당 등으로 불린다.
definition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할매를 모신 신당. 민간신앙의 대상 신인 할머니의 신위를 모셨는데, 송씨할매당, 수영고당(姑堂), 산정머리할매당, 수영성내수호신당, 성주신당 등으로 불린다.
mp3Cnt
0
wkorname
배도식
특징수영할매당 제사는 이 제당에서 단독으로 지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을](/topic/마을)과 관련이 있는 제장이 두 곳이나 더 있기 때문이다. 수영성의 산정머리에서 할매당과 독신묘의 제사가 끝나면 동문 근처에 있는 최영[장군](/topic/장군)신당인 무민사(武愍祠)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으로 수영성의 서북쪽에 있는 먼물샘[遠水井]으로 가서 [[우물](/topic/우물)제](/topic/우물제)를 지낸다.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의 신위도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먼물샘은 조선시대 때부터 이 지역의 유일한 식수 공급처로, 우물신(용왕)이 관장한다고 여겨 해마다 받들어 수신을 모셔왔다. 이러한 제사는 마을의 안과태평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도 있지만 정초에 행하던 지신밟기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놀던 [수영야류](/topic/수영야류)를 무사히 치르기 위한 [고사](/topic/고사) 성격도 띠고 있다.
참고문헌수영전통문화재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1997)
부산지명총람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0)
부산의 당제 (김승찬,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수영구의 민속과 문화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2005)
수영민속총집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2009)
특징수영할매당 제사는 이 제당에서 단독으로 지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을](/topic/마을)과 관련이 있는 제장이 두 곳이나 더 있기 때문이다. 수영성의 산정머리에서 할매당과 독신묘의 제사가 끝나면 동문 근처에 있는 최영[장군](/topic/장군)신당인 무민사(武愍祠)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으로 수영성의 서북쪽에 있는 먼물샘[遠水井]으로 가서 [[우물](/topic/우물)제](/topic/우물제)를 지낸다.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의 신위도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먼물샘은 조선시대 때부터 이 지역의 유일한 식수 공급처로, 우물신(용왕)이 관장한다고 여겨 해마다 받들어 수신을 모셔왔다. 이러한 제사는 마을의 안과태평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도 있지만 정초에 행하던 지신밟기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놀던 [수영야류](/topic/수영야류)를 무사히 치르기 위한 [고사](/topic/고사) 성격도 띠고 있다.
참고문헌수영전통문화재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1997)
부산지명총람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0)
부산의 당제 (김승찬,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수영구의 민속과 문화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2005)
수영민속총집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회, 2009)
정의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할매를 모신 신당. 민간신앙의 대상 신인 할머니의 신위를 모셨는데, 송씨할매당, 수영고당(姑堂), 산정머리할매당, 수영성내수호신당, 성주신당 등으로 불린다.
정의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할매를 모신 신당. 민간신앙의 대상 신인 할머니의 신위를 모셨는데, 송씨할매당, 수영고당(姑堂), 산정머리할매당, 수영성내수호신당, 성주신당 등으로 불린다.
내용할매당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 옛날에는 음력 섣달그믐날 자정에 모셨지만 근년에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새벽에 모시다가 요새는 정월대보름날 밤 10시쯤에 모신다.

할매당에서 모시는 신위는 송씨할매신위이다. 송씨할매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살던 할머니로, 어느 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본 군인들의 희롱에 분개하여 과감히 대응하여이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나무를 해 [가지](/topic/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 인근에서는 이 할머니를 강단 있는 사람으로 보고 돌아가신 후 그의 장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할매당에 송씨할매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모셔 오던 할머니 신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되어 이 신위의 정체가 유명무실해질 즈음,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아픔이 [번지](/topic/번지)는 때에 일본 군인과 대처하여 이긴 [마을](/topic/마을)의 용감한 할머니가 신격화되어 옛날 할매 신격과 접맥된 신앙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하나는 조선시대 좌수영 수사가 있을 때부터 산신제를 지내 온 산신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독신묘 제사는 독기(纛旗)에 바치는 제사이므로 신위는 독기이다. 독기는 군대의 군기를 말하며 이를 신격화하여 신성시한 것이다.『동래영지(東萊營誌)』제전(祭典)조의 기록에 따르면 수영에서는 일년에 두 번 봄에는 경칩, 가을에는 [상강](/topic/상강)에 독제(纛祭)를 지냈다. 이때 희생으로 쓰는 제물인 염소와 돼지를 각 읍에서 바친다고 하였다.

제를 지낼 때 준비하는 제수는 메·닭·생선·명태·나물(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떡·과일·과자류·술 등이다. 간단히 모실 때에는 명태·떡·[사과](/topic/사과)·배·[참외](/topic/참외)·술 한 잔 정도를 마련하기도 한다.

제사를 모시는 차례는 성주신당(할매신위), 독신묘(독신기) 순이다. 그다음 신당 옆에 서 있는 수령400여 년이 된 곰솔나무(천연기념물 270호)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이 나무는 이곳에 좌수영이 있던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이곳에 주둔한 수군이 신변의 안전을 주선해 주는 군신목(軍神木)으로 섬긴 나무라 하여 제사를 지내왔다고 전해진다. 높이 22m, 아랫부분 둘레 4.5m, 수관 폭 약 21m의 지상으로부터 8m 높이에서 가지가 뻗은 아주 큰 나무이다. 마을 사람 가운데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가족은 미리 군신목에 와서 아들의 무사안전을 빌기도 한다. 인근에 있는 푸조나무(천연기념물 311호)도 거대하여 지신목(地神木)으로 여긴다. 이 나무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져도 지신할미의 보살핌이 있어 다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제관](/topic/제관)을 뽑을 때에는 제사 한 달 전에 마을에서 원로들이 모여 부정이 없고 성실하며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한 사람을 뽑아 제관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수영 지역의 급속한도시화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희박하게 되면서 제관직을 맡아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고르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한때 이곳의 토박이로 지신밟기와 [수영야류](/topic/수영야류)의 회원으로 일해 온 태말준 부부가 제사를 담당하기도 하고, 수영야류 예능보[유자](/topic/유자)인 태덕수가 오래도록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수영향우회에서 주관하여 제사를지내고 있다.
내용할매당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 옛날에는 음력 섣달그믐날 자정에 모셨지만 근년에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새벽에 모시다가 요새는 정월대보름날 밤 10시쯤에 모신다.

할매당에서 모시는 신위는 송씨할매신위이다. 송씨할매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살던 할머니로, 어느 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본 군인들의 희롱에 분개하여 과감히 대응하여이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나무를 해 [가지](/topic/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 인근에서는 이 할머니를 강단 있는 사람으로 보고 돌아가신 후 그의 장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할매당에 송씨할매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모셔 오던 할머니 신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되어 이 신위의 정체가 유명무실해질 즈음,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아픔이 [번지](/topic/번지)는 때에 일본 군인과 대처하여 이긴 [마을](/topic/마을)의 용감한 할머니가 신격화되어 옛날 할매 신격과 접맥된 신앙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하나는 조선시대 좌수영 수사가 있을 때부터 산신제를 지내 온 산신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독신묘 제사는 독기(纛旗)에 바치는 제사이므로 신위는 독기이다. 독기는 군대의 군기를 말하며 이를 신격화하여 신성시한 것이다.『동래영지(東萊營誌)』제전(祭典)조의 기록에 따르면 수영에서는 일년에 두 번 봄에는 경칩, 가을에는 [상강](/topic/상강)에 독제(纛祭)를 지냈다. 이때 희생으로 쓰는 제물인 염소와 돼지를 각 읍에서 바친다고 하였다.

제를 지낼 때 준비하는 제수는 메·닭·생선·명태·나물(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떡·과일·과자류·술 등이다. 간단히 모실 때에는 명태·떡·[사과](/topic/사과)·배·[참외](/topic/참외)·술 한 잔 정도를 마련하기도 한다.

제사를 모시는 차례는 성주신당(할매신위), 독신묘(독신기) 순이다. 그다음 신당 옆에 서 있는 수령400여 년이 된 곰솔나무(천연기념물 270호)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이 나무는 이곳에 좌수영이 있던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이곳에 주둔한 수군이 신변의 안전을 주선해 주는 군신목(軍神木)으로 섬긴 나무라 하여 제사를 지내왔다고 전해진다. 높이 22m, 아랫부분 둘레 4.5m, 수관 폭 약 21m의 지상으로부터 8m 높이에서 가지가 뻗은 아주 큰 나무이다. 마을 사람 가운데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가족은 미리 군신목에 와서 아들의 무사안전을 빌기도 한다. 인근에 있는 푸조나무(천연기념물 311호)도 거대하여 지신목(地神木)으로 여긴다. 이 나무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져도 지신할미의 보살핌이 있어 다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제관](/topic/제관)을 뽑을 때에는 제사 한 달 전에 마을에서 원로들이 모여 부정이 없고 성실하며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한 사람을 뽑아 제관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수영 지역의 급속한도시화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희박하게 되면서 제관직을 맡아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고르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한때 이곳의 토박이로 지신밟기와 [수영야류](/topic/수영야류)의 회원으로 일해 온 태말준 부부가 제사를 담당하기도 하고, 수영야류 예능보[유자](/topic/유자)인 태덕수가 오래도록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수영향우회에서 주관하여 제사를지내고 있다.
역사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에 수영성 안 산정머리에는 할매신을 모신 신당과 독신기를 모신 독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동래영지』단묘조에독당(纛堂)과 산정신사(山亭神祠)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산신당에 성주신당과 독신묘가 함께 있음을 보아 원래 산정신사와 독신당이 따로 있던 것이 뒷날 합쳐져 산정신사에함께 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1969년 12월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부락당제』에는 수영 산신당 안에 토신주위(土神主位)와 독신주위(纛神主位)의 [위패](/topic/위패)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972년에 김승찬 교수가 이 당집을 조사했을 때 당사의 오른쪽 칸에는 제구(祭具)가 놓여 있었고, 왼쪽 칸에는 주신지위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1936년 음력 십일월 초사흗날에중건했다는 기록(昭和十一年丙子陰十一月初三日壬申重建辰時立柱未時上樑)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의 당사는 1981년 5월 11일에 애향인 김기배(金己培)가 개축하여 왼쪽칸에는 목판에다「 독신묘」라고 쓴 [현판](/topic/현판)을 붙이고, 오른쪽 칸에는 「성주신당」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이는 원래의 독신묘 자리와 성주신당의 자리가 서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승찬 교수의 『부산의 당제』를 통해 할매당 안의 위패에 기록된 신격의 변천을 볼 수 있다. 1969년에는 왼쪽 방에 ‘토신주위’라 쓴 위패가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독신주위’라 쓴 위패가 있었는데, 1972년도 조사 때에는 ‘독신주위’라 쓴 위패는 없어지고, ‘토신주위’라 쓴 위패만 남아 있었다. 이 위패도 ‘토신주위(土神主位)’가 ‘토신지위’로 바뀌어 있었다. 1981년에는 왼쪽 방인 성주신당에 독신기가 들어가 있고, 오른쪽의 독신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2004년 조사 때에는 왼쪽 방에 ‘독신지신위’란 위패가 놓여있고, 오른쪽 방에는 ‘수영성내수호지신위’라는 위패가 놓여 있었다.

1981년에 제당을 중수하고 오석에 글자를 새겨 제당의 오른쪽에 석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임진왜란 이전부터 신당이 있었으며,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인 토지지신(土地之神)과 독신(纛神)을 함께 제사해 왔다.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했으므로 1960년대와 1981년에 한 차례씩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마을의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빌며 조상이 남기신 이 유산을 영원히 보존해 갈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이 글은 1981년 6월 25일 김병근(金丙根)이 짓고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신당 앞에는 또 하나의 안내판이 있다. 이라는 제목 아래 이 신당의 내력을 설명해 놓았다. 그 내용은 이 신당에서 조선시대 때 이곳 수영의 수사(水使)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독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수영성민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토지지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신당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 살면서 지조가 굳고 생활력이 강했던 송씨할매의 신위를 모시고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수영의 유지들이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이곳 산정머리 신당의 제사는 역사가400여 년이 되었는데 건물이 낡아서 1936년에 중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81년 중수하고, 2003년에 김기배의 아들 김종수(金鍾秀)가 개수하였다는 내용이다.
역사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에 수영성 안 산정머리에는 할매신을 모신 신당과 독신기를 모신 독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동래영지』단묘조에독당(纛堂)과 산정신사(山亭神祠)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산신당에 성주신당과 독신묘가 함께 있음을 보아 원래 산정신사와 독신당이 따로 있던 것이 뒷날 합쳐져 산정신사에함께 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1969년 12월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부락당제』에는 수영 산신당 안에 토신주위(土神主位)와 독신주위(纛神主位)의 [위패](/topic/위패)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972년에 김승찬 교수가 이 당집을 조사했을 때 당사의 오른쪽 칸에는 제구(祭具)가 놓여 있었고, 왼쪽 칸에는 주신지위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상량문](/topic/상량문)에는 1936년 음력 십일월 초사흗날에중건했다는 기록(昭和十一年丙子陰十一月初三日壬申重建辰時立柱未時上樑)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의 당사는 1981년 5월 11일에 애향인 김기배(金己培)가 개축하여 왼쪽칸에는 목판에다「 독신묘」라고 쓴 [현판](/topic/현판)을 붙이고, 오른쪽 칸에는 「성주신당」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이는 원래의 독신묘 자리와 성주신당의 자리가 서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승찬 교수의 『부산의 당제』를 통해 할매당 안의 위패에 기록된 신격의 변천을 볼 수 있다. 1969년에는 왼쪽 방에 ‘토신주위’라 쓴 위패가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독신주위’라 쓴 위패가 있었는데, 1972년도 조사 때에는 ‘독신주위’라 쓴 위패는 없어지고, ‘토신주위’라 쓴 위패만 남아 있었다. 이 위패도 ‘토신주위(土神主位)’가 ‘토신지위’로 바뀌어 있었다. 1981년에는 왼쪽 방인 성주신당에 독신기가 들어가 있고, 오른쪽의 독신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2004년 조사 때에는 왼쪽 방에 ‘독신지신위’란 위패가 놓여있고, 오른쪽 방에는 ‘수영성내수호지신위’라는 위패가 놓여 있었다.

1981년에 제당을 중수하고 오석에 글자를 새겨 제당의 오른쪽에 석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임진왜란 이전부터 신당이 있었으며,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인 토지지신(土地之神)과 독신(纛神)을 함께 제사해 왔다.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했으므로 1960년대와 1981년에 한 차례씩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마을의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빌며 조상이 남기신 이 유산을 영원히 보존해 갈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이 글은 1981년 6월 25일 김병근(金丙根)이 짓고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신당 앞에는 또 하나의 안내판이 있다. 이라는 제목 아래 이 신당의 내력을 설명해 놓았다. 그 내용은 이 신당에서 조선시대 때 이곳 수영의 수사(水使)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독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수영성민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토지지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신당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 살면서 지조가 굳고 생활력이 강했던 송씨할매의 신위를 모시고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수영의 유지들이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이곳 산정머리 신당의 제사는 역사가400여 년이 되었는데 건물이 낡아서 1936년에 중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81년 중수하고, 2003년에 김기배의 아들 김종수(金鍾秀)가 개수하였다는 내용이다.
형태수영동의 전통시장인 팔도시장에서 서쪽을 향하여 언덕으로 올라오면 수영성남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이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남문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작은 언덕 위에 신당이 있다. 신당을 중심으로 양 옆과 뒤쪽으로 [돌담](/topic/돌담)이 [가지](/topic/가지)런히 쳐져 있으며, 앞쪽은 철책으로 담을 대신한다. 평소에는 신당의 문이 잠겨 있다. 신당 앞에작은 직사각형의 시멘트 제단이 만들어져 있어 여기에 술과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신당 앞에 오래된 곰솔나무가 있어 신목으로 여겨 여기서도 간단한 제사를 올린다.

신당의 건물은 가로 3.6m, 세로 2.6m, 높이 3.0m의 크기로 팔작형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다. 벽체는 시멘트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이 당집은 두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오른쪽은수영성내수호신당(水營城內守護神堂), 왼쪽은 독신을 모신 독신당(纛神堂)이다. 오른쪽의 할매당 신당 안의 제단 위에는 ‘수영성내수호신지신위(水營城內守護神之神位)’라는위패가 붙어있다. 이 때문에 신당 앞의 [처마](/topic/처마) 밑에 세로로 된 나무판에다 「성주신당(城主神堂)」이라는 [현판](/topic/현판)을 붙여 놓았다. 제단은 신당 안의 북쪽에 마련되어 있다. 높이 84㎝, 가로 150㎝, 세로 50㎝의 시멘트 구조물이다. 왼쪽의 독신당에는 독신기를 모신 방으로 제단 위에‘독신지신위(纛神之神位)’라는 [위패](/topic/위패)가 있다. 이 때문에 신당 앞의 처마밑에 「독신묘(纛神廟)」라는 현판을 붙여 놓았다. 제단의 크기는 성주신당의 것과 같다. 왼쪽 바닥에는 독신기가 놓여 있다. 삼각형의 독신기의 크기는 밑변이 135㎝, 깃대 쪽이 86㎝, 사선이 153㎝이다. 바탕은 누른색이고, 가운데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문은 양편 모두 두 짝의 [여닫이](/topic/여닫이)로 되어 있고, 파란 바탕에 가운데에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형태수영동의 전통시장인 팔도시장에서 서쪽을 향하여 언덕으로 올라오면 수영성남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이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남문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작은 언덕 위에 신당이 있다. 신당을 중심으로 양 옆과 뒤쪽으로 [돌담](/topic/돌담)이 [가지](/topic/가지)런히 쳐져 있으며, 앞쪽은 철책으로 담을 대신한다. 평소에는 신당의 문이 잠겨 있다. 신당 앞에작은 직사각형의 시멘트 제단이 만들어져 있어 여기에 술과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신당 앞에 오래된 곰솔나무가 있어 신목으로 여겨 여기서도 간단한 제사를 올린다.

신당의 건물은 가로 3.6m, 세로 2.6m, 높이 3.0m의 크기로 팔작형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다. 벽체는 시멘트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이 당집은 두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오른쪽은수영성내수호신당(水營城內守護神堂), 왼쪽은 독신을 모신 독신당(纛神堂)이다. 오른쪽의 할매당 신당 안의 제단 위에는 ‘수영성내수호신지신위(水營城內守護神之神位)’라는위패가 붙어있다. 이 때문에 신당 앞의 [처마](/topic/처마) 밑에 세로로 된 나무판에다 「성주신당(城主神堂)」이라는 [현판](/topic/현판)을 붙여 놓았다. 제단은 신당 안의 북쪽에 마련되어 있다. 높이 84㎝, 가로 150㎝, 세로 50㎝의 시멘트 구조물이다. 왼쪽의 독신당에는 독신기를 모신 방으로 제단 위에‘독신지신위(纛神之神位)’라는 [위패](/topic/위패)가 있다. 이 때문에 신당 앞의 처마밑에 「독신묘(纛神廟)」라는 현판을 붙여 놓았다. 제단의 크기는 성주신당의 것과 같다. 왼쪽 바닥에는 독신기가 놓여 있다. 삼각형의 독신기의 크기는 밑변이 135㎝, 깃대 쪽이 86㎝, 사선이 153㎝이다. 바탕은 누른색이고, 가운데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문은 양편 모두 두 짝의 [여닫이](/topic/여닫이)로 되어 있고, 파란 바탕에 가운데에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